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마 테스트’에 푹 빠진 대한민국

'악마이름 테스트'라고 알려진 사이트화면.(상단좌측) · 사이코패스 번죄자를 다룬 미국드라마 '덱스터'(상단우측) · 사이코패스 측정기구 PCL-R

<당신은 도둑이다. 야심한 밤 누군가의 집을 털고 있는데 집주인이 잠에서 깨 물건을 훔치는 당신을 보았다. 그리고는 당신이 보는 앞에서 잠기지 않는 옷장으로 몸을 숨기는 게 아닌가. 당신의 손엔 칼이 쥐어져 있다. 어떻게 집주인을 죽일 것인가. - 일반인의 답 : 옷장 문을 열고 죽인다, 옷장에 불을 지른다, 옷장을 창밖으로 집어던진다, 옷장을 칼로 난도질 한다 등. / 사이코패스의 답 : 집주인이 스스로 옷장에서 나올 때까지 그 앞에 앉아 기다린 뒤 죽인다.>

최근 인터넷을 중심으로 무섭게 번지고 있는 ‘사이코패스 테스트’ 문항 중 하나다. 섬뜩한 상황을 전제로 한 ‘살인문답’이 대한민국을 강타하고 있다. 강호순이 두 번에 걸친 테스트 결과 각각 27점, 28점을 얻었다고 알려진 PCL-R(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40점 만점) 전문도 ‘사이코패스 자가진단’으로 둔갑해 인기 검색어에 올랐다.

몇 개의 설문과 질문지를 접한 누리꾼들은 불과 1~2분 만에 사이코패스 판정에 목을 맨다. 최근에는 본인의 이름을 입력하면 악마적 성향을 분석해 주는 ‘악마이름 테스트’ 사이트까지 등장했다.

문제는 테스트를 마친 사람들 중 상당수가 ‘점수가 높게 나왔는데 나도 강호순 같은 살인마가 될까 두렵다’는 공포심에 시달린다는 점이다. 유행처럼 번지는 ‘사이코패스 신드롬’의 진실을 추적했다.

전문가들은 사이코패스 여부를 자가진단으로 판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라며 펄쩍 뛴다.

연세진 정신과 진용탁 원장은 “PCL-R은 애초 자가진단용이 아니라 전문심리사가 피의자를 직접 면담하고 점수를 매기는 식이다”며 “전문가 평가용 설문을 자가진단 목적으로 사용하면 당연히 정확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살인문답’은 사이비 테스트

진 원장은 “전문가들도 쉽게 진단하기 어려운 인격장애를 설문지 한 장으로 진단하는 것은 무리”라고 지적했다. 신빙성 없는 엉터리 검사로 자칫 엄한 걱정을 하는 부작용도 무시할 수 없다는 얘기다.

그러나 매력적인 살인마에 빠진 일반인들에게 전문가들의 기우는 ‘쇠귀에 경 읽기’나 다름없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잔혹범죄가 판을 치는 가운데 ‘내 안의 악마’를 들여다보길 원하는 일반인들의 관심이 사이코패스 광풍으로까지 이어진 까닭이다.

현재 인터넷에 나돌고 있는 사이코패스 테스트는 크게 두 종류다. PCL-R로 알려진 20개의 단답형 설문지와 FBI에서 범인 심문용(?)으로 쓰인다는 10개의 상황설정 문항들이 그것이다.

PCL-R 한국어판을 발행하고 있는 학지사 심리검사연구소에 문의한 결과 전자는 실제 질문지의 일부인 것으로 밝혀졌다. 그러나 후자는 누군가가 만들어낸 가짜다.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인터넷에 검색되는 사이코패스 테스트는 전혀 근거 없는 엉터리”라며 “일부 누리꾼들이 언론 보도를 보고 임의로 테스트 문항을 만들어 퍼트렸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총 20개의 문항으로 구성된 PCL-R은 항목마다 0~2점까지 점수를 매겨 40점에 가까운 점수가 나왔을 때 사이코패스 진단을 내린다. 미국은 30점 이상, 한국은 24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로 분류한다.

희대의 살인마 유영철은 이 테스트에서 34점을 얻어 역대 범죄 피의자 가운데 가장 높은 점수를 기록했다.

한편 사이코패스 테스트와 더불어 일명 ‘악마이름 테스트’도 누리꾼들 사이에 큰 관심을 끌고 있다. 특정 사이트에 접속해 영어로 자신의 이름과 성을 적어 넣기만 하면 내면의 숨겨진 ‘악마의 이름’이 나온다는 것이다.


내 이름에 ‘악마의 피’가 흐른다?

조합되어 나오는 단어는 Disturbed Angel(타락천사), Death Dealer(죽음의 거래자), Death Psycho(죽음의 정신병자) 등 섬뜩하기 그지없다. 이들 단어가 창에 뜨는 순간 마치 내 안에 잠재된 악마를 깨운 듯한 착각을 느낄 정도로 사이트 분위기 역시 음침하다.

해당 사이트는 최근 한국 누리꾼들에게 알려진 뒤 방문객이 폭주해 사이트 접속이 차단되는 소동까지 빚을 정도로 호황을 누렸다.

일부 청소년들 사이에서는 자신이 좋아하는 아이돌 그룹 멤버들의 이름을 ‘악마의 이름’으로 바꿔 부르는 ‘놀이’도 유행하고 있다.

그러나 ‘악마이름 테스트’ 역시 몇몇 누리꾼들이 지어 붙인 엉터리 심심풀이에 지나지 않는다. 실제 해당 사이트는 고스문화(goth·락 음악 장르의 하나. 주로 음침한 차림새와 악마, 유령 등을 추종하는 부류)를 즐기는 이들이 애완동물이나 이성 친구의 별명(닉네임) 등을 쉽게 짓도록 도와주는 검색창에 불과하다.

이 같은 경향으로 볼 때 사이코패스의 잔혹성은 더 이상 공포의 대상이 아니다. 오히려 매력적인 살인마를 향한 동경과 일종의 동질감을 느끼고자 하는 젊은 세대의 ‘놀이감’으로 전락한 상황이다.

표창원 경찰대 교수는 “최근 불어 닥친 지나친 사이코패스 열풍은 일반인들이 언론을 보도된 사건이나 현상을 너무 쉽게 생각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이라며 “관련 내용을 무조건적으로 흡수하기보다 옳고 그른 것을 확실히 구분하는 신중함이 필요하다”고 지적했다.


# 진단명 ‘사이코패스’(psychopath) 영혼의 불치병

‘숨소리조차 거짓말’ 철저한 가면에 가족조차 속아

유영철, 정남규, 강호순에 이르기까지 연쇄살인마의 등장은 새로운 유행어를 창조해 냈다. 사이코패스(psychopath·정신병질자)라는 용어가 잔혹 범죄뿐 아니라 정치권과 연예계까지 아우르며 2009년 대표 키워드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사이코패스는 겉은 멀쩡하면서도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자를 일컫는다. 내부에 잠재돼 있다가 범행을 통해서만 밖으로 드러나기 때문에 주변에서는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일반적으로 정신장애가 범죄의 원인이 될 경우 환자는 자신이 무슨 짓을 저지르고 있는지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다. 그러나 사이코패스는 죄책감을 느끼지 못할 뿐 스스로 저지른 범죄에 대해 정확히 인지하고 있다. 즉 사이코패스는 정신병 환자가 아닌 냉혹한 범죄자일 뿐이다.

전문가들은 “잔혹 범죄를 저지른 사이코패스들이 수사관에게 죄를 뉘우치는 듯한 표정을 짓는 것은 범죄 사실을 감추거나 동정을 얻기 위한 연기”라고 말한다. ‘숨소리조차 거짓’이라는 말은 바로 사이코패스를 두고 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사이코패스라는 개념이 국내에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2004년 연쇄살인범 유영철이 판결 전 조사에서 사이코패스 진단을 받으면서부터다. 그러나 전문가들은 사이코패스가 연쇄살인마에 국한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로버트 헤어 박사의 저서 ‘진단명 사이코패스’에 따르면 사이코패스는 일상 속에서 얼마든지 만날 수 있는 ‘평범한 사람’이다. 또 다른 연구보고에 의하면 전체 성인의 1% 정도가 사이코패스 징후를 보였다.

또 서울대 의대 소아정신과와 서울시소아청소년센터가 2005년 서울 시내 초·중·고 학생 2672명을 대상으로 한 조사에서도 1.5%가 사이코패스 성향을 보였다. 이들 어린 사이코패스가 성인이 된 뒤 잔혹 범죄에 매료될 가능성도 무시할 수 없다.

때문에 범죄 전문가 사이에서는 품행 장애를 보이는 청소년들을 조기에 걸러내 국가가 치료를 지원해야 한다는 목소리가 높다.


##사이코패스 측정기구 PCL-R은 무엇?

PCL-R은 캐나다 출신 범죄심리학자 로버트 헤어(Robert Hare)박사가 저술한 사이코패스 체크리스트를 말한다. ‘말 잘하는 것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속임수를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등 20개 항목에 대해 ‘전혀 그렇지 않다(0점)’ ‘조금 그렇다(1점)’ ‘정말 그렇다(2점)’ 등으로 답하고 점수를 합산하는 식이다. 일반적으로 20점 이상이면 사이코패스일 가능성이 높은 것으로 본다.

PCL-R은 고도의 심리훈련을 받은 전문가가 대상자와 면담을 통해 점수를 매기는 방시으로 이뤄진다. 검사 시간은 최소 1시간 30분에서 2시간 이상 걸린다. PCL-R의 한국어 판권을 갖고 있는 학지사 심리검사연구소에 따르면 검사자들은 충분한 임상적, 법정 심리학적 훈련과 경험을 쌓아야 한다. 사이코패스 진단은 일반인이 단순히 묻고 답하는 수준에서 진단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수>

■ PCL-R 질문지
1. 말 잘하는 것을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2. 자신의 가치에 대해 자랑하고 다닌다.
3. 거짓말을 입에 달고 산다.
4. 속임수를 경멸하거나 극단적으로 싫어한다.
5. 범죄를 저질러도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6. 감동적인 것을 봐도 감동인지 모른다.
7. 매사에 냉담하고 남이 말하는 것에 공감하지 않는다.
8. 책임감이 없거나 부족하다.
9. 일상 생활에서 많은 정신적 자극이 필요하고 지루함이 많다.
10. 기생충처럼 남에게 빌붙어 산다.
11. 나쁜 행동을 자제할 능력이 부족하다.
12. 소년비행을 경험하거나 영·유아기 때 잔인한 짓을 많이 했다.
13. 현실성이 부족한 목표를 길게 끌며 그것을 할 수 있다고 믿는다.
14. 매사에 충동적이다.
15. 무책임하다.
16. 비행청소년이었다.
17. 약속을 쉽게 어긴다.
18. 공개된 장소에서 성적인 행동을 서슴지 않는다.
19. 다수의 상대와 짧은 연애를 즐긴다.
20. 범죄적인 재능이 타고났거나 재능을 범죄에 이용하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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