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낚시질의 경지’ 기업형 보이스피싱 사기단 범행전모

전화금융사기(보이스피싱)등 국내 사기수법의 변천을 주도해온 ‘전설적인’ 기업형 사기단이 4개월여에 걸친 경찰의 끈질긴 추적 끝에 일망타진됐다.

충남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지난 3일 두목 이모(32)씨를 비롯한 4명을 구속했다. 이들은 2005년 처음 조직을 결성한 뒤 노숙자들의 명의를 빌려 대포통장과 휴대전화를 개통해 갖가지 사기행각에 이를 이용한 혐의다.

주목할 것은 이씨 등 일당들이 국내 보이스피싱 범죄를 가장 먼저 시도해 유행시킨 사기계의 ‘트랜드 세터’란 점이다. 사기 행각을 진두지휘하는 ‘총책’ 이씨를 필두로 ‘모집책’ ‘물색책’ ‘작업책’ 등 담당 부서까지 구분한 사기단은 3년 간 2천여명의 피해자들을 상대로 10억원 이상을 가로챘다. 이들은 사기 행각으로 벌어들인 막대한 수입으로 고급 외제차를 구입해 모는 등 호화 생활을 즐겨온 것으로 경찰 수사 결과 드러났다.

기막힌 ‘잔머리’로 국내 범죄 역사에 한 획을 그은 ‘사기 주식회사’의 범죄 일지를 들여다봤다.

이씨 등이 본격적인 사기행각에 나선 것은 2005년 초부터다. 국내에서 보이스피싱이 본격적으로 성행한 시점보다 무려 1년이나 앞선 것이다.


사기업계의 ‘한국판 오션스’

이 때문에 이들 조직이 최근까지 잇따르고 있는 전화사기 수법의 모태라 해도 과언이 아니라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이 업계에서 ‘전설’로 자리매김할 수 있었던 것은 철저한 역할 분담과 리더 이씨의 빛나는 지략 덕분이었다. 이씨는 인터넷 사용이 능숙하고 머리가 좋아 조직원들이 피해자들로부터 돈을 뜯어내기까지의 모든 과정을 총괄하는 ‘총책’역을 자처했다.

뿐만 아니라 노숙자를 모집해 그들 명의로 통장과 휴대폰을 개통하는 ‘모집책’과 인터넷이나 광고전단에서 피해자를 물색하는 ‘물색책’, 물색한 상대와 직접 전화 통화를 해 이들을 속이는 ‘작업책’ 등의 활약도 남달랐다.

먼저 모집책은 서울역, 수원역 등 주요 전철역이나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노숙자를 모아 그들 명의로 통장과 휴대전화를 만들었다. 명의를 빌려준 노숙자들은 통장 1개당 25만원씩을 손에 쥐었다. 경찰 조사 결과 모집책은 노숙자들이 돈만 챙기고 계좌를 해지하는 등 돌발 상황을 막기 위해 일정 기간 이들을 찜질방과 여관에 모아 합숙까지 시키며 관리한 것으로 드러났다.

모집책이 ‘낚시질’을 위해 터를 닦았다면 물색책은 불특정 다수의 목표물을 모아 ‘어장’을 관리하는 역할이었다. 부동산 관련 정보지나 인터넷 직거래 장터에서 목표물을 고른 물색책은 이들의 연락처 등 개인정보를 빼내 작업책에게 넘겼다.

피해자들과 1:1로 상대한 작업책은 뛰어난 화술을 무기로 적게는 50만원에서 많게는 수천만원을 뜯어낸 것으로 알려졌다.

이들은 또 경찰에 적발됐을 때는 ‘이 부장’이라는 가공의 인물을 내세워 법망을 피하기도 했다.

경찰에 따르면 일당 중 한명인 박모(42)씨는 대포통장을 사용한 혐의 등으로 36차례나 경찰에 붙잡혔지만 “나 역시 명의 도용을 당한 피해자다. 이 부장의 권유로 통장을 만들었고 그가 모든 것을 관리했다”는 진술을 해 수사관을 속였다.

박씨가 거짓 진술을 토대로 불기소 처분을 받는 등 처벌을 면했음은 물론이다.

충남경찰 관계자는 “총책을 필두로 조직원 4명이 완벽하게 손발을 맞춰 사기를 쳤다”며 “이들은 경찰에 덜미를 잡힐 것에 대비해 처벌을 피하는 방법을 미리 행동 지침으로 만들었을 정도로 철저했다”고 전했다.


‘시대 따라 유행 따라’ 수법 진화

2005년부터 전국구 사기단을 조직해 활동한 이씨 일당은 시대 흐름과 유행에 따라 새로운 수법을 연구해 범죄 성공률 70% 이상의 대기록을 세워 수사팀을 놀라게 했다.

전국적으로 부동산 거래가 왕성했던 2005~2006년에는 부동산을 판다는 광고를 낸 피해자에게 접근, “비싼 값에 사겠다는 사람이 있는데 ‘실거래가 확인서’가 필요하다”며 부동산 감정료 명목으로 수십~수백만원을 받아 빼돌렸다.

학생·주부를 중심으로 인터넷 장터를 통한 개인 거래가 유행했던 2006년에는 물품 구매사이트를 통해 이용자를 속여 물건 대금을 가로채는 수법을 썼다. 또 지난해 조선족들에 의한 관공서 사칭 사기에 힌트를 얻은 이들은 “검찰청 직원인데 해당 계좌가 사기 사건에 연루됐다”는 식의 공무원 사칭 낚시질로 피해자들을 울렸다.

이들에게 당했다는 피해자의 신고도 잇따랐다. 이씨 일당은 2006년 3월 회사원 강모(36)씨를 상대로 부동산 중계수수료 명목으로 500만원을 받아 가로챘다.

또 지난해 5월에는 주부 김모(45)씨에게 검찰청 직원을 사칭하는 전화를 걸어 현금지급기를 통해 220만원을 입금하게 하는 수법으로 모두 2천여명의 피해자들로부터 10억원이 넘는 돈을 받아 챙겼다.

이들은 보이스피싱 뿐 아니라 인터넷 대출 빙자 금융 사기에도 일가견을 보였다.

서민경제가 바닥을 친 지난해 말부터 일당은 생활정보지에 ‘저금리 고액대출’이라는 낚시 광고를 냈다. 이들은 대출을 원하는 이들로부터 수십만원의 대출수수료를 받아 챙긴 뒤 그대로 잠적했다.

이들의 교활한 수법은 끝이 없었다. 경찰의 수사망이 자신들을 향해 좁아지고 있다는 것을 눈치 채자 이씨 등은 노숙자 명의의 대포통장과 휴대전화를 개당 70~80만원에 판매하는 쪽으로 사업 유형을 아예 바꾸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경찰의 끈질긴 저인망식 수사를 영원히 따돌리는 것은 무리였다. 관련 첩보를 입수한 경찰은 2005년부터 최근까지 전국에서 발생한 각종 보이스피싱 사기사건 100여건을 정밀 분석했다. 그 결과 사건마다 공통점이 있는 노숙자들이 있다는 사실이 포착된 것.

문제의 노숙자를 중심으로 4개월 간 집요한 추적과 잠복수사를 반복한 끝에 경찰은 이들과 직접 접촉한 모집책과 물색책을 차례로 검거했다.

이들의 진술을 받아 마침내 지난 3일 총책 이씨가 붙잡혔고 기업형 사기단의 전모가 세상에 드러나게 된 것이다.

경찰은 이씨 일당 외에도 비슷한 사기 수법을 구사하는 또 다른 범죄조직이 있을 것으로 보고 수사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있다.

경찰 관계자는 “신고 접수된 피해 사례를 분석하는 중 이씨 일당과 비슷하지만 확인되지 않은 사건이 적지 않았다”며 “이들 말고도 비슷한 범죄를 저지르는 조직이 또 있다는 판단아래 검거 작전을 계속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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