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의 신입사원 채용 기준이 크게 달라지고 있다. 십수년 전 만 해도 대기업들은 서울 상위권 대학 출신들을 무조건 선호했었다. 그러나 근년엔 상위권과 하위권을 가리지 않고 지원자의 자질과 업무능력을 중점적으로 본다. 국제적 무한경쟁 시대에 상위권 대학 출신이 모두 우수한 사원이 아니라는 사실이 입증된 데 기인한다.

롯데백화점의 박완수 경영지원부문장은 “일 하는 머리와 공부하는 머리는 다르다”고 적시했다. 공부 잘 했다고 회사일도 잘 한다는 등식이 성립되지 않는다는 말이다. 조선조의 신분제도를 거쳐 일본 식민 시절 그리고 대한민국의 자유경쟁체제까지 병들게 했던 배타적 “학벌 의식”이 소멸되고 있다. 소위 “SKY(서울대·고려대·연세대)”를 나와야 하고 최소한도 “In Seoul(서울 시내에 위치한 대학) 이어야 한다는 허상(虛想)이 깨지고 있다.

대부분의 대기업들은 신입사원을 선발 할 때 초반 서류전형부터 최종 면접까지 지원자의 대학과 학점을 가리는 ‘블라인드(눈가림)’ 선발 방식을 택한다. 학벌을 떠나 관련된 전공과목과 직분에 대한 역량만을 살펴본다. 물론 인성도 중시한다.

학벌 파괴 바람은 학생들의 대학 선택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고교 졸업생들은 전엔 대학을 지원할 때 자기 적성보다는 SKY나 In Seoul의 경쟁력 낮은 학과를 찾아 지원했었다. 그러나 요즘 지원생들은 상위권의 허명(虛名)보다는 하위권의 실속 학과를 택한다. 지난 2월 과학고를 졸업한 유창현(19)씨는 수시 모집에서 서울대 조선해양공학과, 포스텍 기계공학과, KAIST 자유전공학부, 성균관대 반도체시스템공학과에 합격했다. 그는 취업에 유리한 반도체시스템공학의 성균관대로 결정했다. 학벌사회에서 능력사회로 변화되었음을 반영한다.

지방대를 선택하는 지원생도 부쩍 늘었다. 몇년 전 까지만 해도 지방대는 개밥에 도토리 신세였다. 어느 대기업의 한 과장은 지방대를 나온 부하 직원이 자신의 무리한 책망에 말대꾸하자, 대뜸 “어디서 지잡대 나온 XX가...”라며 동료들 앞에서 모욕을 주었다. “지잡대”는 지방대를 낮춰 부르는 말이다.

그러나 최근 지방대가 귀하신 몸이 되어가고 있다. 지방에 공장이나 사업장을 둔 기업들이 현지 지방대 출신을 선호한 덕분이다. 삼성전자의 경우 신입사원의 지방대 출신이 35%나 차지하고 있다. 대기업 임원도 지방대 출신이 현격히 증가했다. 포스코는 지방대 출신 임원이 44%나 된다. 지난해 지방 고교를 졸업한 김지원(19)씨는 서울의 동국대·건국대에 합격했다. 그러나 In Seoul 대학을 포기하고 취직율이 높은 충남 천안의 한국기술교육대에 등록했다.

대학의 교수 채용 행태도 바뀌어 가고 있다. 예전엔 대학들이 SKY 출신들을 선호했었다. 그러나 근년엔 지방대 출신이라도 연구업적 등 실력만 갖췄으면 SKY에서 모셔간다. 지난 9월 고려대는 아주대 화학공학과를 졸업하고 국내에서 학위를 받은 강윤찬 박사를 임용했다. IN Seoul 대학들의 금년 신규 교수 채용비율도 10년 전 보다 서울대 출신이 22.2%에서 14.4%로 줄었는가 하면, SKY 아닌 대학 출신은 29.8%에서 37.8%로 크게 늘었다.

상위권 대학 학생들이 고교 때 공부를 하위권 학생들보다 열심히 한 건 사실이다. 또는 시험 때 점수를 잘 받는 요령을 터득했거나 운도 따른 학생들도 있다. 그러나 고교시절 점수를 잘 받고 SKY에 진학했다고 해서 그가 사회생활에서도 우수하다는 보장은 없다. “일하는 머리와 공부하는 머리는” 다르기 때문이다. 중국 최고 부자이고 알리바바의 회장 마윈(馬雲)이 “지잡대”를 나왔고 그것도 3수해서 턱걸이로 합격했다는 데서 더욱 그렇다. 한국도 미국과 유럽 선진국처럼 학벌과 허명이 아니라 능력이 우대받는 사회로 간다. 진작 그러지 못했던게 아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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