컷-‘탈영의 덫’, 17년 인생유전

“대한민국 남자라면 모두 한 번씩 겪는 군 생활을 못 견뎌 20년 가까운 세월 동안 도망자의 낙인을 품고 살았습니다. 이제는 홀가분합니다.”

이등병 시절 선임병의 괴롭힘을 참지 못하고 군에서 도망쳐 무려 17년 동안 도피 생활을 해온 불혹의 탈영병이 뒤늦게 붙잡혀 세간의 이목이 집중됐다.

1991년 복무 중이던 경기도 구리시에 주둔한 모 육군 사단을 이탈, 탈영병의 멍에를 쓴 차모(38)씨가 이 기막힌 사연의 주인공이다. 차씨는 길에서 주운 남의 주민등록증으로 신분을 감춘 채 살다 지난달 29일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오랜 도피 생활을 마감했다. 사실상 공소시효가 없는 오랜 범죄자의 굴레가 벗겨지는 순간, 차씨는 수사관들 앞에서 뜨거운 눈물을 흘리며 지난 과거를 후회한 것으로 전해졌다.

지난 1991년 경기도 구리시의 한 육군부대에서 이등병으로 복무하던 차씨는 평범한 21살 청년이었다. 그러나 고참의 구타와 욕설을 참지 못한 그는 같은 해 10월 휴가를 나와 복귀하지 않았고 탈영이라는 인생의 덫에 걸려 들게 됐다. 그 후 ‘탈영병’이라는 딱지를 붙인 차씨는 말 그대로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는 대전에 사는 부모와 형제 등 가족들과 졸지에 생이별 했다. 탈영 후 체포될 것이 두려워 전화는커녕 가족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도망자 신세에 월급조차 떼여”

차씨는 경찰 조사에서 “12년 전 설날 즈음 딱 한번 부모님이 살고 계신 동네 주변을 서성인 적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집에 들어가지 못한 채 발걸음을 돌린 차씨. 가족 생각에 마음이 약해진 것보다 무거운 죄 값을 치르는데 겁을 먹은 까닭이다.

졸지에 돌아갈 곳을 잃자 생활은 엉망이 됐다. 서울과 경기도, 부산 등지의 만화방과 목욕탕을 떠도는 도피생활이 시작된 것이다. 머지않아 주머니에 있던 돈도 바닥을 드러냈고 차씨는 생계를 위해 일거리를 찾아야했다.

하지만 이마저도 쉽지 않았다. 가명으로 신분을 위장한 탓에 변변한 직장을 구하는 것은 하늘의 별따기보다 어려웠다. 별수 없이 공사현장 잡부와 술집 종업원을 전전해야 했던 차씨. 신분이 확실하지 않다는 약점을 악용한 몇몇 업주들은 그를 실컷 부려먹기만 하고 월급조차 떼어먹기 일쑤였다.

운이 좋으면 한 달에 100여만원씩 월급을 받았지만 신분증이 없는탓에 은행 계좌를 만들 수 없었다. 또 불안감을 이기려 술을 마시다보니 착실히 돈을 모으는 것은 불가능했다. 인생의 황금기를 허송세월로 흘려보낸 것이다.

경찰에 따르면 차씨는 헌병대의 추적을 피하기 위해 늦은 밤에 일할 수 있는 직장을 골라 아침까지 일하고 낮 동안은 숙소에서 잠만 자는 은둔생활을 해왔다. 늘 쫓기는 신세인지라 밖에 나가는 일 자체가 두려워 지나가는 사람과 눈을 맞추는 것도 겁이 났던 것이다.

차씨는 경찰 조사에서 “멀쩡히 길을 가다 경찰서가 나오거나 경찰관, 군인들이 눈에 띄면 멀찌감치 돌아서 갈 정도로 죄책감에 시달렸다”고 말했다.

그러는 사이 주민등록이 말소되는 등 차씨의 흔적은 세상에서 하나, 둘 지워지기 시작했다. 탈영 초 ‘주민증도 없는 XX’ 라는 업주들의 비아냥에 시달리던 그는 결국 10년 전, 길거리에서 주운 다른 사람의 종이 주민등록증에 자신의 사진을 붙여 지금까지 자신의 신분증으로 써왔다. 지난 10년 동안 생판
모르는 이의 이름으로 살아야만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00년 주민등록증이 지금의 플라스틱 형태로 바뀌자 이마저도 여의치 않았다. 플라스틱 주민증으로 모두 교체된 최근까지 종이 주민증을 내미는 그는 주위에서 의심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그러던 중 차씨는 지난 5월 말 또 다른 범죄를 저지르게 됐다. 두 달여간 일했던 가요주점의 열쇠를 훔쳐 몰래 가게에 들어가 320여만원의 수표와 현금을 집어 들고 나온 것. 가게 사장이 월급을 떼어먹은 것에 대한 앙갚음이었다.

차씨는 그 길로 가게를 나와 다시 도피 생활을 시작했지만 이번만큼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게를 턴지 꼭 한 달 뒤인 지난달 29일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린 것이다.

그날 오후 6시경 부산 부전동 부전도서관 앞을 지나던 차씨는 한 여름에 겨울 점퍼를 입는 등 부자연스러운 행색을 눈여겨보던 경찰에 의해 현장에서 체포됐다. 미심쩍은 종이 주민증과 그의 품안에서 도난 신고가 접수된 수표뭉치가 나온 것이 결정적이었다.

차씨를 검거한 부산진경찰서는 지난 1일 그를 헌병대로 이첩했고 헌병대는 곧바로 군 이탈 및 명령 위반 혐의 등으로 구속했다. 차씨는 수사관들에게 ‘죄 값을 치를 기회를 줘 고맙다’며 고개를 숙인 것으로 알려졌다.


밤에 일하고 낮엔 은둔 생활

경찰 관계자는 “(차씨가)17년 동안 마음 졸이며 사느라 청춘을 다 잃은 것에 대해 후회의 눈물을 흘렸다”고 전했다. 수사팀에 따르면 차씨는 ‘이렇게 붙잡히고 나니 차라리 홀가분하다’며 처벌을 받은 뒤 가족들 품으로 돌아가 자유롭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뿐만 아니라 17년 동안 이사도 하지 않고 홀로 자식을 기다려온 차씨의 아버지(78)는 아들이 절도 혐의로 체포됐다는 소식을 듣고도 ‘살아있다는 사실만으로 여한이 없다’며 크게 기뻐한 것으로 알려졌다.

한편 탈영은 공소시효가 7년으로 명시돼 있다. 그러나 각 군 참모총장이 2년마다 모든 탈영병에 대해 자진 복귀 명령을 내린다.

때문에 공소시효가 지난 뒤라 해도 체포되면 ‘명령 불복종죄’로 무조건 처벌을 받게 돼 사실상 공소시효가 무의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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