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황은 오동나무 가지에만 앉는다”

나는 본래 별로 좋은 교육생이 아니었다. 성적은 나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나는 개인적으로 대학입시 학력고사를 치른 후에 다시는 성적을 가지고 남들과 경쟁하지 않겠다고 생각했었다. 내가 잘 할 수 있더라도 양보하고 싶었다.

다른 동기들은 시험공부를 위해 밤늦게까지 공부하곤 했지만 나는 느긋했다. 다들 시험 성적에 신경 쓰느라 더러 커닝 비슷한 행동을 하기도 했지만, 나는 백지를 낼지언정 부정행위를 하지 않겠다고 호기를 부렸다. 나는 커닝하는 친구들에게 “봉황은 오동나무 가지가 아니면 앉지 않고, 죽실이 아니면 먹지 않는다"며 고고한(?) 척 객기를 부렸다.

시험은 대개 주관식으로 출제되었는데, 나는 그야말로 ‘주관적인’ 답안을 냈다. 그런데 믿기지 않게도 간혹 교수님들 중에서는 틀에 박힌 모범 답안보다 나의 ‘독창성’이 듬뿍 반영된 답안지를 더 좋아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회와 언론을 가르쳤던 박 모 교수님이 특히 나의 반골 기질을 높이 사 주셨다. 과목 가운데 영어 성적은 그런 대로 괜찮았지만, 새로 배우는 과목들은 성가시기만 했다. 일본어는 아예 열등생으로 분류되어 특별 관리대상이 되었고, 가끔 교수님께 불려가서 혼나곤 했다. 나는 거의 모든 수업 시간에 노상 졸았다.


성적으로 남들과 경쟁 않겠다

정보학을 가르치는 모 교수님은 “우리 동기 중에서도 수업시간에 제일 많이 졸던 동기생이 있었는데, 그가 가장 먼저 부서장을 지내고 벌써 퇴사했다"고 말하면서 나의 졸음에 용기를 불어 넣어 줬다. 교수님들은 우리가 육체적으로 힘들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어지간히 요령껏 졸더라도 너그러이 이해해 주는 분위기였다.

학교에서는 면학 분위기와 경쟁 분위기를 고취시키기 위해 성적 상위자 20명을 뽑아 2주간 미국 여행을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그렇지만 이러한 조치도 나에게는 아무런 동기부여가 되질 않았다. 나는 아마 성적 하위자 20위권에 들었을 것이다. 우리 반은 교실 내에서 자리를 번갈아 바꿔가며 앉았다. 여러 친구들과 사귈 수 있도록 훈육관이 배려한 덕택이었다.

한 번은 X충민이와 짝이 되었는데, 그는 여러모로 재미있는 친구였다. 그는 어느 외국 제약회사의 영업사원을 하다 입사했다는데 다방면에 경험이 많고 인생에 대한 이해가 깊었다. 생각이 트여 있고 순발력과 기지를 갖추고 있는 데다 무엇보다 유머가 있어 좋았다.

그 녀석과 이런저런 농담을 하던 중 문득 앞으로 어떤 유형의 직원이 되는 게 바람직한 것인가에 대해 얘기가 나왔다. 그는 벗겨도 벗겨도 속이 안 보이는 양파와 같은 공작관이 되겠다고 말했다. 나는 어떤 상황에도 다 적응할 수 있도록 마음속을 몇 조각으로 나눠 운용하는 마늘과 같은 정보관이 되겠다고 말했다.

그리하여 우리는 성적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고, 이름 하여 각자 “양파허심법"과 “마늘분심법"을 연마하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그는 다년간의 성공적인 허심법을 단련한 덕분에 지금쯤은 훌륭한 공작관으로 성장해 있을 것이라고 믿는다. 나는 분심법을 연마하던 도중에 노벨상이라는 고비에서 주화입마에 걸린 꼴이 되고 말았지만.

전반기 교육 과정의 하이라이트는 공수와 해양훈련이었다. 공수훈련은 경기도 용인에 있는 특전사 훈련장에서 3주간 실시했다. 공수훈련은 모래사장에서 받을 것이라 기대했는데, 훈련장에 도착해 보니 그저 산골짜기를 적당히 정리한 곳이었다.

우리는 일반 훈련병들 틈에 끼여 함께 훈련을 받았다. 처음 2 주간은 기본동작과 모조시설(막타워)에서 뛰어 내리는 훈련을 받았다. 쉴새없이 뛰고 구르는 동작이 반복되었다.

막타워는 지상 10미터 쯤 되는 모조시설이었다. 인간이 가장 공포감을 갖는 거리가 지상 10미터 정도라고 한다. 나는 평소 약간의 고소공포증이 있다고 느꼈는데, 그래서 그런지 막타워에서 뛰어내릴 때 도통 자세가 나오지 않았다.

두 손으로는 예비 낙하산을 착 감싸 쥐고, 다리를 곧게 펴서 몸을 V자 모양으로 만들면서 양 발로 동시에 착지해야 했는데, 나는 그게 잘 안 됐다. 아마 뛰어 내릴 때마다 몸이 오그라들고 눈을 감는 것 같았다. 여자 동기들 중에서도 잘 하는 친구들이 있었는데, 나는 유감스럽게도(?)“영 아니올시다"였다.

자세가 잘 나오는 친구들은 먼저 마치고 쉬는데 나는 항상 맨 나중까지 남았다. 우리가 훈련 받고 있는 와중에 모 방송사의 무슨 드라마 제작팀이 와서 공수 장면을 촬영하고 돌아갔는데, 최수종 씨가 막타워를 멋있게 뛰어내렸다고 했다. 그가 생긴 것 하고 다르게 ‘강단 있는 사람’인 걸 알게 됐다.

공수훈련 중에 한 번은 우리 동기들과 학사장교 출신 훈련병들 간에 집단 패싸움이 벌어졌다. 우리는 서로 잘 아는 집단인데 비해 그들은 전국 각지에서 모인 오합지졸이었다. 우리가 일방적으로 그들을 두들겨 팼다. 우리들의 과격한 행동을 본 나이 어린 하사관 후보병들은 우리들을 대북 침투요원인 줄로 알고 저희들끼리 수군거렸다.


학사장교들과 패싸움 전말

그런데 문제는 패싸움 후에 발생했다. 구타를 당한 장교들이 “사병들 앞에서 집단으로 구타를 당해 장교로서의 품위가 손상되었다"며 “훈련을 거부하겠다"고 나왔다. 훈련장 안에서 벌어진 일이라 바깥으로 소문이 날 리는 없었지만 알려지면 좋을 게 없었다.

그 전 해에는 공수교육을 받던 안기부 훈련생들이 외출 중에 음주사고를 일으킨 것이 언론에 보도돼 말썽이 된 적 있었다. 이번에도 훈육관이 나섰다. 마침 훈육관이 학사장교 출신인지라 장교들을 달래는 데 유리했다.

훈육관은 패싸움을 주도한 동기들을 불러내 공개적으로 기합을 줬다. 몽둥이가 부러져 나가는 등의 약간의 전시효과가 있었다. 훈육관이 이런 식으로나마 성의(?)를 보이자, 학사장교들도 더 이상 문제가 확대되는 걸 원치 않았다. 다행이었다.

공수훈련은 처음 2주간 기본훈련 기간이 힘들었고, 마지막 주 실전 낙하 때는 오히려 편했다. 나는 체력에 별 문제가 없었으나, 다른 동기들은 매우 힘들어 하는 것 같았다. 특히 여자 동기들은 불쌍하게 보였다. 그런데 육체적으로 힘들었던 것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으나 문제는 다른 데서 발생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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