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직원 “공수·해양 지옥훈련 고생한 게 아까워 회사 그만둘 수 없다”

공수훈련은 다수의 부상자 속출이라는 엄청난 후유증을 남겼다.

본래 계획대로라면 네 차례 점프를 하기로 되어 있었다. 기구점프 1회, 헬기점프 1회, 그리고 야간과 주간 비행기 점프 2회였다. 기상 악화로 인해 기구점프는 몇 명만 실행하고 중도에 포기했다. 헬기점프는 그런대로 무사히 넘어 갔다. 그런데 야간 비행기 점프 때 운이 좋지 못했다. 불행히도 바람이 심하게 부는 밤이었다.


동기 중 평생 불구자도

나는 낙하 대열의 중간쯤에 있었기 때문에 중앙 십자로 근처의 안전지대에 착지했지만, 동기들 중에서는 바람에 밀려 멀리 날아가 버린 친구도 있었다. 어떤 동기는 바위에 부딪혔고 일부는 나무에 걸렸다.

다음 날, 주간 낙하 시에도 불운이 이어졌다. 두 번의 낙하 훈련에서 부상자가 열 댓 명이나 나왔다. 단순히 발목을 삔 정도는 아예 부상 축에도 끼지 못했다. 대부분 다리뼈가 부러져 나갔다. 그나마 다행히도 평생 불구가 된 동기는 없었다.

그 전 해에 교육받은 선배 중에는 심하지는 않았지만 평생 불구가 된 경우도 있었다. 내 친구 준영이는 사고를 당할까 봐 발톱도 깍지 않았다고 했는데, 그가 가장 크게 다쳤다. 그는 큰 수술을 받은 후에 여러 달 동안 기브스를 한 채 살아야 했다.

훈련을 마치고 학교에 돌아오니 강 모 교무과장이 “이렇게 사고가 많이 난 전례가 없었다"며 우리를 심하게 나무랐다. 그는 마치 우리들이 군기가 빠져서 사고가 많이 난 것처럼 믿고 있었다.

다친 학생들을 위로해도 시원치 않을 텐데 책임회피에만 급급한 모습이었다. 그는 그 후 김대중 정권에서 국정원의 인사를 담당하는 XX관리국장이 됐다고 한다.

공수훈련을 마치고 돌아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해양훈련을 떠났다. 해양훈련은 인천 월미도 부근에 있는 모 UDT부대에서 몇 주간 실시됐다. 해양훈련도 여러 가지 즐거운 추억이 남는 시간이었다.

나는 수영에 자신이 있었기 때문에 훈련 받는 데 별다른 문제가 없었다. 나를 포함해 수영을 잘하는 몇몇 동기들은 따로 수중폭파 (스쿠버) 훈련도 맛보기로 약간 배웠다.

낮에는 진흙 밭을 기고, 밤에는 하수도 구멍을 통과하는 훈련이 이어졌다. 고무보트를 머리에 이고 행군하고 노를 저어 상륙하는 훈련도 받았다. 모두들 육체적으로는 고생이 많았다.

이번에도 여자 동기들이 많이 힘들어 했다. 후에 그들은 교육을 마치고 실무 부서에서 배치되고 나서 “공수와 해양훈련 때 고생한 게 아까워 회사를 그만둘 수 없다"고 말할 정도였다.

전반기 교육을 마칠 즈음에 강남에 있는 향군회관에서 위로 파티가 열렸다. 나는 여기서 일생일대의 커다란 실수를 하고 말았다.

이 사람 저 사람에게서 독주를 넙죽넙죽 받아 마시다 완전히 맛이 간 것이었다.

마신 것과 먹은 것을 다 토해내고 횡설수설 해댔다고 한다. 양지관으로 돌아온 후에도 깨어나지 못했다. 훈육관이 단단히 화가 났다. 나 하나 때문에 전 동기들이 한밤중에 운동장에 집합하여 운동장을 수십 바퀴나 돌았다. 나는 인사불성이 되어 뛸 수도 없었기 때문에 동기들이 돌아가면서 들쳐 업고 뛰
었다.

다음 날 술에서 깨어나 보니, 모두들 지난 밤 나를 업고 뛰었던 무용담을 들려주었다. 쥐구멍이라도 찾고 싶은 심정이었다.

얘기가 나온 김에 교육과정 중에 있었던 실수한 얘기를 좀 더 소개하겠다. 첫 번째 실수는 전반기 교육이 시작되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일어났다.

식당에서 밥을 먹는 도중 미처 재채기를 참지 못했다. 가까스로 입을 틀어막았지만, 때는 이미 늦은 후였다. 일부 손가락 사이를 미끄러져 나간 밥알이 테이블에 원 바운드하고는 급기야 마주보고 앉아 밥을 먹던 여자 동기의 식반 안으로 골인해 버렸다. 난감한 상황이었다.

그런데 고맙게도 그 여자 동기는 현명하게(?) 사태 수습에 협조해 줬다. 그녀는 키도 작고 입도 작고 나이도 작고 모두 다 작았는데 마음 하나만은 넓고 깊었다. 그녀는 훈련을 마치고 같은 동기와 결혼했는데, 아마도 회사 생활과 결혼 생활을 다 잘 하고 있을 것이다.

두 번째 실수는 전반기 교육이 끝날 즈음에 일어났다. 수업을 마치고 쉬는 시간에 단체로 테니스를 배웠다. 그런데 코트 수에 비해 사람 수가 너무 많았다. 한 코트에 여럿이 들어가서 테니스를 쳤다.

나는 혼자서 서비스 연습을 했는데 어깨에는 힘이 너무 많이 들어간 탓이었던지 내가 친 공이 상대 코트에 있는 여자 동기의 얼굴을 강타하고 말았다.

그녀는 공수훈련 때 막타워 자세가 가장 훌륭하게 나왔던 여걸(?)이었는데, 내 공을 맞고는 짚단 넘어지듯 그 자리에 퍽 쓰러져 버렸다. 그녀를 급히 가까운 경희대 병원으로 실어 갔다. 불행하게도 눈에 정통으로 맞았다고 했다.

나는 그녀가 실명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걱정이 많이 됐다. 병원비는 나와 동기회가 반분해 부담했다. 정식으로 사고를 보고하게 되면 골치 아픈 일이 생기기 때문에 사적으로 처리한 것이었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녀는 몇 주간 입원 후에 무사히 퇴원했다.


국내정보반 배속

동기들은 “네가 결혼만 안했으면 책임져야 하는 건데…"라며 놀려 댔다. 결국 그녀도 병원에 자주 면회를 갔던 어느 동기생과 결혼하게 됐다. 후반기 교육은 출퇴근 교육이었다. 전반기에 비해 훨씬 여유가 있었다. 반도 재조정됐다. 각자 보직하게 될 업무 위주로 소규모 반으로 새로 짜여졌다. 국내정보반, 해외정보반, 북한정보반, 공작반, 수사반, 심리전반, 통신반 등 각각 세부 전문 직렬별로 나누어졌다.

나는 국내정보반에 배속됐다. 전반기 교육을 마칠 즈음에 훈육관과 진로 상담이 있었는데 나는 “국내정보 쪽으로 가고 싶다"고 말해 놓은 터였다. 우리 반은 모두 15명이었다.

후반기 교육은 주로 현장실습 위주의 교육이었다. 예를 들면, 면담유출 기법을 실습하기 위해 아무런 연고가 없는 인사를 접촉하여 특정한 정보를 알아내 오는 과제가 부여되기도 했다.

그 밖에 미행 감시하는 요령이라든가, 공작원을 접촉하는 방법, 공작망을 구성하고 유지하는 방법, 카메라나 녹음기 등 채증 장비를 사용하는 요령 같은 것을 실습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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