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분증 ‘까지’않고 상황 수습하는 게 ‘능력’

교수님들은 진지하게 가르치기를 원했지만, 피교육생들은 그저 느슨하게 임했다. 나는 후반기에도 그리 열심히 공부하지 않았다.

전반기 때와 마찬가지로 공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고 그저 동기들과 술 먹고 놀며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후반기에는 산업시찰이나 판문점과 땅굴 견학 등 여러 가지 명목으로 자주 여행을 다녔다. 마침 그 해에 대전에서 과학엑스포가 열렸기 때문에 대전에서 며칠간 숙박하면서 엑스포를 관람하기도 했다. 당시의 관행으로는 정규과정 학생들이 지방에 내려가면 지부 요원들이 아주 융숭하게 신경을 써 주었다. 전국 각지를 다녀보니 각 지방마다 음식문화가 많이 달랐다.


지부요원에 융숭한 대접

전주에 내려갔을 때 먹었던 비빔밥은 오래 기억에 남는다. 비빔밥 자체가 맛있기도 했지만 밥상 위의 그 푸짐함이 인상적이었다. 광양제철소를 들르는 길에서 남원에서인가도 그럴듯한 한식을 먹을 수 있었다. 그런데 마산에 들렀을 때는 그 지방 특산의 최고급 해물탕을 대접받았는데 맛이 영 별로였다. 경상도 음식은 그저 맵고 짜기만 했다. 내가 경상도 출신이었지만, 경상도 음식이 그렇게 형편없는 줄 그 때 처음 알았다.

1년간의 교육을 마치고 우리들은 정식으로 신분증을 지급받았다.

신분증은 사진과 부적부번호가 적혀 있고 각자의 고유의 전자칩이 내장되어 있다. 부적부번호란 국정원 직원 개개인의 고유번호다.

나는 xxx444란 부적부번호를 부여 받았다. 내 앞에 국정원을 거쳐 간 선배들이 수만명이 넘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국정원 직원의 신분증은 단순히 직원의 신분을 표시하는 것에 거치는 것이 아니라, 전자 출입증 구실을 하기도 한다. 국정원 직원들이 청사를 출입할 경우 신분증이 열쇠 구실을 한다. 청사 내에서는 직원들의 동선이 완벽하게 모니터링 되는 것이다. 누가 지각을 했는지, 누가 어디를 출입했는지, 누가 야근을 했는지 등의 일들이 자동으로 모니터링 된다.

따라서 외부인이 국정원 직원의 신분증을 입수하게 되면 무단으로 국정원 청사에 접근할 수 있는 것이다. 게다가 요즘엔 외부인이 신분증을 도용하여 직원을 사칭하는 범죄가 심심치 않게 일어난다. 그래서 국정원 직원들은 자신의 신분증 관리에 노이로제가 걸릴 정도로 아주 철저하다.

신분증 분실은 중요한 처벌대상이다. 최하 부서장 경고감이다. 부서장 경고라도 받으면 제때 진급하는 데 상당한 애로가 생긴다.

그래서 대부분의 직원들은 신분증을 아예 와이셔츠의 호주머니 속에 핀으로 고정시켜 다닌다.

국정원 직원인지 아닌지 감별하려면 와이셔츠의 위 호주머니를 보면 된다. 호주머니 속에 딱딱한 신분증을 숨기고 있으면 국정원 직원이라고 보면 틀림없다.


국정원 직원 사칭 범죄 급증

이렇게 중요한 신분증이다 보니 신분증에 관한 에피소드들이 많다. 국정원 직원들은 소위 ‘신분증을 까는’ 상황을 극도로 창피스런 일로 여긴다. 그래서 평소에 신분증을 까지 않고 상황을 수습하는 능력(?)을 길러 두는 게 중요한 일이다.

선배들 말에 의하면 옛날 한창 잘 나가던 시절에는 신호 위반에 걸리더라도 “야 비켜! 바빠!” 정도로 가볍게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요즘이야 사정이 어디 그런가?

옛날에는, “포가 포를 잡아먹는 경우도 있냐?” 정도로 얘기하면, 적당히 알아서 요해가 되었던 모양인데, 요즘은 “같은 정부미 먹는 사람”이라고 더 번거롭게 자신을 소개해도 잘 안 먹힐 때가 많아 졌다.

<다음호부터는 3.문민정부의 ‘넘버3’가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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