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과 미국을 비롯한 21개국 국가 수뇌들이 참석한 22차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정상회의가 지난 달 중순 중국 베이징에서 열렸다. 이 회의는 아시아태평양 국가 정상들이 모여 역내 무역투자 자유화, 경제기술 교류, 반테러 협력 등을 협의했다. APEC 정상회의는 1993년부터 매년 회원국들이 돌아가면서 주최해왔다. 우리나라는 이미 2006년 부산에서 13차 정상회의를 열었다.

그런데도 중국 공산당 기관지들은 APEC회의 정상들이 중국에 조공(朝貢)을 바치러 온 것처럼 썼다. 중국 공산당 기관지 인민일보의 인터넷판인 인민망은 11월12일 APEC 정상들의 만찬을 소개하면서 ‘많은 사람들이 만방래조(萬邦來朝:)를 느꼈다.’고 했다. 그밖에도 중국 관영매체 환구시보는 같은 날 ‘과거 동아시아에는 중국을 중심으로 한 조공 체제가 있었다. 만방래조는 중국 역사상 가장 휘황찬란했던 시기였다. 과거 조공체제는 동아시아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다.’고 주장했다. 지난 날의 만방래조 체제 재현이 필요하다는 논지였다.

만방래조와 조공은 변방의 속국들이 중국에 찾아와 귀한 물건을 바친다는 뜻이다. 인민망은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의 APEC회의 주재 모습을 보며 그 옛날 속국 제후(諸候)들이 중국 황제에게 머리를 조아리는 만방래조를 떠올렸음을 짐작케 한다.

중국은 고대시대부터 자국의 황제를 하늘의 아들 천자(天子)라고 지칭했다. 주변국들은 야만 미개족이고 중국 천자에게 조공을 바쳐야 하는 속국으로 여겼다. 중국은 주변국들이 조공해야 하며 중국과 접촉함으로써 중국의 우월한 문화권으로 편입되는 혜택을 입는다고 했다. 중국인에게는 오랜 세월 중화사상(中華思想)이 배어 있다. 중화사상은 한족(漢族)만이 우수한 문화를 지녔고 그밖의 민족은 미개하다는 ‘한족중심세계관’에 연원한다.

조공사절은 중국 황제를 면접할 때 속국 신하로서 항복 또는 복종을 의미하는 카우타우(고두:叩頭)의 예를 갖춰야 했다. 카우타우는 외국사절이 높은 옥좌에 앉아 있는 중국 황제 발 아래 넙죽 엎드려 머리를 바닥에 조아리는 의식이다. 외국 사절은 중국 관리의 구령에 따라 카우타우를 세 번씩 반복했다. “무릎 꿇어!” “꿇어 엎드려!”의 모욕적인 구령에 따라야 했다.

1636년 조선조의 인조는 청(淸)나라의 병자호란 내침으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가 삼전도(三田渡:서울 송파)에 나가 청태종에게 항복의 카우타우 예를 갖춰야 했다. 일화에 의하면, 인조는 반복된 카우타우로 이마가 피투성이었다고 한다. 그 보다 43년 앞선 1593년 임진왜란 때 조선조에 출병한 명(明)나라 군대는 명군의 명령을 어긴 조선조 장군을 잡아다가 곤장을 치기도 했다. 명나라 군대에게 조선조 장군은 하찮은 동이(東夷:동쪽 오랑캐)에 불과했다.

21세기 중국 공산당 관영매체들이 APEC 정상들의 베이징 회의를 만방래조로 표현한데는 저와 같은 한족중심세계관이 아직도 면면히 흐르고 있음을 반영한다. 중국이 천하의 중심이고 주변국들은 중국을 우러러 받들어야 한다는 중화사상에 기인한다.

중국은 세계 2대 경제대국으로 성장하더니 어느새 오만방자해져 지난날 만방래조 시대가 다시 오기를 기대하는 모양이다. 중국 국가주석에게 베이징을 찾는 사절들이 카우타우해야 하는 국제구조를 바라지 않나 싶다.

만약 중국이 경제·군사적으로 미국 처럼 세계를 지배하는 국가로 우뚝 선다면 얼마나 오만방자하고 세도를 부릴지 상상하고도 남는다. 중국 국가주석은 천자이고 타국 정상들은 카우타우해야 할 제후 정도로 하대(下待) 하지 않을까 염려된다. 그래서 주변 국가들은 중국이 경제·군사적으로 커가는 것을 두려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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