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죽여 달라” vs “이대로 죽을 순 없다”

전 프로야구 선수 이호성에 살해된 마포 4모녀의 영정. 이호성의 자살로 살인의 정확한동기는 영원히 뭍히고 말았다.(위) · 살인마 정상진에 의해 무려 6명이 살해된 논현동 D고시원. 이곳에서 기거하던 정상진은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른 뒤 연기에 놀라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무차별적으로 칼을 휘둘렀다.

올 한해 대한민국을 공포에 몰아넣은 희대의 살인마들의 연말은 어떤 모습일까. 어느 때보다 잔혹한 사건·사고들이 꼬리를 문 2008년, 법정 최고형에 처해질 것이 확실시 되는 이들의 극과 극 행보에 관심이 쏠릴 만 하다. 지난해 12월 25일 연기처럼 사라진 안양 초등생 이혜진, 우예슬 양이 실종 77일 만에 정성현(구속·39)에 의해 살해당해 참혹한 시신으로 발견된 것을 시작으로 비극적인 사건들이 3~4개월 간격을 두고 연이어 터졌다. 올 봄 유명 프로야구 선수 출신으로 골든 글러브까지 거머쥔 이호성(사망·41)의 손에 어머니와 세 딸이 살해됐고 6월에는 강화에서 하모(구속·27)씨 등 20대 청년 4명이 거액을 노리고 이웃 아주머니와 그의 고교생 딸을 한꺼번에 죽였다. 지난 10월에는 서울 논현동 D고시원에서 기거하던 정상진(구속·30)이 자신의 방에 불을 지른 뒤 연기에 놀라 도망치는 사람들에게 칼을 휘둘러 무려 6명의 목숨을 앗아가는 사건이 벌어지기도 했다.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이호성을 제외하고 나머지 범인들은 현재 구속됐거나 재판이 진행 중이다. 전국을 분노와 공포에 물들게 한 올해 최악의 살인마들의 알려지지 않은 과거와 근황을 지상 중계한다.

“진심으로 죄를 뉘우치고 있습니다. 존경하는 재판관님의 선처를 부탁드립니다.”

지난 10월 2심까지 진행된 재판 과정에서 무려 8번의 반성문과 탄원서까지 제출한 정성현. 그는 2008년 봄 사회면을 가장 뜨겁게 달군 안양 어린이 납치·살해 사건의 범인이다. 지난해 크리스마스 당일 놀이터에서 사라진 뒤 온몸이 토막 난 채 발견된 이혜진, 우예슬양이 바로 정씨의 손에 유린당한 가엾은 희생양이다.


IQ 121의 살인마, 목숨 구걸에 연연

꽃도 피지 못한 어린 생명을 짓밟은 살인마의 연말은 구구한 법정 투쟁의 연장선이다. 4년 전 30대 여성을 마구 때려 숨지게 한 것으로도 드러나 온 국민을 경악케 했던 정씨는 지난 10월 고등법원에서 법정 최고형인 사형을 선고받았다.

이미 1심에서도 사형을 선고받은 그는 고등법원의 항소심 판결에서 역시 죄 값을 덜지 못한 것이다. 정씨는 항소심에서 “두 어린이를 살해할 당시 본드 흡입과 술에 취한 심신미약 상태였고 성폭행을 시도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검찰이 제시한 혐의를 일부 부인한 것이다. 그러나 재판부는 “살해 수법과 과정을 고려할 때 우발적 범행이라 보기 어렵다”며 정씨의 호소를 외면했다.

정씨는 지난해 크리스마스 때 밖에서 놀다 집으로 돌아가던 두 어린이를 자신의 집으로 끌고 가 성추행 한 뒤 목을 졸라 살해했다. 독신인 그의 컴퓨터에서는 ‘로리타(어린아이를 주인공으로 한 포르노 영상)’가 수두룩하게 쌓여있었다. 이는 납치 당일 피해 어린이들을 상대로 성적 욕구를 채우려 했다는 검찰의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 이유다.

정씨의 정신 감정을 담당한 국립법무병원 최상섭 원장에 따르면 그는 지능지수가 121에 달할 만큼 지극히 정상인이었다. 이 IQ수치는 강력사건 범죄자들의 평균 지능이 80~90인 점에 비교하면 매우 높은 것이다.

최 원장은 “121이면 범죄자 가운데서도 뛰어나게 높은 지능이다. 그러나 정씨의 사고체계나 인격은 보통 사람들과는 상당히 달랐다”며 “그는 철저히 자기중심적이었다. 모든 사람이 자신의 생각대로 움직여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반사회적 인물이었다”고 회상했다.

최 원장은 정씨가 1심 재판을 받을 당시 직접 검찰 측 증인으로 재판에 참여했다. 그는 ‘범행당시 술과 본드에 취해 사리 분별을 할 수 없었다’는 정씨의 주장을 논리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조목조목 반박했다.

어린시절 아버지로부터 당한 학대로 인격 자체에 문제가 생긴 정씨는 흔히 말하는 ‘반사회적 인격장애자’ 즉 ‘사이코패스’라는 게 최 원장의 설명이다. 최 원장은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일반적으로 정신질환자가 우발적으로 범행을 저지른 경우 살해 방법이나 시신 처리 방법이 상당히 미숙하다”고 말했다.

반면 정씨의 경우 두 어린이의 목을 졸라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 내고 유기하는 과정까지가 매우 치밀하고 계획적이라는 얘기다. 이는 정씨가 충분히 사리분별을 할 수 있는 상태에서 두 아이를 잔혹하게 유린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그런 정씨가 구속된 뒤 죽음의 공포와 싸우고 있다. 2심까지 이어진 사형 선고를 받아들일 수 없다며 대법원에까지 상고한 정성현. 두 어린 영혼과 한 여성의 삶을 짓밟은 ‘똑똑한 살인마’의 최후는 목숨을 구걸하는 구구함으로 기억되고 있다.


“마포 4모녀 살해는 미제사건”

4명의 피해자와 1명의 가해자가 모두 시신으로 발견되며 비극적 결말을 맺은 마포 4모녀 살인사건. 범인으로 지목된 프로야구 전 해태 타이거즈 4번 타자 이호성은 한강에 투신한 익사체로 발견 돼 가장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한 살인마로 기록됐다.

조직폭력배의 채무 압박에 시달리다 내연관계인 김모(45)여인과 그의 세 딸을 살해하고 1억 7000여만원을 빼앗은 이씨는 자살로 모든 의혹을 묻어버린 경우다. 사건을 담당한 서울 마포경찰서는 이호성의 단독 범행으로 사건을 종결했지만, 어떤 면에선 마포 4모녀 살인사건은 미제로 남았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수사과정에서 이씨와 또 다른 내연관계를 맺고 있던 차모(40)여인의 존재는 사건을 해결하는 새로운 열쇠가 되는 듯 했다. 남편과 별거중인 차 여인은 사건 직전까지 이씨와 동거할 정도로 깊은 관계였고 이씨가 자살하기 직전까지 서울 시내 모 호텔에 함께 투숙했던 핵심 인물이다.

경찰은 차 여인으로부터 이씨가 사채 빚에 얽힌 협박에 시달려 왔다는 진술을 확보하기도 했지만 더 이상의 구체적인 물증을 확보하는 것에는 실패했다. 뿐만 아니라 이씨가 김 여인 모녀뿐 아니라 김 여인의 남편과 과거 동업자인 조모(37)씨도 살해했을 것이라는 의혹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다.

조씨는 2005년 8월 초 이씨와 마지막으로 만난 뒤 지금까지 행방이 묘연하다. 숨진 김 여인의 남편은 지난해 7월 서울 용산의 한 모텔에서 목을 맨 채 숨진 상태로 발견됐다. 당시 수사기록에 따르면 김 여인의 남편은 약간의 의처증이 있었다.

정황을 종합해 보면 2006년부터 아내가 이씨와 내연의 관계라는 것을 안 남편이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고 스스로 목숨을 끊었을 가능성이 높은 것이다. 결과적으로 사건이 발생하기 전까지 지난 3년 동안 이씨와 관련된 상당수 인물이 의문의 죽음을 맞이했거나 실종됐다는 얘기다.


강화모녀 납치 살해범 ‘불행한 과거’

지난 6월 남편을 잃고 딸과 함께 생활하던 윤모(46)여인과 딸 김모(17)양이 실종 20여일 만에 싸늘한 시신으로 발견됐다. 사이비 종교단체에 의한 납치냐, 모녀의 단순 가출 사건이냐를 놓고 혼선을 빚었던 경찰 수사는 결국 돈을 노린 이웃 청년 하씨 등 4명의 조직적 범행으로 결론지어졌다.

철저히 돈을 노리고 모녀의 목숨을 빼앗은 살인범들 곁은 가족들이 지켰다. 지난 11월 초 이들에 대한 1심 4차 공판이 열린 인천지법은 피의자 가족의 선처 호소로 한바탕 눈물바다를 이뤘다는 후문이다.

피고 측 증인으로 재판장에 나선 하씨의 어머니는 시종 아들의 불행한 과거를 언급하며 때늦은 용서를 구했다. 그는 “이혼한 뒤 아들이 아버지 밑에서 구박을 받으며 불쌍하게 컸다”며 유족들 앞에 머리를 조아렸다.

일당은 지난 2006년 4월 하씨의 이복 여동생을 납치해 목 졸라 살해한 혐의도 받고 있다. 당시 다방 여종업원으로 일하고 있던 이복 여동생을 이용해 아버지로부터 몸값을 받아내려는 속셈이었다. 그러나 계획은 실패했고 여동생의 시신은 2년 만에 차가운 땅 속에서 발견됐다.

경찰 수사 과정에서 순순히 혐의를 인정한 하씨 일당은 재판 과정에서도 가족들의 입을 빌어 선처를 호소할 뿐 비교적 조용한 일상을 보내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유족들은 하씨 일당의 ‘극형’을 간절히 바라고 있지만 쉽지는 않을 것으로 보인다.

일당의 부모들이 아들의 구명을 위해 적극적으로 뛰고 있을 뿐 아니라 지난 10년 동안 집행되지 않은 사형제도에 대한 사법부의 회의감이 갈수록 커지고 있기 때문이다.


“경찰 손에 사살되는 게 꿈”

무려 6명의 아까운 생명을 앗아가고 7명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를 입힌 서울 논현동 고시원 참사의 범인 정상진의 소원은 경찰의 손에 사살되는 것이었다. 지난 10월 20일 아침 자신이 살던 고시원 방에 불을 지른 정씨는 연기를 피해 뛰쳐나오는 이웃들을 차례로 도륙했다.

국립법무병원의 정신감정 결과 정씨는 “사리분별력에 문제가 없는 상태”라는 진단을 받았다. 만성적인 우울증상은 있지만 정신질환자로 볼 수는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검찰 수사 과정에서 드러난 그의 범행 동기는 엽기적이기 그지없다. 예비군 훈련에 참석하지 않아 150만원의 벌금형을 선고받은 정씨는 사건 당일 강남 경찰서에 출두해 관련 조사를 받을 예정이었다.

정씨는 바로 이 조사를 피하기 위해 살인을 저질렀다고 태연하게 말했다. 그의 궁극적인 소원은 사람을 죽인 뒤 자신을 체포하러 온 경찰에 의해 사살당하는 것. 검거 직후 “자살할 자신은 없었다”고 덤덤히 말해 유가족을 경악하게 만든 정씨는 지난 11일 검찰에 송치됐다.

끔찍한 사건을 저지른 정씨는 법의 처벌을 눈앞에 두고 있지만 유가족들의 충격은 아직 그대로다. 정씨의 손에 여동생을 잃은 프로축구선수 서성철(24)씨는 동생의 죽음과 관련된 마지막 의혹을 밝히는 작업과 소속팀과의 계약 문제까지 얽혀 눈코 뜰 새 없는 날들을 보내고 있다.

고시원 건물주와 국가를 상대로 정식 소송을 준비 중인 서씨는 “지금은 살인마에 대한 분노보다 언론과 경찰 등에 더 한이 많이 쌓였다”고 말했다.

그는 “최근 우리 가족을 취재하겠다던 모 지상파 방송사 직원들과 심한 말다툼을 벌였다”며 불편한 심기를 감추지 않았다. 자신들이 제기한 의혹에 대해서는 정작 입을 다물던 방송사가 유족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등 마음의 상처만 더 쌓였다는 것이다.

이 시대 살인마들의 태도가 목숨구걸과 자포자기로 극명하게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사법부가 최종적으로 어떤 판단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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