서울 삼전동 살인 미제 사건
1991년 ‘이형호 유괴사건’을 모티브로 한 영화 ‘그놈 목소리’가 화제를 모으면서 새삼 미제 사건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다. 피해자는 있지만 범인은 드러나지 않은 사건들. 과연 범인은 누구일까. 경찰은 왜 범인을 잡지 못하는 것일까.
경찰의 갖가지 수사기법과 범죄심리학까지 동원, 얼굴 없는 범인과 두뇌 싸움을 벌이고 있지만 진상이 밝혀지지 않은 채, 이들 미제 사건은 사람들의 기억에서 잊혀져가고 있다.
일명 ‘서울 삼전동 살인 사건’도 그 중 하나다. 3년여 전 발생한 이 사건은 살인을 둘러싼 여러 의문점들 외에도 ‘유일한 목격자’로 지목됐던 애완견까지 수사를 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져, 세간의 관심을 모은 바 있다. 하지만 사건의 진상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사건은 2003년 4월 6일 새벽 1시 40분께 서울 송파구 삼전동 한 주택가 지하방에서 화재가 일어나면서 시작된다.

당시 화재는 15분여 만에 진압됐으나, 방 안에서 잠자고 있던 전모(당시 25세)씨와 전씨의 여동생(당시 22세), 그리고 여동생의 약혼자 김모(당시 29세)씨가 모두 숨졌다.

처음에 단순 화재사고로 보였던 이 사건은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사체부검 결과가 밝혀지면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이들 세 사람은 화재로 죽은 것이 아니라, 흉기에 찔려 피살당한 것으로 밝혀졌다. 범인이 증거를 없애기 위해 현장에 불을 질
렀던 것이다.

경찰은 즉각 수사본부를 꾸리고 다각도로 수사를 시작했다. 하지만 사건 현장이 제대로 보존되지 않아 경찰은 처음부터 증거를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 또 불을 끄는 과정에서 집안의 집기 등 증거물들이 소방수에 쓸려나가 더욱 난관에 부딪혔다. 숨진 전씨 남매의 어머니 박모(49)씨는 사고 당시 “도난당한 물건은 전혀 없다. 없어진 것은 딸이 기르던 애완견 4년생 시추뿐”이라고 경찰에 진술, 이 사건은 ‘원한관계에 의한 살인’으로 추정됐다.

강력사건이 일어나면 피해자의 주변 사람들이 1차 수사대상에 오르게 마련.

특히 이 사건은 범인이 피살자들 중 전씨 남매에게 ‘집중적으로’ 흉기를 휘둘렀다는 점 때문에 ‘주변인물에 의한 살인’일 가능성이 점쳐졌다.

뿐만 아니라 피살자들이 서로 다른 2개의 흉기에 의해 몸에 상처를 입은 것으로 드러나 범인은 최소한 둘 이상인 것으로 추정되기도 했다.


범인 3년 넘게 오리무중
이런 가정 하에 가장 먼저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전씨 남매의 어머니 박씨와 박씨의 내연남.

경찰에 따르면 박씨는 사건이 발생하기 4개월 전, 전씨 남매 앞으로 보험을 가입했다. 그러나 보험수익자는 박씨 자신으로 해놓았던 것으로 드러났다. 이것이 유력한 용의점이었다.

또 사건이 일어나던 날 박씨는 피살자들과 함께 술을 마시고 집으로 들어왔으나, 그가 자리를 비운 40분 동안 피살자들이 변을 당했다. 그러나 박씨는 자신의 혐의를 완강히 부인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자신은 내연남을 만나러 갔다 왔다는 것.

당시 사건을 담당한 수서경찰서 강력팀 관계자는 “처음엔 박씨와 박씨의 내연남을 의심했지만 혐의점이 드러나지 않았다. 또 박씨의 내연남은 몸이 불편한 장애인이라 사실상 이들이 범행을 저질렀다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었다”며 당시를 회상했다. 두 번째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은 오빠 전씨의 직장동료 A씨. 오빠 전씨는 A씨의 회사 공금 횡령 사실과 복잡한 치정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여동생 또한 이 사실을 알고 있던 터라 자연스럽게 A씨가 용의자로 지목됐다. 하지만 A씨 역시 범행이 일어난 시각에 가족들과 함께 있는 등 분명한 알리바이가 밝혀져 용의선상에서 제외됐다. 그렇다면 도대체 범인은 누구일까.

애초에 용의선상에 오른 인물들이 무혐의로 밝혀지자, 경찰은 숨진 여동생 전씨가 기르던 애완견 시추에게 한 가닥 희망을 걸었다. 어쩌면 시추가 이 사건의 유일한 ‘목격자’일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은 즉각 ‘동물언어 번역기’를 일본에서 수입하고, 전문가의 도움을 받아 시추와 몇몇 용의자들을 상대로 사상초유의 ‘대질신문’을 벌였다. 하지만 성과는 없었다. 게다가 이 시추는 용의자들에게 친근감을 보이는가 하면 수사관들을 보며 적대감을 드러내, 애완견과 용의자들의 대질신문은 한바탕 해프닝으로 끝났다. 뚜렷한 수사 방향이 잡히지 않자, 경찰의 수사는 다시 제자리에서 현재 진행형이다.

사건을 담당한 경찰은 “원한관계에 의한 계획적인 살인으로 보이지만, 심증만 있을 뿐 물증이 없어 어려움을 겪고 있다”며 하소연했다. 경찰은 이 사건을 ‘살인청부업자의 소행’ 가능성으로 보고 있기도 하다.


원한 있는 사채업자일 수도
경찰은 “일반적으로 흉기에 의한 살인일 경우 과다출혈로 인해 피해자가 사망에 이른다. 그러나 이 사건 피살자들의 몸에 난 5~6군데 상처는 모두 급소였다. 즉 피살자들은 과다출혈로 사망한 것이 아니라 목과 옆구리 등에 치명상을 입고 숨진 것이다”라고 전했다. 경찰에 따르면 범인은 소위 ‘칼질’을 할 줄 아는 전문가다. 흉기를 사용한 수법 때문이다. 술에 만취한 오빠와 약혼남은 범인의 흉기를 피하기 위해 저항한 흔적이 사체에 남아 있었지만, 술을 마시지 않은 여동생은 완전히 제압당한 뒤 급소만을 정확히 찔렸다는 점에서 이 주장은 타당성이 있어 보인다.

그렇다면 누가, 왜 청부업자를 시켜 이들 3명을 살해한 것일까. 이에 대해 경찰은 ‘사채 문제’에 초점을 맞추고 현재 수사를 진행 중이라고 밝혔다.

실제로 전씨 남매는 사채업자로부터 수천만원을 빌려 쓴 것으로 경찰 조사결과 밝혀졌다. 또 전씨 남매가 그 사채업자와 자주 다퉜다는 사실도 알아냈다. 이는 사채업자가 청부한 자들에 의해 이들이 피살됐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부분이다. 경찰은 오랫동안 전씨 남매가 사채를 갚지 못하자 사채업자가 전씨 남매가 사채를 갚을 능력과 의사가 없는 것으로 보고 청부업자를 통해 보복 범행을 저질렀을 가능성에 주목하고 있다. 현재 전씨 남매에게 돈을 빌려 준 사채업자의 행방은 묘연한 상태다.

일각에서는 사채업자가 살인을 저지를 만한 실익이 없다는 이유에서 ‘제3의 범인’이 있을 가능성을 거론하고 있다. 과연 ‘삼전동 살인사건’은 사채업자에 의한 청부살인일까, 아니면 또 다른 주변인의 소행일까. 사건이 벌어진 지 3년 반이나 시간이 흘렀지만 이들의 죽음을 둘러싼 의문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고 있다.


애완견 전문가 윤신근 박사

“개의 반응, 거짓말탐지기보다 정확할 수 있다”

사건 당시 여러 용의자와 시추를 수사 상황실에서 대면했다는 애완견 전문가 윤신근 박사는 ‘시추가 범인을 알고 있을 가능성’에 대해 이견이 없었다.

윤 박사에 따르면 개들도 사람처럼 동물 행동학적, 심리학적인 면에서 기억을 하고 직감하는 능력이 있다. 이는 오감을 떠나서 초감각적인 능력이라고 한다.

윤 박사는 “동물병원에 치료를 받으로 온 개들을 보면 부들부들 떨고 있다. 그래서 개 주인에게 ‘이 개는 원래 이러느냐’고 물으면, 개의 주인들은 ‘동물병원 앞에만 오면 본능적으로 떠는 것 같다’고 입을 모은다”고 설명했다. 이어 윤 박사는 “개가 살해현장에 있었으면 분명 자신의 주인을 죽인 범인을 기억할 것이다. 용의자가 범인이라면 그 사람 눈빛을 보고 개는 행동변화를 일으킨다. 개의 행동변화가 용의자를 찾아내는 관건이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윤 박사는 “개의 반응은 어쩌면 거짓말탐지기보다 더 정확할 수 있다”고 조심스럽게 의견을 내놓으면서도 “하지만 3년이라는 시간이 지난 지금 개의 기억을 더듬는다는 것은 아무래도 무리가 따를 것”이라며 현재 상황을 비관했다.

한편, 당시 현장에 있었던 시추는 현재 8세이며, 현재는 전씨 남매의 어머니인 박씨와 함께 있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시추의 수명은 10~14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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