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 주변인으로서의 고민 시작

나는 ‘방황하며 시간을 보내느니, 차라리 군대라도 갔다 와야 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한국군에 들어가면 뭔가 사고를 칠 것만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카투사를 택했다. 1985년 말에 카투사 시험에 응시했다. 당시엔 ‘카시가 국가 5대 고시 중의 하나’라고 농담하던 시절이었다.

물론 시험은 어렵지 않았다. 입대를 기다리고 있던 1986년 4월, 김세진, 이재호 학우가 신림사거리에서 분신자살을 했다. 그들은 전방입소 교육을 반대하면서, “양키의 용병교육을 거부한다"며 몸에 불을 붙이고 투신한 것이다.

나는 내 자신이 미군의 용병이 되어 군대에 들어가는 것에 대해 심한


카투사 군복무 추억

자괴감을 느껴야만 했다. 1986년 5월 아카시아 꽃향내가 만발하던 때에 입대했다. 처음에는 판문점 공동경비구역(JSA, Joint Security Area)에 나 갈까도 생각했었다.

분단 상황을 직접 몸으로 체험해 보아야겠다고 느꼈다. 체격조건이 좋았기 때문에 훈련소 동기들은 내가 최일번으로 차출될 것이라고 농담하곤 했다.

아마 당시에 내가 그기에 갔더라면 어떤 형태로든 큰 사고를 쳤을 것 같다.

나는 카투사 훈련 중에 공동경비구역에 가겠다는 마음을 바꾸었다. 그 사이에 개인적인 일이 생겨 휴전선에 갈 수 없는 사정이 생
겼기 때문이었다.

훈련을 마치고 대구에 있는 미 8군 19지원사령부 법부감실로 배치 받았다. 그 부대 이름은 SJA(Staff Judge Advocate)였다. 공교롭게도 영어 스펠링이 바꾸어진 이름이었다. 나는 법무 행정병으로 군화에 흙 한번 묻히지 않고 30개월 9일간 복무했다.

나는 그 곳에서 미군의 사법집행 과정을 가까이서 지켜 볼 기회를 가졌다. 미군 당국의 사법제도는 생각보다 훨씬 민주적으로 운영되고 있었다. 대학에서 온간 반미적인 사고에 절어 살다가, 실제로 미국을 겪어보니 미국이 그리 나빠 보이지 않았다. 이때의 경험으로 ‘나도 언젠가 기회가 되면 미국 법과대학에서 공부해야 겠다’고 생각했다.

군대를 마치고 복학해 보니 모든 게 달라져 있었다. 같이 입학했던 동료들은 이미 졸업하고 없었다. 1987년 민주화 조치와, 1988년 올림픽을 거치면서 우리 사회 자체가 많이 달라져 있었다. 무엇보다 동구 공산권이 무너지면서 운동권의 분위기가 예전 같지 않았다. 모두가 방향을 잡지 못해 갈팡질팡했다.

나는 후배들 틈에 끼여 그럭저럭 공부해 나갔다. 나는 복학하고 나서도 한동안 방황했다. 시골에 계신 부모님은 내가 마음잡고 고시공부나 해서 판검사나 되기를 원하셨다. 나는 혼자 잘 먹고 잘 살기 위해 고시 공부하는 것을 경멸했다.

사법시험은 한 번도 응시조차 해보지 않았다. 사실 준비도 제대로 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운동권에 투신한 것도 아니었다. 나는 이것도 저것도 아닌 주변인이 되어가고 있었다. 졸업 후를 걱정해야 할 때가 다가왔다. 빵문제가 현실로 다가왔다.


졸업 후 다가온 진로걱정

‘무엇을 할 것인가?’는 이제 더 이상 책 제목에서 보던 게 아니었다. 나는 우선 비교적 쉽게 합격할 수 있을 것 같은 외무고시를 보았다. 외시 1차는 무난히 합격했지만, 2차는 준비 부족으로 중간에 나왔다. 공부를 더할 돈도 기력도 없었다.

(지난번 도청사건이 불거진 후 많은 언론들이 나를 고시병 환자로 묘사했다. 나로서는 기분이 과히 유쾌한 일이 아니었다. 내가 휴학과 복학을 거듭하며 9년씩이나 대학을 다닌 이유는 사법시험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복학 후 나에게 충격을 준 사건이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윤석양 이병의 보안사 파일 폭로 사건이고, 다른 하나는 사로맹 일망타진 사건이었다.

나는 1989년 복학하여 남궁호경 교수로부터 형법총론을 배웠는데, 이 괴짜 교수님은 형법은 강의하지 않고 국가보안법 얘기만 했다.

사실 국가보안법은 석사과정에서나 다루어야 할 과목이었다.

그 때 남궁 교수는 우리에게 두 권의 책을 읽도록 과제를 주었는데, 한 권은 ‘남영동 24시…’이고, 다른 한 권은 ‘보안사’라는 책이었다. ‘남영동…’은 김근태 씨가 경찰청 대공분실에서 고문당한 경험을 기록한 책이고, ‘보안사’는 김병진이라는 재일교포 청년이 보안사에서 근무한 경험을 기록한 책이다.

김병진은 신림동에서 간첩활동을 하다가 보안사에 체포된 후, 보안사에서 역용·자수한 간첩이 거꾸로 우리의 협조자로 활동하는 것-으로 일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일본으로 탈출하여 그 책을 썼다고 한다.


남영동 24시. 보안사…

나는 윤석양 이병이 폭로한 보안사 내부의 여러 일들이 ‘보안사’라는 책에서 본 것과 똑같은 데 놀랐다. 상관의 이름이라든가 내부의 분위기, 업무 행태와 구조가 ‘보안사’라는 책에서 보았던 내용과 똑 같았다. 나는 일 개 육군 이병이 정보기관뿐만 아니라, 온 나라를 발칵 뒤집어 놓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놀랐다.

이때부터 나는 ‘정보기관이란 데에 한 번 들어가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다’고 생각하게 됐다. 나는 내가 몸소 정보기관에 들어가, 우리나라가 어떻게 돌아가는지 내 눈으로 직접 확인해 보고 싶었다.

(윤석양 씨는 월간중앙 2004년 7, 8월 호에서 "아담의 곪은 사과"라는 자전적인 글을 발표한 바 있다. 윤석양 씨는 그 글에서 자신이 양심선언 전후에 겪었던 내면적 갈등을 담담하고도 생생하게 표현하고 있다.)

<다음 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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