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작원은 무차별하고 냉혈한이어야 한다”

한 번은 아프리카의 잠비아의 정보기관 차장을 초청한 적이 있었다. 96년 초 잠비아에 있던 북한 외교관이었던 현성일 씨 부부의 귀순 과정에서 잠비아 측이 협조해 준 데 대해 사의를 표하기 위해서였다.

잠비아 정보기관 차장은 비서 겸해서 여직원을 한 명 대동해 왔다. 그들은 유순하고 예의 바른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그들 일행이 돌아가고 난 뒤 호텔 측으로부터 예상치 못한 불만을 들어야 했다. 잠비아 여직원이 투숙했던 방에 비치되어 있던 객실 용품들이 모조리 없어졌다는 것이었다. 빗이며 간단한 소품은 물론이고, “가방에 들어 갈만한 물품은 전부 싹쓸이 해 갔다”는 것이었다. 뒷처리를 해야 하는 우리로서는 난감했다.

변상해 주는 수 밖에 없었다. 우리는 평소 정보협력 행사 시에, 호텔 측에 사전 양해를 구하고 예산에 부담이 갈 만한 고급 양주 같은 물품은 냉장고에서 빼내곤 했지만, 이처럼 생활용품이 없어져서 곤란해 지기는 처음이었다. 아프리카의 곤궁함이 새삼 느껴졌다.

나에게 특별히 기억에 남는 행사는 러시아의 특수부대인 알파 부대원들을 초청한 행사였다. 당시 현대의 러시아 주재 한 간부가 모스크바의 버스 안에서 인질로 잡혔는데, 알파부대의 진압 작전으로 구사일생으로 구출되었다. 현대가 감사의 표시로 이들 알파부대원들을 방한 초청했다. 우리로서는 가만히 앉아서 러시아 정보기관과 협력을 강화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현대가 제공한 차량으로 전국을 순회 관광했다.

나는 이들을 데리고 과천에 있는 경찰 대테러 진압부대를 방문하여 시범도 보여 주기도 하고, 용인에 있는 특전사 훈련장에 데리고 가서 합동 시범도 했다. 그들은 우리의 대테러 부대와 특전사 병사들의 시범에 감탄사를 연발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들이 술을 너무 많이 마신다는 것이었다. 입국 시에 보니 이들은 한결 같이 엄청나게 무거운 가방을 하나씩 들고 들어왔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모두 보드카를 한 가방씩 가지고 온 것이었다. 아마 한국에서 술이 비쌀 것이라고 짐작하고 자기들이 마실 거리를 자체 조달해 온 모양이었다.

이들은 이동 시마다 보드카를 한 컵씩 들이켰다. 그 것도 무지 큰 컵으로 마셨다. 이들은 마치 습관처럼 차에 오를 때마다 한 잔씩 들이 부었다. 그런데, 문제는 자기들만 마시는 게 아니라 옆에 있는 나에게도 강권하는 것이었다. 술 문화는 그네나 우리나 별반 다르지 않았다. 그들도 술잔을 건네며 우정을 확인하는 모양이었다. 이들과 다니면서 독한 보드카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이처럼, 정보협력과의 장점은 여기저기 다녀 볼 기회가 많았다는 점이었다. 외국 손님을 접대한답시고 전국을 많이도 돌아 다녔다. 그 중에서도 경주에는 여러 차례 갔었는데, 갈 때마다 기분이 새로웠다. 사실 나는 경주가 그리 낯선 곳은 아니었다. 경주는 내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처음으로 기차를 타고 외부세계를 경험했던 도회지였다. 작은 집이 그 곳에 있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화랑의 집’이란 곳에서 며칠간 수련하느라 방문한 적도 있었다. 경주는 방문할 때마다 새로운 볼거리가 있었다. 도시 전체가 잘 다듬어지고 관리된 문화재와 같았다.

언젠가 벨기에 정보부 차장을 데리고 보문단지를 방문한 적이 있었다. 쪽샘거리인가 하는 곳에 있던 어느 음식점에서 지금은 이름도 잘 기억 안 나지만 전통 음식을 먹었던 것이 기억에 남는다. 콩잎 삭인 것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나물반찬이 여간 정갈하고 맛깔스런 게 아니었다. 그 곳을 들러 본 후에 경상도 음식도 먹을 만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알파부대를 인솔하고 경주에 들렀을 때는 동행하던 서울 주재 러시아 정보기관의 파견관이, “경주에 맛있는 만두집이 있다.”며 가자고 강권했다. 나도 어릴 적에 경주에서 만두를 맛있게 먹었던 기억이 있어서, 물어 물어 어느 만두집을 찾아 갔다. 그러나 예전에 먹던 만두 맛은 아니었다.

정보협력과에서 1년 반 가량 일하고 나니, 해외로 연수 나갈 기회가 생겼다. 과의 계장들은 “전입 온 지 얼마 안 되었다”며 나의 해외연수를 반대했다. 과에서는 일할 인력이 줄어들기 때문에 대체로 젊은 직원들의 연수를 별로 반기지 않는 분위기였다. 그래서 가끔 연수를 신청하는 직원과 남아 있는 직원간에 긴장관계가 형성되는 경우도 있었다. 일 잘하는 직원은 연수 가지 못하고 일 못하고 꼴보기 싫은 직원이 연수를 가게 되는 역설적인 현상도 종종 일어났다. 그런데 신 과장이 직접 나서서 계장들을 설득했다. 그는 “젊은 사람에게 자기 개발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며 나의 연수를 강력히 밀어 주었다. 신 과장 덕택에 나는 스타일 구기지 않고 해외연수 허락을 얻어 낼 수 있었다. 연수기간은 2년이었다. 처음 1년간은 정보학교에서 영어교육을 받은 다음, 나머지 1년은 해외에서 현지 연수를 하도록 되어 있었다.

연수를 떠나기 전 신 과장은 “둘이서 부내에서 점심이나 먹자”고 말했다. 청사 내에서 과장과 둘이 따로 식사해 본 경우가 없어 좀 의아하긴 했지만, 군소리 없이 응했다. 식사 후 같이 청사 내를 한 바퀴 산책하던 중 그가 어렵게 말문을 열었다. 그는 나에게 “나는 이미 나이가 들어 어렵지만, 너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다른 일을 찾아 봐라.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생각해 왔는데, 너는 나보다 심성이 더 착한 것 같다. 여기는 착한 사람이 있을 곳이 아니다”라고 조언해 주었다.

사실, 이 바닥에서는 “착하다”라는 말이 칭찬이라기 보다 욕으로 해석될 때가 많았다. 썅캐의 세계에서는, “착한 사람은 곧 공작관이 될 자격이 없는 사람”이라는 말과 동의어였다. “공작관은 무자비하고 냉혈한이어야 한다”는 미신이 지배하고 있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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