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수학원 다니며 ‘중국 혁명’ 책 섭렵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처음으로, ‘나도 공부라는 걸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선생님들이 고등학교에 진학하기 위해서는 열심히 공부해야 한다고 강권한 때문이기도 했지만, 나름대로 ‘나도 공부를 해야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 날, 내가 다니던 중학교에서 가장 골짜기 동네인 남산 구비기에 사는 친구가, “우리 마을에 서울 법대에 다니는 사람이 있다"며 자랑했다. 나는 그 말을 듣고, ‘그 산골짝에서도 서울 법대에 가는 사람이 있다면, 나라고 못 갈 이유가 뭔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중에 알았지만, 그 친구가 말한 서울 법대생은 장기표 선생이었다. 장 선생은 그 때 시국사건으로 쫓기고 있었다.


중3 때 독재자 체험

나는 중학교 3학년 때 내 자신이 작은 독재자가 되는 체험을 했다. 당시 학생회장이 있었던 나는 ‘나 혼자 공부 잘하는 것보다, 다른 친구들도 열심히 공부시켜야 한다’는 일종의 사명감에 사로 잡혀 있었다.

학교에서는 내 공부를 팽개치고 다른 얘들을 감독하는 데 온 정열을 쏟았다. 쉬는 시간이나 자습시간에 공부하지 않고 방해하는 친구들을 혹독하게 매로 다스렸다. 여자 애들도 엄하게 다루었다. 나는 그때 그렇게 하는 것이 잘하는 것이라고 착각했다.

고등학교에 가서야 중학교 때 내가 실수한 것을 깨달았다. 나는 집에서는 혼자 정말 코피 터지게 공부했다. 시험을 치면 시골에서는 유례가 없는 높은 성적을 받았다. 사람들은 “천재가 나왔다"고 수군거렸다.

중학교를 마칠 즈음 박정희 대통령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시국이 어수선해 졌다. 나는 1980년, 읍내에 있는 밀양고등학교로 진학했다. 형님들은 모두 마산고로 유학을 갔었는데, 내가 고등학교 진학하던 시절에는 이미 뺑뺑이 (무시험) 지역이 되었기 때문에 나는 밀양에 남게 된 것이다.

고등학교 입학시험은 꽤 잘 본 것 같다. 중학교 1, 2학년 때 배운 내용에서 몇 개 틀리고, 중 3때 배운 내용은 거의 다 맞았던 것 같다. 나는 고등학교에서도 열심히 공부했다. 1학년 때는 집에서 10Km 쯤 되는 거리를 자전거로 통학했는데, 1학년 2학기에 드디어 전교 1등을 했다. 거의 전 과목에서 수를 받았다. 고등학교 1학년 때 담임선생님은 학년이 끝나갈 즈음에 “너 같은 아이가 잘 돼야 한다"며 격려해 주셨다.

그러나 나에게 고등학교 공부는 쉽지 않았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시절에 제대로 공부하지 않아 기초학력이 너무 부족했기 때문이다. 이 문제는 쉽게 극복되지 않았다. 특히, 수학과 영어가 문제였다. 국어와 국사 등 인문사회 과목은 재미도 있었고 성적도 좋았다.

다른 얘들은 고등학교 입학 전에 이미 성문정통영어다 성문기본영어다 하며 입시학원에도 다녔던 모양인데, 나는 도통 그런 게 있는지조차도 몰랐다.

과외라는 것은 더더욱 몰랐다. 남들이 다 다닌 유치원이란 곳이 있는 줄을 고등학교에 들어가서야 처음 알았다. 그렇다고 시골에서 별다른 도움 받을 곳도 없었다. 오로지 학교에서 지정해 준 독서실에서 죽으라고 공부해야 했다.

입시 준비만 하다 보니 고등학교 때는 별다른 추억거리가 없다. 고등학교 2학년 겨울방학 때에는 입시위주의 공부에 회의가 들어 방황하기도 했다. 그렇게 해서 1982년 치룬 학력고사에서는 썩 만족스런 점수를 받지 못했다. 서울대 사회학과에 원서를 냈다가 간발의 차이로 떨어졌다.

나는 고등학교 3학년 때, 형이 보던 고시잡지에서 고승덕이라는 사람이 쓴, ‘4년간의 휴가’라는 장문의 합격기를 감명 깊게 읽었다. 소위 고시 3과(사시, 행시, 외시)를 최연소, 차석, 수석으로 합격한 사람의 수기였다.

고승덕씨는 후에 박태준 회장의 사위가 되었다가, 김대중 정권 초기 국회의원 보궐선거에 출마하여 유명해진 인물이다. 얼마 전에는 증권 전문가로 변신하여 TV에도 자주 나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그 글을 가방에 넣어 다니며 공부하기 힘들 때마다 꺼내 읽곤 했다. 힘든 수험생활에 많은 위로를 받았
다.


고시 3관왕 고승덕과 만남

“마당"이란 잡지의 오효진 기자라는 분이 쓴, “고등학교는 시험선수 양성소인가?"라는 기사도 인상 깊게 읽었다. 이 분은 그 후 충청도 어느 지역에서 군수가 되었다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입시 위주의 교육에 넌더리를 내던 때였기에 그 글이 더욱 감명 깊었던 것 같다.

나는 성격이 좀 재미없는 사람이라 별명이란 게 없다. 아주 어릴 때에는 ‘역도산’이라고 불린 적이 있다. 어릴 때 원기소를 많이 먹은 덕택에 영양상태가 그런대로 괜찮아서 그랬는지, 우리 집 머슴이던 우씨 아저씨가 그렇게 별명을 붙여 주었다.

고등학교 때 독서실에서 같이 공부하던 친구들과 소크라테스의 죽음에 대해 얘기한 적이 있다. 대부분의 친구들은 “악법도 법이다"며 사약을 마신 소크라테스를 이해할 수 없다고 했다. 나는 그 때 소크라테스를 변호했다. 나는 "소신에 따라 죽을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위대한 일인가"라고 우겼다. 그 때부터 친구들은 나를 소크라테스라고 불렀다. 나는 그 별명이 마음에 들었다.

대학에 실패하고 나서, 나는 83년 부산 서면에 있는 재수학원에 등록했다. 그러나 마음속에는 이미 입시 위주의 공부에 대한 회의감만 가득했기 때문에 열심히 공부하지 못했다. 그 해 4월 어느 날, 헌책방 거리가 있는 보수동으로 놀러갔다가 두 권의 책을 샀다.

한 권은 장준하 선생의 자서전인 ‘돌베게’라는 책이었고, 다른 한 권은 중국의 문화혁명기의 어느 학생이 쓴 ‘홍위병’이라는 번역서였다. 이 두 권의 책을 읽고 나는 새로운 세계에 눈을 떴다.

돌베게를 읽고 나서는 항일 독립군에 대해 처음으로 알게 되었고, 홍위병을 읽고 나서는 중국에 문화대혁명이라는 소용돌이가 있었던 것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이 책들이 계기가 되어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혁명, 그 중에서도 특히 중국혁명에 빠지게 되었다.


중국어 인민일보 읽는 수준

나는 대학에 진학하자마자 중국과 관련된 책이라면 모두 구해다 읽었다. 당시에는 중국 관련 서적이 많지 않았다. 청계천을 돌아다니며 책을 구했다. 중국어도 꽤 열심히 공부했다. 인민일보를 읽을 수 있는 수준까지 되었다. 그러다 80년대 후반에 접어들면서 사회주의 관련 서적에 대한 판금이 풀리면서 중국 관련 책들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에드가 스노우가 쓴 중국의 붉은 별(The Red Star Over China)이나 님 웨일즈가 쓴 위대한 길(The Great Road) 등, 조금 과장하면, 활자가 채 마르기도 전에 사서 읽었다. 당시 스노우와 웨일즈는 부부사이였는데, 1930년대 말 국민당의 삼엄한 포위망을 뚫고 내륙 깊숙한 연안까지 들어가 중국의 혁명가들을 만나고 이 책들을 썼다고 한다.

님 웨일즈가 쓴 ‘아리랑’이란 책은 당시 연안에 있던 김산 - 본명은 장지락이라고 알려져 있음 - 이라는 한국 혁명가의 일대기인데, 80년대 대학가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던 책이다. 책을 읽고 나도 물론 ‘직업적 혁명가’에 대한 환상에 사로잡혔다.

<다음호에 계속>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