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거되면 휘발유 뒤집어쓸 사람들 줄줄이 나오죠”


인천의 유일한 성매매 특구인 남구 숭의동 특정구역(일명 ‘옐로하우스’)이 50여년의 역사를 뒤로 하고 사라질 전망이다. 인천시는 지난 13일 도시건축공동위원회를 열어 인천 남구 숭의1동 360번지 일대 ‘집창촌 상업지구 개발’을 사실상 확정했다.

성매매 특별법 제정 이후 ‘도시개발’ 명목으로 전국의 집창촌은 쇠락의 길을 면치 못하고 있다. 인천시는 지난해 학익동 성매매 특정구역(속칭 ‘끽동’)을 철거한 지 1년 만에 옐로하우스를 다음 ‘타깃’으로 삼았다.

경기 불황으로 매출이 뚝 떨어진데다 안마시술소, 대딸방 등 ‘3차 업소’에 손님을 줄줄이 빼앗긴 옐로하우스는 최근 철거 압력까지 더해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이젠 할 말조차 잃었다’며 체념에 빠진 옐로하우스의 오늘을 들여다봤다.

목요일 저녁 8시경 동인천역에서 택시를 타고 목적지를 말하자 40대 중반의 택시기사는 익숙하게 핸들을 움직인다. “거기 가달라는 손님은 오랜만에 태워보네.” 인천에서 택시운전만 13년째라는 그는 손님들 목적지만 들어도 요즘의 불경기를 몸으로 느낀다며 너스레를 떨었다.

“IMF 터지기 전만해도 새벽 1~2시쯤 그쪽(옐로하우스)에 터 잡고 있으면 수입이 꽤 짭짤했지. 서울이나 수원에서 온 장거리 손님도 많았고. 그런데 요즘은 안 그래요. 경기도 안 좋은데다 그 뭐야, 성매매 특별법인가 그거 되고 나서부턴 1년에 2~3번 가는 것도 힘들어요. 얼마 전에 뉴스 보니까 또 거기 없앤다고 하데. 인천에서 제일 싸기도 하고 오래된 곳인데 아쉽지 뭐.”

택시로 15분여를 달리자 여관 마크가 찍힌 간판이 즐비한 골목이 눈에 들어온다. 아파트 단지가 훤히 보이는 삼거리 6차선 도로 한편에 또 다른 세상이 펼쳐져 있는 것이다.

‘청소년 출입금지구역’. 자줏빛 바탕에 큼지막한 하얀 글씨가 박힌 표지판이 바로 옐로하우스의 간판이다.

저녁 8시 20분. 가로등이 어슴푸레 비추는 골목 양쪽으로 영업 시작을 알리는 홍등이 드문드문 들어오기 시작한다. 업소들은 나름의 이름이 따로 없다. 대로에서 골목으로 들어가는 순서대로 여관 마크(♨)아래 1호, 2호 식으로 숫자를 붙였을 뿐이다. ‘주차장·욕실 완비’라는 문구는 선택사양이다.


“옐로하우스 가주세요”

진홍색 조명이 켜진 차창 앞에 플라스틱 의자를 놓고 앉은 중년 여인(현관이모)들이 저들끼리 하루 인사를 나눈다. 안내를 부탁한 업주 대표를 만나기 전 골목 안으로 혼자 들어가 봤다. 카메라 가방을 둘러맨 외부인, 특히 여기자를 보는 그들 눈빛에 순간 경계의 빛이 스친다.

투명한 유리창 너머는 온통 붉은색. 그 아래 화려한 ‘홀복’을 차려 입은 이들은 머리나 화장을 손보는데 여념 없다. 모두 기자와 비슷한 또래의 20대 여성들이다.

해가 완전히 넘어간 시각, 옐로하우스의 하루가 시작됐다. 하지만 두 집 걸러 한 집 꼴로 보이는 불 꺼진 가게들은 이곳의 명성이 쇠락하고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골목 한 바퀴를 천천히 다 돌고 난 뒤 이곳 업주를 대표하는 상인회의 오인석 총무를 만났다. 가벼운 운동화에 반바지 차림으로 기자를 맞은 오 총무. 그의 도움을 받아 본격적으로 업소들을 둘러볼 수 있었다. 제한적이지만 사진촬영도 가능했다.

“요즘 여기저기에서 많이들 찾아오시네요. 여기 없어진다는 뉴스 때문인가. 얼마 전에도 사진작가 몇 명이 와서 찍어갔죠. 역사적으로 의미 있는 곳이라고.”

한창 영업 준비에 바쁜 시간이었지만 기자는 오 총무로부터 옐로하우스에서만 수십 년 이상을 보냈다는 터줏대감 A씨를 소개받았다. 부인과 함께 이곳에 세를 얻어 영업을 시작한 지 20여년. A씨는 모두 7명의 아가씨를 고용한 업주다. 아직 단장이 덜 끝났는지 아가씨들 대기실은 텅 비어있다.

“다른 집들은 벌써 나왔지? 우리 애들이 좀 게을러서. 그래도 몇 년씩 동고동락한 애들이라 밉진 않아요.” A씨의 목소리에는 여유가 묻어나지만 최근 장사실적을 묻자 ‘딱 죽을 맛’이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성매매 특별법 이후 수년 째 집창촌이 직격탄을 맞은 데다 안마시술소, 휴게텔 등 ‘3차 업종’이 손님들을 싹쓸이 한 탓이다.

“여기 업소가 40개 가까이 됐는데 지난 1년 사이에만 10개 넘게 문 닫고 나갔어요. 뭐 장사가 돼야 유지를 하지. 봐서 알겠지만 썰렁하잖아. 저 뒤쪽 골목엔 문 연 가게보다 닫은 곳이 더 많으니까.”


“남을 사람만 남았죠”

A씨 말을 빌리자면 지금 옐로하우스엔 그야말로 ‘남을 사람만 남았다’. 더 나은 곳으로 가고 싶어도 형편이 녹록치 않은 이들만 남아 영업을 계속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 최근 시가 확정한 재개발 계획은 치명타다.

“뭐 건물 있고 땅 있는 사람들이 무슨 걱정 있겠어. 보상 받고 분양권 받아 나가면 그만이지. 우리처럼 건물 빌려서 장사하는 영세 업주들이랑 아가씨들만 피 보는 거 아니겠어요? 물론 제일 불쌍한 건 여기서나마 밀려나는 아가씨들이고.”

2004년 성매매 특별법이 제정된 뒤 가장 큰 화두로 떠오른 것이 성매매 여성들의 생계문제였다. 당장 일터를 잃은 여성들이 생존권을 주장하며 공개 시위까지 벌일 만큼 당시 상황은 급박했다.

최근 인천시의 결정으로 같은 일이 다시 반복되는 것은 아닐까.

“그 일 겪고 나서 애들도 내성이 생겼어. 겉으로 드러나는 집창촌만 경찰들이 들쑤시고 다니니까 숨어서 영업하는 요령도 생긴 거지. 원래 집창촌 출신 아가씨들은 웬만해선 다른 곳(안마시술소·방석집 등)으로는 잘 안가요. 배우고 익힌 기술이 업소마다 다 다르거든. 그래서 그런지 요즘은 해외로들 많이 뜨더라고. 안마방이니 뭐니 갔다가 괜히 몸만 다쳐서 돌아오는 경우도 있고. 벌어먹고 살려니 외국 남자라도 상대해야지 별수 있나.”

그나마 A씨를 비롯한 영세 업주들과 아가씨들이 믿는 구석은 하루아침에 옐로하우스가 철거되지는 않을 것이란 짐작이다.

“저기 학익동 알죠? 작년에 없어진. 거기는 철거얘기 나온 지 20년 만에 헐렸어요. 여기도 그렇게 쉽게 부시진 못할 거야.” 옆에서 잠자코 있던 A씨 부인이 건넨 한마디다.

인천시는 오는 2010년, 적어도 2012년에는 옐로하우스 부지에 25~30층 규모 아파트 886가구와 오피스텔 등을 짓는 공사를 시작하겠다고 공언했다. 하지만 정작 옐로하우스 사람들은 실현되기 쉽지 않을 것이라 믿고 있다. 일부 언론 보도와 달리 보상을 위한 입주자들의 조합 결성이 조금도 진전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옐로하우스가 숭의1동 4통이고 저기 안쪽에 가정집들 모인 곳이 3통입니다. 공사가 시작되려면 입주자들이 조합을 만들어 보상 계획을 짜야하는데 그것 자체가 쉽지 않아요. 여기 업소도 한 30군데 되는데다 3통은 가구 수가 훨씬 많거든요. 그 많은 사람들 다 찾아다니면서 주민동의 받고 조합위원장 뽑는 게 보통일 아니잖아요. 거기다 저쪽에서 위원장 자리를 요구하면 이쪽과 부딪칠 일이 많을 테고. 몇 년 안에 해결될 문제가 아니죠.”

역시 아가씨 다섯을 둔 업주인 오 총무의 설명이다. 하지만 그 역시 이를 장담할 수는 없다. 시가 언제든 단속을 이유로 강제 철거라는 카드를 빼들 수 있기 때문이다. ‘철거’ ‘재개발’이라는 말 앞에 짐짓 여유로울 수만은 없는 이유다.


“쫓겨나면 밀입국 할 수밖에…”

“사실 여기 없애기 시작하면 몸에 휘발유 끼얹고 자살할 사람들 줄줄이 나올 겁니다. 업주들은 그렇다 치고 아가씨들이 문제죠.

여성단체들은 번듯한 직장 잡아준다고 아가씨들 보고 일 그만두라고 하죠? 그 말에 홀려서 나갔던 애들 열에 아홉은 도로 들어와요. 나가도 할 게 없더라는 거예요. 지금 남은 아가씨들은 다 알아요. 여기가 자기들이 있을 마지막 곳이라는 걸.”

최근 감사원은 성매매집결지 자활지원 사업에 대해 감사를 실시하기로 결정했다. 성매매 여성들의 자활을 지원하는 일부 민간단체들이 정부로부터 받은 사업비를 원래 목적과 다른 용도로 쓴 의혹이 제기됐기 때문이다. 이런 사실이 알려지자 아가씨들 사이에서도 시민단체에 대한 불신이 쌓이고 있다는 게 오 총무의 설명이다.

“이젠 정부고 시민단체고, 누구에게도 호소하거나 기댈 생각이 없습니다. 아무리 떠들어도 누가 우리 말 들어주기나 합니까.”

4년여에 걸친 정부 차원의 대대적인 성매매 단속. 하지만 실제 성매매 수요와 공급이 줄었냐고 묻는다면 대답은 시원찮다. “시궁창 틀어막아봐야 썩은 물은 넘치기 마련”이라는 한 업주의 말은 옐로하우스를 떠나오는 순간까지 뇌리에 강하게 박혔다.



# 옐로하우스는?

‘옐로하우스’의 유래는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의 뿌리는 인천 중구 선화동 신흥시장 일대에서 구한말 기생들이 운영하던 속칭 ‘방석집’이다. 이들이 숭의동으로 옮겨오게 된 것은 1961년 5·16 군사정변이 일어난 뒤다. 당시 박정희 정권은 이들을 인천에서 가장 외진 곳 중 하나였던 숭의동으로 강제 이주 시켰고 이곳에 집창촌이 형성된 것이다.

‘옐로하우스’라는 이름은 당시 판잣집으로 지어진 업소들을 모두 노란색 페인트로 칠했기 때문에 붙었다. 이들 건물을 노랗게 칠한 것은 다른 지역과 구분하기 위해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