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적환상’이 연쇄살인 부른다

언론에 공개된 강호순의 모습(좌) 강호순이 지난 1998년 자신의 애견과 함께 찍은 사진

여성의 가느다란 목을 스타킹으로 옭아매는 순간, 강호순이 느낀 것은 오르가즘 이상의 쾌감이었다?

비뚤어진 성욕이 최근 발생한 잔혹 범죄의 직접적인 동기일 수 있다는 전문가의 분석이 나왔다. 범죄 심리 전문가인 김상균 백석대 경찰학과 교수는 “과거에는 개인적인 원한이나 사회적인 박탈감, 경제적 이익 등이 연쇄살인범들의 주된 범행동기였다면, 최근에는 희생자를 강간하거나 시신을 훼손하는 등의 행위를 통해 쾌감을 얻으려는 ‘쾌락형 살인’이 주를 이룬다”고 말했다.

이 같은 경향은 이전 유영철, 정남규 사건과는 다르다. 전형적인 ‘실패자’ ‘외톨이’의 삶을 살았던 이들은 사회를 향한 분노를 살인으로 표출시킨 반면, 강호순은 평균 이상의 재력과 외모를 겸비한 매력남으로 온전히 자신의 쾌락만을 위해 움직였다.

문제는 이 같은 쾌락형 범죄가 과거보다 눈에 띄게 늘고 있다는 점이다. 제2, 제3의 강호순이 잇따라 등장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2009년 대한민국을 공포로 몰아넣은 ‘매혹적인 살인마’의 내면과 그가 저지른 섹스살인의 공식을 들여다봤다.

‘성적살인’ 또는 ‘섹스살인’이란 여러 범죄유형 가운데 성적인 목적이 주된 범행동기가 되는 경우를 말한다.

강호순은 희생자의 금품을 노리지 않았고(마지막 희생자 제외) 이들 여성과 합의아래, 혹은 강제로 성관계를 가진 뒤 살해했다. 전형적인 섹스살인이다.


강의 성적환상 부추긴 ‘스타킹’

섹스살인을 부추기는 가장 큰 촉매제는 바로 ‘성적환상’(Sex Fantasy)이다. 성적환상은 특정한 물건(이성의 옷이나 장신구 등)일수도, 집단섹스나 가학적 성행위 등과 같은 비정상적인 상황일수도 있다.

강에게는 여성의 스타킹이 비열한 성적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였을 가능성이 높다. 강에게 붙잡힌 희생자들은 모조리 스타킹에 목이 졸렸다.

경찰이 확인한 2006년 첫 살인부터 지난해 12월 군포 여대생 A씨까지, 7명의 피해자 가운데 예외는 없었다.

이를 근거로 김상균 교수는 “강이 여성용품 특히 ‘스타킹’에 페티시즘(집착)을 가진 성도착자일 가능성이 높다”고 분석했다.

일반적으로 연쇄살인범들은 흔한 성적 도착을 가장 끔찍하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실행에 옮긴다. 예컨대 스타킹에 대한 묘한 열망을 가진 보통 사람들은 애인이나 부인이 이를 착용했을 때 만족감을 느낀다. 반면 강은 희생자가 신고 있는 스타킹으로 그들의 목을 조를 때 극도의 성적 쾌감을 느꼈을 것이란 얘기다.

특이한 것은 다른 연쇄살인범과는 달리 강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도 충분히 성적 욕구를 채울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점이다. 결국 강을 ‘극단적인 일탈’로 이끈 또 다른 성적환상이 존재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김 교수는 “연쇄살인범 중 상당수가 발기부전이나 조루 등 성적 열등감을 갖고 있지만 강은 다르다”며 “그는 마음만 먹으면 다양한 여성들을 만날 수 있을 만큼 수려한 외모와 충분한 재력을 지녔다. 4명의 부인과 아들 셋을 둔 사실은 강이 성적으로도 전혀 문제가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말했다.


‘불장난’은 연쇄살인 전주곡

강이 연쇄살인의 늪에 빠진 결정적 계기에 대해 김 교수는 1998년부터 강의 주변에 발생한 의문의 화재 사건에 주목했다.

강은 10년 전 자신의 트럭이 불에 탔다며 9000만원의 보험금을 타냈고, 2000년에는 자신 명의로 된 상가에 화재가 나면서 9600만원을 보상금으로 챙겼다.

결정적으로 2005년 살던 집 역시 불타며 네 번째 부인과 장모가 숨졌고 강은 무려 4억8000만원의 거액을 손에 쥘 수 있었다.

경찰은 강의 주변에서 벌어진 의문의 화재가 보험금을 노린 자작극일 가능성에 무게를 두고 있다. 주목할 것은 범죄 심리 전문가 사이에서 상습적인 불장난, 방화는 연쇄살인범의 특징적 징후로 통한다는 점이다. 김 교수 역시 같은 맥락에서 강의 발작적 살인 중독을 설명했다.

그는 강의 부인을 죽음으로 이끈 화재가 강의 소행이라는 가정아래 “처음엔 (강호순이)단순히 보험금을 타내기 위해 불을 질렀지만 이 과정에서 아내와 장모가 숨지면서 강이 뒤늦게 ‘살인유희’에 눈 떴을 가능성이 있다”고 말했다.

김 교수에 따르면 연쇄살인범에게 있어 불은 중요한 성적 키워드다. 화염이 타오르는 것을 보며 적잖은 방화범들이 에로틱한 쾌감을 느끼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호순 역시 상습적으로 저지른 방화가 살인으로 연결되면서 내면의 본성을 깨웠을 것이란 얘기다.

연쇄살인범에는 몇 가지 유형이 있다. 일정한 기준으로 볼 때 강은 쾌락 살인을 꿈꾸는 냉혹한 사냥꾼의 기질을 보였다. 피해자를 물색하고 유인하는 과정에서 강은 ‘사냥꾼’과 ‘매복자’의 기본을 철저히 지켰다.


“강은 냉혹한 쾌락 사냥꾼”

그는 자신과 희생자들이 거주하는 경기도 군포 인근 노래방과 버스정류장에서 여성들에게 접근했다.

강은 또 유인한 여성들을 자신의 차에 태워 인적이 드문 곳으로 데려가 내키는 대로 강간하고 살해했다. 희생자들을 온전히 제압할 수 있는 은신처에서 범행을 저지르는 매복형 사냥꾼의 전형인 셈이다.

살해수법에서는 쾌락형 살인범의 특징을 보였다. 김 교수는 “강호순이 욕정에 가득 찬 쾌락 주의자에 속한다”며 “이들 쾌락형 살인범들은 살인을 저지르는 동안 마치 섹스를 즐길 때와 같은 절정을 경험하는 부류”라고 설명했다.

눈에 띄는 것은 성적 도착을 드러낸 여타의 살인범들과 달리 강은 비교적 피해자의 시신을 온전하게 다뤘다는 점이다.

직접 만든 망치와 정으로 피해자들의 머리를 부수고 토막 낸 유영철이나 정남규에 비해 강이 희생자의 옷을 모두 벗기는 정도에 그쳤다.

김 교수는 연쇄살인범들의 살해 방식이나 시신을 유기하는 과정 하나하나가 만족감을 높이기 위한 고유의 ‘의식’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유영철의 경우 피해자를 강간하기보다 망치로 머리를 깨고 시신을 훼손하면서 성적 희열감을 느꼈다. 이에 비해 강호순은 피해자와 직접 성관계를 갖고 목을 조르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는 스타일”이라고 말했다.

영화 ‘살인의 추억’으로 잘 알려진 화성 연쇄살인사건(경기 남부 연쇄살인사건)은 살인범의 성적환상이 가장 극단적으로 표현된 사례로 꼽힌다. 피해자의 질 안에 복숭아 9조각(2개 분량)을 넣은 것을 비롯해 우산과 필통, 숟가락 등의 사물을 희생자의 성기에 삽입한 것. 사건의 범인은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강의 실명과 얼굴이 공개됐을 때 적잖은 사람들이 놀라움에 입을 다물 수 없었다. 유순한 눈매와 오똑한 콧날은 어디 내놔도 빠지지 않을 외모였다.


‘매력적인 살인마’에 속았다

지난 1월 강호순에게 6시간 가까이 억류됐던 김모(여·45)씨 역시 “독신자 모임에 나갔다가 잘생긴 남성이 눈에 띠었는데 바로 그가 강호순이었다”고 밝힌 바 있다.

‘연쇄살인범’하면 음침하고 추한 흉악범을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다.

상당수의 연쇄살인범들은 다정하고 예의바르며 온순해 보인다. 특히 강과 같은 섹스살인범이나 사이코패스들은 기묘한 매력을 풍기기까지 한다. 1970년대 미국에서 강호순과 비슷한 수법으로 여성들을 농락한 테드 번디(사망) 역시 잘생긴 외모와 수줍은 미소로 희생자를 유혹했다.

김 교수는 “연쇄살인범의 특징 가운데 ‘피상적인 매력’이라는 게 있다. 즉 겉으로 호감이 가는 사람이라는 얘기다”며 “이는 단순히 잘생긴 외모를 말하는 게 아니다. 이들은 희생자들로 하여금 ‘전혀 위협적이지 않은 사람’ ‘도와주고 싶은 사람’ 등 일종의 보호본능을 느끼게 하는데 탁월한 재주가 있다”고 설명했다.

강은 수려한 외모와 함께 고급 승용차를 몰고 다니며 여성들의 환심을 샀고 그의 작전은 고스란히 적중했다. 결국 ‘매력적인 살인마’는 완전 범죄에 대한 지나친 자신감을 품기에 이르렀다.

김 교수는 이를 ‘과잉 낙천성’이라고 정의했다. 요컨대 ‘나는 뭐든지 할 수 있다’ ‘경찰은 절대로 나를 잡을 수 없다’며 스스로를 영웅시하는 것이다.

강은 이 같은 사실을 과시하기 위해 마지막 희생자 A씨의 현금카드로 돈을 인출하고 CCTV에 얼굴을 공개하는 ‘무모한 도전’을 하기까지 했다. 결국 그의 지나친 자신감은 강의 범행 일기에 치명적인 오점으로 남게 됐다. 하지만 강은 그가 할 수 있는 가장 통렬한 방법으로 수사팀을 농락한 셈이다.


‘탐험적 섹스’가 연쇄살인 부추겨

강호순과 같은 일탈적 섹스살인범이 또 등장할 가능성은 충분하다. 해외의 경우 이미 100년 전부터 욕정을 앞세운 섹스살인이 이어져 적어도 수백명 이상의 희생자가 처참한 최후를 맞았다. 김 교수는 “인간이 갖고 있는 ‘탐험적 섹스’에 대한 욕구가 섹스살인이나 성범죄를 부추기고 있다”고 지적했다.

저명한 동물학자 데즈먼드 모리스에 따르면 인간의 섹스 유형은 크게 10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탐험적 섹스는 이 가운데 하나로 인간이 경험해보지 못한 강력한 자극을 얻기 위해 끊임없이 새로운 경험을 갈구하는 것을 말한다.

문제는 사회가 복잡해질수록 이들이 원하는 자극의 강도가 점점 더 강해진다는 점이다.

김 교수는 “인간이 갖고 있는 성적 탐험심은 상상을 초월한다. 이것이 지나쳐 일탈적, 변태적 성향으로 변질될 경우 심각한 사회문제로 비화될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정상적인 성생활을 유지하고 있는 보통 사람들이 더 강하고 자극적인 흥분을 찾아 비정상적인 쾌락에 중독 될 가능성이 높다는 얘기다.

과거 한국의 연쇄살인범은 가정과 사회에 불만이 많은 실패자, 외톨이가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강호순 사건으로 인해 이 같은 고정관념이 깨져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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