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게나마 당시 훈육관에 ‘죄송한 인사’

1993년 1월 10일 오후 나는 안기부 산하 정보학교에 입교했다. 한 겨울이었다. 정보학교는 이문동 본청사 내에 있었다. 당시엔 안기부 청사가 두 군데로 나뉘어져 있었는데, 해외 분야를 담당하던 본청사는 이문동에 있었고, 국내 분야를 담당하던 부서들은 남산에 있었다.


이문동 청사의 추억

이문동 청사는 천장산 북쪽 사면을 끼고, 조선조 경종의 능인 의릉 주위에 위치해 있었다. 일설에 의하면, 창설 초기에 김형욱 부장이 헬기를 타고 직접 물색한 장소라고 한다.

의릉 밑에는 양지못이라고 불리는 조그만 인공 연못이 있었다. 왕능 아래 못을 팠다고 해서 이씨 종친으로부터 많은 항의를 받았다고 한다.

양지못에는 서슬 퍼런 시절에 생겨난, 코미디 같은 전설이 하나 전해 내려왔는데, “정보기관이 한창 잘 나갔던 중정 시절에는 양지못 붕어아비(금붕어를 관리하는 직원)가 고향에 내려가면 군수가 직접 영접을 나왔다"고 한다.

입사 전에도 인성검사다 뭐다 하며 본청사를 몇 차례 드나들긴 했지만, 막상 정식 요원이 되어 들어가니 기분이 묘했다. 청사 내에 줄지어 서 있던, 곧게 뻗은 소나무가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입사 첫날, 우리는 양지관이라는 기숙사에 입소했다. 방은 2인 1실로 배정받았다. 양지관은 사각형 모양의 건물이었는데 건물 중간에 조그만 정원이 조성되어 있었다.

양지관뿐만 아니라 이문동 청사 건물은 대개 그런 구조로 되어 있었다. 들리는 말에 의하면, 폭격을 맞을 경우에 대비하여 건물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해 그런 식의 구조로 지었다고 했다. 양지관은 우리 기수가 처음으로 입주한 건물이었다.

첫 입주자이다 보니, 우리 기수는 청소와 관리에 무척 많은 신경을 써야 했다. 양지관은 겉으로는 번지르하게 듯 보였으나, 사실은 부실투성이 건축물이었다. 몇 년 지나 다시 가보니, 건물 외벽이 떨어져 나가고 칠이 벗겨져 금새 흉물로 변해 있었다.

당시에도 엄 모 기조실장이 건축과정에서 많이 해먹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1년간 우리의 교육을 전담할 훈육관이란 분이 우리를 지휘 통제했다.

그는 정규 20기 선배였다. 훈육관은 교육생들과 긴밀히 교감할 수 있어야 하고, 정보기관 이란 곳에 대해서도 어느 정도 이해해야 하기 때문에 입사 10년 차의 직원 중에서 선발되었다. 하지만 지난 노무현 정권 때부터 이런 전통이 깨졌다고 한다.

요즘은 12-3년 차 선배 기수에서 훈육관이 선발되는 모양이다. 훈육관은 나름대로 의미가 있는 자리다. 매년 선발할 때가 되면 어느 정도 경쟁 분위기가 형성된다. 대개는 해당 년도 동기회가 선거를 통해 품성이 괜찮은 동기를 그 해의 훈육관으로 추천한다.

훈육관은 보통 한 명이지만, 요즘처럼 입사 인원이 늘어나면 두 명이 되는 경우도 있다. 우리 때에는 여자 동기들을 담당하는 여 훈육관이 한 명 있었다.

그녀는 28기 졸업생이었다. 우리 훈육관은 첫인상이 별로였다. 생김새며 목소리가 영 호감이 가지 않는 스타일이었다.

훈육관이 첫인상과는 달리 다정다감하고 세심한 사람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훈육관은 우리들에게 “너희들은 03 정부의 출범과 함께 입사한 정규 30기다"라고 말했다. 우리 기수의 입사를 김영삼 정권의 출범과 연관 지어 의미를 부여하려는 듯 했다.

훈육관은 어렵고 힘든 자리이다. 교육기간 동안에는 교육생들과 같이 지내야 하기 때문에 처음 몇 달간은 집에도 들어가지도 못한다. 100여명의 인원들을 지휘 통솔하는 일이 간단치 않은 데다 조그만 문제가 생겨도 직접 일일이 나서서 해결해야 하기 때문에 무척 고달프다.

해당 기수에서 무슨 문제가 생기면 당장 훈육관의 훈육 책임부터 따진다.

나처럼 이렇게 좀 큰 사고(?)를 치면 더더욱 훈육책임을 묻게 된다. 사실 나는 교육기간 중이나 국정원 생활 중에 훈육관으로부터 과분한 관심과 애정을 받은 편이다.

나는 미국에 건너오고 나서도 아직까지 훈육관에게 변변히 전화조차 못했다. 미안한 마음 때문이었다. 이 지면을 통해서나마 죄송한 마음을 전하고 싶다.

정규과정이란 국정원이 매년 정기적으로 실시하는 1년간의 교육과정을 말한다. 정규과정은 국정원의 기간요원을 양성하는 과정이다.

정규과정 출신들은 은연중에 국정원의 기간요원이란 자부심을 갖게 된다.


정규과정과 기본과정

정규과정은 매년 수천 명의 지원자들 가운데 엄격한 서류심사와 시험을 통해 공개 선발된 자원들이다. 1년간의 합숙 훈련을 통해 강한 동질감과 연대의식을 가지게 된다. 선후배 정서도 무척 강하다.

국정원의 일반 공채 직원 가운데 정규과정 출신이 아닌 직원들은, 비정규 또는 기본과정이라고 부른다. 기본과정이라고 해서 인사상의 불이익이나 차별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본과정 출신들은 막연하나마 피해의식 같은 것을 가지고 있다. 이는 부질없는 편견이다.

실제로 최근 몇 년간 국정원의 고위 간부를 지낸 인사들을 살펴보면, 김만복 원장을 포함해 대다수가 기본과정 출신이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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