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행 사후처리 미숙 지능범 아닌 듯”

경찰이 제작·배포한 허양 사건 용의자 수배전단

대구 초등생 허은정(11)양 납치사건이 좀처럼 해결될 기미를 보이지 않고 있다.

허양이 숨진 채 발견된 지 10일이 지났지만 경찰은 사건해결과 관련한 결정적인 단서를 찾지 못하고 있어 수사가 장기화될 것으로 보인다.

경찰은 지난달 12일 허양의 시신이 대구 달성군 유가면에 위치한 용박골 야산에서 발견된 이후 지금까지 광범위한 수사를 벌여오고 있으나 아무런 단서를 확보하지 못했다.

경찰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지자 경찰의 부실수사를 지적하는 목소리에 힘이 실리고 있다. 초동수사에 미흡했을 뿐 아니라 피해자 주변인들의 진술에만 의존하고 있다는 것이다.

경찰은 당초 허양의 주변 인물과 일대 우범자 등 용의선 상에 오른 60여명을 상대로 사건 당일 행적을 조사해 용의자를 10여명선으로 줄였지만 유력 용의자를 아직 특정하지 못하고 있다.

허양 납치살해사건의 난제는 범인이 허양을 왜 죽였나 하는 점이다. 또 사건 발생 당시 범인을 목격한 사람은 있지만, 목격자가 이를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경찰이 풀어야 숙제다.

경찰은 사건 발생시각 비명소리와 차량 소리를 들었다는 이웃 주민과 허양의 집 앞에서 수상한 사람을 봤다는 목격자들을 상대로 최면기법을 동원해 당시 정황과 용의자의 인상착의 등에 대해 물었다. 그 결과 뚜렷한 윤곽은 나오지 않았지만 범인의 키와 체격 그리고 대략적인 인상착의 등은 나왔다.


과학수사도 무용지물

경찰은 최면수사에서 드러난 범인의 인상착의를 몽타쥬로 제작해 허양의 할아버지(72)에게 보였다.

이를 본 할아버지는 “범인과 비슷하다. 범인을 실제로 다시 보면 알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한 것으로 전해졌다.

허양의 할아버지는 이번 사건에서 유일한 현장 목격자로 사건해결의 열쇠를 쥐고 있는 유일한 인물이다. 하지만 사건 당일 범인에게 심하게 폭행당한 할아버지는 당시의 정확한 상황을 기억하지 못해 경찰의 애를 태우고 있다.

경찰은 할아버지의 기억력을 되살리기 위해사건 당시 모습을 2차례 재연하고 3차례에 걸쳐 최면수사를 벌였다. 하지만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허양 사체가 발견되면서 기대를 모았던 과학수사도 맥을 못 추긴 마찬가지다. 사체의 부패정도가 심해 성폭행 여부를 제대로 확인하는 것조차 쉽지 않다.

경찰은 허양의 시신 발견 장소에서 수거한 머리카락, 체모, 허양의 옷과 손톱 등 각종 증거물과 용의선 상에 오른 이들로부터 채취한 구강세포 조직, 이들이 입었던 옷 등 지금까지 거의 200점에 가까운 시료를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보냈다.

그러나 증거물의 상태가 온전치 못해 분석에 시간이 오래 걸리는 데다 최악의 경우 아무런 단서를 찾지 못할 가능성도 배제 못하는 실정이다.

대구 달성경찰서 관계자는 “이번 사건은 다른 납치살해사건과 비교했을 때 지능적이지도 않고 범인이 특별한 목적을 품었던 것도 아니기 때문에 장기화될 이유가 없어 보이는 게 사실”이라며 “그러나 과학수사를 통해 얻어진 단서가 거의 없고 범인의 범행동기도 불분명해 수사가 쉽게 풀리지 않고 있다”고 말했다.

이어 이 관계자는 “국과수에서 용의자의 DNA가 추출되면 대조작업을 통해 범인을 특정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하지만 이마저 실패하면 수사는 장기화가 불가피하다”고 덧붙였다.

경찰은 범인에 대해 ▲피해자와 면식이 있고 ▲범행은 우발적이었으며 ▲혼자 사는 독신남에 저학력 저소득자일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경찰이 면식범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는 이유는 범인이 허양의 방을 먼저 들어간 게 아니라 할아버지를 먼저 폭행했다는 것 때문이다. 또 허양의 집에서 키우는 개가 범인 침입 시 짖지 않았다는 것도 이를 뒷받침 해주고 있다.


범인은 저학력의 저소득자?

경찰은 범인이 허양이 부모가 다른 지방으로 떠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침입한 것을 미뤄 허양의 집안 사정을 잘 아는 인물일 것으로 보고 있다. 범인이 할아버지를 폭행하고 있을 때도 허양은 도망치거나 소리치지 않고 이를 말렸다는 점도 허양과 면식이 있을 가능성을 높이고 있다.

범행이 우발적이었다는 추측에 대해 경찰은 허양 납치직후 범인이 금품 등을 피해자 부모에 요구하지 않은 점을 들고 있다. 아울러 범행 발생 시간이 새벽 4시라는 점도 우발적 범행이라는 추측을 가능케 한다.

범행이 계획적이었다면 허양이 가족들과 함께 있을 새벽시간을 택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그 예로 금품갈취가 목적이거나 성폭행을 목적으로 한 계획적 납치는 대부분 아이들의 하굣길이나 놀이터 등지에서 이뤄진다.

또 경찰은 범인이 독신에 저학력 저소득자일 것으로 보고 있다. 미성년자 납치살해의 원인은 크게 금품과 성욕해소 두 가지로 나눠진다. 따라서 범인이 금품 갈취 목적으로 허양을 납치한 게 아니라면 단순히 성욕해소를 위해 범행을 저질렀을 수도 있다.


최면수사 믿을 수 있나

범죄전문가들도 이번 사건은 저소득 저학력자의 범행일 가능성도 크다고 입을 모으고 있다.

경찰대학교 범죄심리학의 표창원 교수는 “끔찍한 살인사건중 성범죄와 연관 살인사건은 대부분 저학력이거나 저소득인 이들이 저지른다. 영화에선 똑똑한 사람들이 지능형 범죄를 저지르는 것으로 자주 나오지만 그런 일은 거의 드물다”며 “통계적으로 잔인한 범죄는 이성에 의한 통제력이 약한 이들 또는 욕구불만이 큰 저소득층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이 많다”고 말했다.

표 교수의 말대로 범인은 지능범이 아니다. 그의 사후 처리는 매우 허술했다. 피해자의 시신과 옷가지는 현장에 그대로 방치돼 있었다.

또 피해자의 집에서 2km 밖에 떨어지지 않은 야산을 범행 현장으로 택했다. 이를 고려하면 범인은 별로 치밀하지 못한 성격의 소유자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경찰 관계자는 “최면수사는 하나의 참고자료일 뿐이다. 경찰이 전적으로 신뢰하고 수사하는 것은 아니다”며 “최면은 그 효과에 대해 과학적으로 어느 정도 검증된 것이다. 때문에 단 0.1%라고 수사에 도움이 된다면 이를 완전히 무시할 수 없는 게 우리(경찰)의 입장이다”고 말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