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리핀 유학 보냈더니 한국서 강도짓

경찰과 법원의 어이없는 판단 실수로 선량한 두 가정이 파탄 지경에 이르렀다. 남의 자동차를 훔치다 경찰에 붙잡힌 전과자들이 ‘재범우려가 없다’는 이유로 자유의 몸이 된 게 비극의 시작이었다. 석방된 지 불과 이틀 만에 또 다시 범죄를 저지른 범인들. 이들의 파렴치한 범행 탓에 죄 없는 여고생 자매는 성추행 악몽에 시달리게 됐으며 17살 남학생은 왼손 약지 손가락을 잃었다. 지난 6일 서울 양천경찰서는 특수절도 혐의로 불구속 입건된 상태에서 또 다시 강도짓을 일삼은 것도 모자라 미성년자를 성추행하고 손가락까지 자른 김모(21)씨와 이모(22)씨를 긴급체포했다. 필리핀 유학생 출신으로 현지 대학 선후배로 만난 이들은 “유흥비를 벌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고 말했다. 무려 15시간 이상 피해자들을 위협해 공포에 떨게 했을 만큼 집요한 범행 수법과는 어울리지 않게 단순한 이유다. 더욱 심각한 것은 전과가 도합 13범에 달하는 상습범을 사회로 되돌려 보낸 경찰과 법원의 안일한 태도다.

수사당국의 어처구니없는 판단 착오로 희생자가 늘어난 탓에 ‘고의로 이들을 봐준 게 아니냐’는 의혹의 눈초리가 쏟아지고 있다.

특수절도 등의 혐의로 각각 전과 6범과 7범인 김씨와 이씨는 지난 6월 2일 서울 영등포 인근에서 남의 자동차를 훔치다 발각돼 경찰에 붙잡혔다.

그럼에도 이들은 도망갈 염려가 없고 재범 가능성이 낮다는 이유로 불구속 입건 돼 곧 유치장을 나올 수 있었다.

이것은 경찰과 법원의 돌이킬 수 없는 실수였다. 2인조는 자유의 몸이 된 지 불과 이틀 만에 다시 범죄행각을 이어간 것이다.

현재 경찰은 석방된 두 사람이 특수절도와 강도, 성추행 등을 포함해 최소한 9차례에 달하는 추가 범행을 저질렀을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반항한다’ 식칼로 손가락 절단

수사당국이 일찌감치 범죄의 싹을 거두지 못한 탓에 적어도 9명 이상의 희생자가 더 나왔다는 얘기다.

경찰에 따르면 두 사람은 지난 6월 6일 새벽 4시 30분쯤 서울 목동의 한 빌라에 침입했다.

단잠에 빠져있던 집주인 최모(41·여)씨와 최씨의 두 아들을 흉기로 위협한 2인조는 3200만원의 거금을 빼앗았다.

이 과정에서 두 사람은 최씨의 큰 아들인 박모(17·고2)군이 격렬히 저항하자 부엌에 있던 식칼로 박군의 왼손 약지를 자르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처럼 상대로 잔인한 짓을 서슴지 않았던 2인조. 하지만 이들은 피해자에게 돈을 빼앗는 과정에서 어처구니없는 실수를 범하기도 했다.

최씨로부터 빼앗은 현금카드로 인출을 시도했지만 한도제한으로 200만원 밖에 출금할 수 없자 2인조는 그 자리에서 대포통장을 구입하는데 합의했다.

곧장 인터넷을 통해 반나절 만에 대포통장계좌를 손에 넣은 범인들은 최씨를 협박해 3000만원을 이 계좌로 이체하도록 했다.

그러나 2인조는 치명적인 실수를 저지르고 말았다. 대포통장을 넘긴 판매상으로부터 계좌번호만 받았을 뿐 비밀번호를 몰랐던 것.

이들이 우왕좌왕하는 사이 판매상은 입금된 돈 가운데 2000만원을 가로채 유유히 사라졌다. 범죄자가 또 다른 범죄자의 먹잇감으로 전락한 황당한 일이 벌어진 것이다.

이 같은 소동을 해결하느라 범인들은 무려 15시간 동안이나 최씨 집에 머물며 피해자들을 감금했다. 이런 가운데 중상을 입은 박군은 기본적인 응급조치조차 받지 못한 채 방치될 수밖에 없었다. 박군의 손가락은 봉합수술이 가능한 치료시기를 놓치는 바람에 영영 회복불능 상태에 빠진 것으로 알려졌다.

파렴치한 이들의 범죄행각은 그 후에도 이어졌다. 최씨 가족을 상대로 강도짓을 저지른 지 약 1주일 만인 지난 6월 14일 새벽. 이번에는 김씨 혼자 사냥에 나선 것이 다른 점이었다. 가스배관을 타고 서울 양천구 신정동에 있는 한 빌라 2층에 침입한 김씨는 집주인 강모(48·여)씨를 위협해 현금 8만원과 신용카드를 빼앗았다.


‘왜 풀려났나’ 의혹 증폭

뿐만 아니라 김씨는 각각 중학생, 고등학생인 강씨의 두 딸을 상대로 성추행까지 저질렀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김씨의 추악한 만행이 모두 피해자의 어머니가 지켜보는 앞에서 벌어졌다는 점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들은 석방된 뒤 검거되기 직전까지 적어도 9차례에 걸쳐 피해자들로부터 5000여만원에 이르는 금품을 빼앗았다. 1주일에 한 번 꼴로 새로운 범행을 저지른 셈이다. 강력한 구속사유인 재범우려가 현실이 된 이들에게 경찰과 법원은 어째서 면죄부를 준걸까.

경찰 관계자에 따르면 이들이 처음 붙잡혔을 때 주동자로 지목된 김씨에 대해서만 구속영장이 신청됐다. 함께 붙잡힌 이씨는 범행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지 않아 불구속 했다는 게 경찰의 설명이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김씨의 구속영장 역시 법원에서 기각됐다. 당시 병원에서 입원치료 중이던 김씨가 도주할 우려가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경찰과 법원이 재범가능성에 대한 고려를 했는지 조차 의심되는 대목이다.

그러나 이 같은 비극이 벌어진데 대해 경찰과 법원은 서로 책임을 떠넘기고만 있다.

경찰 관계자는 “동종 전과가 여러 번 있음에도 법원이 불구속 처분을 내리는 바람에 추가 피해가 생겼다”며 “법원이 ‘재범 위험성’을 좀더 고려했어야 했다”고 말했다. 반면 법원은 경찰이 말도 안되는 변명을 하고 있다며 성을 내고 있다.

당시 영장실질심사를 담당했던 서울남부지법 측은 “경찰이 재범 가능성에 대한 소명자료를 제출하지 않은데다 전과가 더 많았던 이씨를 불구속 처리한 경찰이 이제 와서 법원을 비난 하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다”고 해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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