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산’ 대공정책실 신문과 전격 차출
공포와 전율의 대명사 ‘남산’
당시 남산에는 국내 정보부서 뿐 아니라 대공수사와 외사방첩 부서, 그리고 감찰실 등 안기부의 핵심부서가 모두 모여 있었다. 나는 그 중에서 국내정보 수집부서인 대공정책실로 발령이 났다.
우선 대공정책실이라는 명칭부터 좀 설명하는 게 좋겠다. 대체로 국정원의 여러 부서의 명칭은 그 부서의 실제 업무 성격과 거리가 있다. 굳이 ‘위장명칭’이라고까지 말할 수는 없겠지만, 정확한 명칭은 아니다.
대공정책실은 명칭대로라면 간첩을 잡기 위해 정책을 세운다거나 간첩을 잡기 위한 정보를 수집하는 곳이어야 제격이겠는데, 실제로는 국내 정치정보를 수집하는 부서였다. 중앙정보부 시절에는 서울분실이라고도 불렸던 모양이다. 수도 서울에서 벌어지는 모든 정보를 수집하는 부서라는 뜻이었을 것이다. 대공정책실은 남산의 다른 부서와는 조금 떨어져 소월길을 올라가다 왼편으로 리라초등학교 바로 아래에 있었다.
대공정책실 청사는 아마도 예전에 국토통일원으로 쓰인 건물이었던지 그 때까지도 국토통일원이란 현판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현판 글씨는 박정희 대통령의 친필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힘차게 잘 써진 붓글씨였다.
나는 동기 한 명과 함께 대공정책실 신문과에 배치되었다. 국내정보반에서 함께 교육 받았던 나머지 13명은 모두 국내정보 분석부서인 기획판단국으로 발령받았다. 나중에 듣기로는 “신문과의 이 모 기획관이 정보학교까지 직접 찾아와 우리 둘을 선발했다"고 한다. 이런 일은 흔히 있는 일은 아니었다.
당시는 80년대 말부터 진행된 민주화 분위기에 편승하여 언론의 영향력이 점차 커지고 있던 시기였다. 정보기관이 예전처럼 언론을 ‘조질’ 수도 없었고 협조를 받아 내기도 점차 힘들어 지던 시절이었다. 다른 말로 하면 언론여건이 날로 열악해지고 있던 시기였다. 그래서 학벌이라도 받쳐주는 직원을 언론 수집관으로 차출하려다 보니 우리 둘이 불려오게 된 것이었다.
나는 서울법대 출신이었고 같이 간 동기는 경기고와 고려대 출신이었다. 이 기획관에 의해 나는 신문과에 발령 받기 전부터 조선일보 담당관으로 이미 내정되어 있었던 셈이다. 후에 이 기획관은 나에게, “조선일보는 서울법대 출신이 아니고서는 접근이 안 된다"고 말했다.
아마 당시의 조선일보 편집국에 유독 서울법대 출신이 많아서 그렇게 말한 게 아닌가 싶다. 이 기획관은 80년대부터 오랜 동안 조선일보 담당관을 지낸 탓에 조선일보라면 우리나라에서 제일 정통한 사람이었다.
신문과에 배치 받아 인사 갔을 때 과 선배들은 “언론고시나 쳐서 조선일보에나 들어갈 것이지 여긴 뭐 하러 들어 왔냐?"며 농담으로 핀잔을 줬다. 나는 “아무렴 일국의 정보기관이 일 개 신문사보다야 못할 리가 있겠습니까?"라며 웃으면서 받아 넘겼다. 처음 일주일은 적응(오리엔테이션) 기간으로 각 과를 돌며 인사를 했다. 나는 하루에 한 과씩 순례하면서 대정실 요원들의 안면을 익혔다. 첫 날 정치과를 방문하니 강 모 선배가 육중한 몸매에 어울리지 않게 특별한 방식으로(?) 애정을 표시해 줬다.
그는 우리들에게 ‘앉았다, 섰다’를 시키는가 하면, 우리의 코를 잡아당기기도 했다. 그는 마치 새로 전입해 온 신병들이 너무 귀여워 죽겠다는 듯 했다. 자존심이 상했지만 참았다.
허드렛일 하는 행정관의 추억
다음날 학원과에서는 한양대를 담당하시던 조 모 선생님 등으로부터 따뜻한 대접을 받았다. 특히 입사 1년 선배인 금XX 선배가 우리를 살갑게 대해 주었다. 사회과에서는 조 모, 김 모 등 젊은 직원들이 우리를 서울역 시위 현장으로 데리고 나가 현장실습을 시켜주었다.
종교과에서는 먼저 입사해 일하고 있던 고등학교 후배를 만났다.
나는 이렇게 대정실 전체 10여 개 과를 돌았다. 나는 평소 안기부 수집관이라면 굉장한 사람들일 거라는 선입관이 있었는데 막상 만나 보니 별다른 특별한 점이 없었다. 모두가 그저 평범한 공무원들처럼 보였다. 어찌 생각해 보면 조금은 의외이고 실망스럽기까지 했다.
정보기관이란 곳을 너무 과대평가할 필요도 너무 과소평가할 필요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행색에서 촌티가 가시지 않았던 탓인지 사람들은 나를 고려대 출신으로, 같이 갔던 다른 동기를 서울대 출신으로 착각하곤 했다.
나는 신문과 기획반에 배속되었다. 기획반은 팀장인 기획관을 중심으로 2-3명의 기획반원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기획반은 과의 컨트롤 타워 같은 것으로 행정과 기획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었다. 기획반은 수집관들로부터 각자 일일 수집계획를 파악하기도 하고, 상부에 보고할 보고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기획반의 가장 말단 직원은 행정관이라고 불리는데 행정관은 과의 모든 행정업무를 처리하는 직원이었다. 행정관은 자질구레한 행정사항을 모두 챙겨야 할 뿐만 아니라 경우에 따라서는 과장의 개인 비서 노릇도 해야 했기 때문에 고달픈 직책이었다.
청운의 뜻을 품고 정보기관에 들어와서 1년 간 고된 훈련을 마치고 막상 실무에 투입되었는데 고작 허드렛일이나 하고 있으면 한숨이 절로 난다. 그래서 각 과의 행정관들은 하루 일과를 마치는 저녁나절이면 삼삼오오 모여서 담배 한 대를 나눠 피면서 서로의 애환을 나누곤 한다.
신문과장은 이 모씨였는데, 그는 덩치에 비해 좀 좀스런 데가 있었다. 그는 행정관을 혹사하는 스타일이었다.
전임 행정관인 윤 모 선배는 “과장의 집 전기료를 대납해주러 은행 심부름을 가기도 했고, 심지어는 과장 딸의 교과서도 대신 타다 주기도 했다"며 툴툴거렸다. 그는 행정관을 빨리 벗어나고 싶어서였던지 우리를 무척 반기는 듯 했다. 나는 신문과에 빠르게 적응했다. 다른 신입사원들처럼 열심히 일하고 겸손히 배우려고 노력했다. 매일 일찍 출근하여 사무실 걸레질부터 했다. 당시까지도 대정실 청사 사무실 바닥은 대걸레로 청소해야 했다. 선배들과도 그런대로 잘 어울렸다. 선배라고 해봐야 비슷한 또래였다. 나의 직속상관이었던 이 모 기획관은 성격이 매우 꼼꼼하고 까탈스러운 분이었는데 웬일인지 나에게는 특별히 잘해 주었다.
<다음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