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국정원 직원이야”… 진짜보다 리얼한 연기에 부인도 속아


국정원 직원을 사칭한 사기꾼들에 속아 돈을 뜯기는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는 가운데 이번에는 5년 동안 부인까지 속인 국정원직원 사칭 사기사건이 발생했다. 대구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는 10일 국정원 직원을 사칭, 사기행각을 벌여 수억 원을 받아 챙긴 혐의(사기 등)로 조모(38)씨를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는 작년 11월 초순께 자신의 아내가 다니던 회사의 후배 김모(36.여)씨에게 접근해 돈을 뜯는 등 아내 후배 2명으로부터 4억여 원을 갈취한 것으로 드러났다. 또 조씨는 타인뿐 아니라 가족들까지 속였다. 경찰조사 결과 지난 2003년 결혼한 조씨는 당시에도 자신을 국정원 직원으로 신분을 속였고 5년여 동안의 결혼 생활 기간에도 인터넷과 신문 등을 통해 알게 된 정치권 뉴스를 이용, 줄곧 아내를 포함한 가족과 주변 사람들을 감쪽같이 속였다고 경찰은 밝혔다.

경찰은 조씨가 결혼 전부터 국정원 직원 행세를 해온 것으로 보인다고 밝혔다.

조씨는 경찰 조사에서 “국정원 직원이라고 속이면 사람들이 대부분 속아 넘어갔고 나를 보는 눈이 달라졌다”며 “한 두 번 거짓말하다보니 나중에 수습할 수 없을 지경이 돼 계속 거짓말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조씨는 결혼 후 국정원 직원을 사칭한 것이 탄로날까봐 불안했다. 실제로 의심의 눈초리도 있었고 거짓이 탄로날 빤한 적도 몇 번 있었지만 그때마다 이런저런 거짓말로 계속 둘러대 위기를 모면했다.

조씨를 가장 힘들게 한 것은 출근이었다. 특정한 직업이 없었던 조씨는 국정원 직원으로 행세하기 위해 매일 아침 일찍 피시방 등에 출근해 인터넷으로 방송과 신문에 나온 정치권 뉴스를 검색하며 시간을 보냈다.


월급, 대외비로 다 썼다 거짓말

조씨는 이렇게 알게 된 정치권 정보를 마치 국정원에서 입수한 정보인 것처럼 주변인들에게 떠벌였다.

하루하루를 이렇게 생활하던 조씨에게 서서히 위기가 다가왔다. 수입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아내와 주변 사람들이 이상하게 생각하기 시작했던 것. 조씨의 아내 김씨가 직장생활을 했기 때문에 가정 경제는 거의 아내가 책임지다시피 했다.

조씨는 국정원에서 나오는 월급은 어디에 쓰냐는 김씨의 물음에 대외활동비로 돈이 많이 든다는 식으로 둘러댔다. 하지만 김씨의 의심은 쉽게 걷히지 않았다. 이에 조씨는 뭔가 조치를 취해야겠다고 생각, 방안을 강구했다.

조씨의 사기행각은 2005년 1월부터 시작됐다. 조씨는 당시 아내와 함께 항공사에 근무하다 퇴직한 친구 박씨를 노렸다. 박씨의 남편 역시 무직자였다. 조씨는 국정원 직원으로 행세하며 박씨에게 접근해 집에서 놀고 있는 박씨의 남편을 취직시켜 주겠다고 사탕발림했다.

조씨는 박씨의 남편에게 “잘 아는 국회의원 A씨가 선거에 당선되면 청와대에 취업을 시켜주겠다”며 “3급 공무원이 될 수 있도록 해 줄 테니 작업비용을 달라”고 요구했다.

이렇게 속인 조씨는 교제비 명목으로 한 번에 적게는 100만∼200만원, 많게는 수천만원씩 받아 챙겼다. 경찰 조사결과 조씨는 공무원으로 취직시켜 주겠다는 명목으로 1억4천여만원을 뜯어낸 것으로 드러났다.


순진한 아내에 뒤통수

조씨는 또 박씨에게 판교와 송파 신도시의 아파트 특별분양권을 주겠다며 계약금을 가로채기도 했다. 조씨가 박씨 부부로부터 4년여에 걸쳐 뜯어낸 돈은 모두 4억 원에 이른다.

조씨는 이렇게 뜯어낸 돈을 마치 국정원에서 나온 급여인 것처럼 속여 아내에게 줬다. 경찰에 따르면 조씨는 아내를 속이기 위해 사기 친 돈을 다달이 25일에 맞춰 국정원에서 흔히 사용하는 ‘00출판사’, ‘00문화사’ 등의 이름을 적어 300만∼400만원씩 은행에서 집으로 송금했다.

경찰 관계자는 “조씨는 자신이 가짜라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실제 국정원 직원들을 많이 연구했다”며 “급여수령 방법은 좀 과장됐지만 말이나 행동 등은 진짜 국정원 직원보다 더 진짜 같이 꾸몄다”고 말했다.

이렇게 가짜 국정원 직원의 삶을 살아온 조씨의 정체는 박씨가 경찰에 조씨를 고소하면서 서서히 베일을 벗기 시작했다.

박씨는 A의원이 당선되고 약속한 시간이 지나도 조씨로부터 아무런 소식이 없자 “왜 아직 소식이 없냐”며 여러 차례 다그쳤다.

그때마다 조씨는 지금 의원님이 다른 문제로 바쁘시니 조금 더 기다려 달라는 식으로 차일피일 미루기만 할 뿐이었다. 또 주겠다는 특별분양권도 내용을 알아보니 이미 분양이 모두 끝난 상태였다. 뒤늦게 속았다고 판단한 박씨는 모든 사실을 경찰에 알렸다.

경찰은 피해를 본 박씨의 고소에 따라 지난 3일 박씨에게 사기친 돈을 받기 위해 서울에서 대구 수성구로 찾아온 조씨를 붙잡았다. 조씨는 경찰에서 순순히 범행을 자백했다.

경찰은 “조씨의 부인 김씨는 2003년 결혼한 뒤 아직까지 남편이 국정원 직원으로 근무하는 것으로 알고 있다”며 “김씨는 남편이 자신을 그동안 그렇게 속여 왔다는 사실을 아직도 믿지 못하겠다며 힘들어 하고 있다. 조씨는 가족들에게 미안하다고 말했다”고 안타까워했다.

한편 국정원 직원 사칭 사기사건이 발생한 직후 국정원의 한 관계자는 “대부분 가짜 신분증과 명함을 사용하고 전화 발신자 표시에 ‘국가정보원’이라고 찍힌 전화를 걸거나 ‘비밀 사무실’이라며 사무실까지 임대해 직원 신분을 과시한 사람도 있었다”면서 “일부는 국정원에서 고위직ㆍ특수직을 맡고 있다고 내세우거나 정부 고위직과 접촉이 잦은 것처럼 속였으며 신원 확인을 통해 가짜 신분이 드러날 우려가 있을 경우 ‘국정원에서도 모르는 비밀ㆍ특수요원’이라고 둘러댔다”고 설명했다.

또한 그는 "직원 사칭 사건은 투자 알선ㆍ결혼사기ㆍ금품편취 등 모두 서민들의 생활에 악영향을 미친 사건이었다. 국정원 직원은 공무원으로서 정치 활동이 일절 금지돼 있고, 취업ㆍ사업 인허가 등 민원 청탁도 받거나 하지 못하도록 돼 있다. 정보기관 직원은 민간인 대상 투자 알선행위를 일절 하지 않는다. 개인적인 이익 추구를 위해 신분 노출을 못하게 되어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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