母情 앗아간 우울증에 사건 진실 묻힐라

30대 간호조무사가 생활고와 우울증을 이유로 친자식을 둘이나 목 졸라 살해한 사건에 전국이 충격에 빠졌다. 경찰은 평소 심한 우울감에 빠져있던 엄마 이모(34)씨가 충동적으로 남매의 목숨을 빼앗았다는 자백을 받아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씨의 진술은 사건의 진상을 완전히 설명하기엔 상당부분 앞뒤가 맞지 않는다.

무엇보다 약물을 써 아이들을 재운 뒤 현장을 강도 사건으로 위장하기까지 했던 이씨가 충동적으로 친자식들을 죽였다는 주장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또 간호사는 물론 의사들도 함부로 손댈 수 없는 마약성 약품을 일개 간호조무사가 아무렇지 않게 빼돌릴 수 있었던 과정 역시 의문점으로 남아있다.

일각에서는 몇 가지 정황으로 미뤄 이씨가 ‘우울증’이라는 개인적인 질병을 이유로 친자식을 살해한 진짜 이유와 정황을 덮으려 한다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이씨가 경찰에 붙잡힌 뒤에도 차마 말 못할 사연이 숨어있을 가능성이 크다는 얘기다.

의정부 초등생 남매 살해사건과 관련된 ‘진짜 진실’을 입체 추적했다.

경찰은 범행 동기로 이씨가 수년째 앓아왔다고 밝힌 ‘우울증’에 주목하고 있다. 특히 이씨는 범행에 사용한 수면유도제도 원래는 자신의 두통과 불면증을 고치기 위해 구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기자가 확인한 결과 이씨는 단 한번도 전문의로부터 우울증을 진단받거나 치료받은 적이 없었다. 그가 자신의 범행 동기를 숨기기 위해 정신병 운운하며 수사팀을 속이려 한다는 의심을 받기에 충분한 대목이다.


진단 없는 우울증 ‘진실 혹은 거짓’

이씨가 최근까지 일했던 서울 N내과병원 관계자는 기자와의 전화통화에서 “이씨의 우울증 여부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씨를 ‘10년 차 베테랑 조무사’ ‘조용하고 차분한 성격의 소유자’ 정도로 기억할 뿐이었다.

물론 일반적인 신체적 질환과 달리 우울증은 전문의의 진단 자체가 병 여부를 가리는 100% 요건은 아니다.

실제 이씨가 우울증을 앓았다 해도 겉보기에 정상적인 생활을 하는 척 위장할 목적으로 본인이 병을 숨겼을 가능성 역시 충분하다.

다만 꺼림칙한 것은 이씨의 범행 과정이 극심한 우울증 환자가 저지른 짓이라고 보기에는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계획적이라는 점이다.

연세진 정신과 진용탁 원장은 “우울감에 견디다 못해 친자식을 죽일 정도였다면 분명 이성적인 판단이 불가능한 상황이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비해 이씨의 범행과정은 지나치게 이성적이고 냉정하다는 게 진 원장의 설명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는 지난달 21일 저녁 자신이 일하는 병원에서 마약성분이 들어있는 수면유도제와 주사기를 몰래 훔쳐갖고 나왔다.

1주일 뒤인 28일 저녁 7시 30분 경 이씨는 문제의 약물을 아이들에게 주사했고 남매는 잠이 든 상태에서 친어머니에게 목이 졸려 숨을 거두고 말았다.

방안에서 숨진 남매를 거실로 나란히 옮긴 이씨는 강도의 소행으로 꾸미기 위해 일부러 서랍을 뒤집고 옷가지를 흩어놓는 등 현장을 조작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사건 직후 싸늘히 식어가는 아들(11)과 딸(9)의 시신을 뒤로 한 채, 이씨는 아무렇지 않은 척 서울에서 일하는 남편을 찾아갔다.


남매 명의로 거액 보험 가입?

부부는 같은 날 오후 9시 10분 경 함께 집으로 돌아왔고 차갑게 굳은 남매의 시신과 어지러운 집안이 이씨 부부를 반기자 사건은 겉잡을 수 없이 커졌다. 이씨의 가증스러운 연기는 신고를 받고 출동한 구급요원들 앞에서 절정을 맞았다.

이씨는 119 요원들을 붙잡고 “우리 아이들 좀 살려달라”며 대성통곡을 해 이웃 주민들의 동정을 한 몸에 받았다. 사건이 언론에 알려진 뒤 이씨는 “제발 범인이 빨리 잡혔으면 좋겠다”며 인터뷰에 응하기까지 했다.

이씨의 진술 가운데 ‘생활고에 시달려 아이들을 제대로 키우기가 어려웠다’는 부분도 당장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이다.

경찰에 따르면 간호조무사로 일하는 이씨와 회사원인 남편의 수입은 모두 합쳐 300만원 수준.

네 식구가 풍족하지는 않아도 당장 생활고를 걱정할 만큼은 아니라는 게 일반적인 상식이다. 사건을 담당한 경기도 의정부 경찰서는 이씨와 남은 가족들을 상대로 이들의 채무관계 등을 조사 중이라고 밝혔다.

특히 이씨 부부가 남매 명의로 거액의 생명보험에 가입했는지 여부도 확인 중이다. 지난달 중순 전라도 광주에서 부인과 두 아들 등 일가족을 모두 살해한 뒤 불을 지른 혐의로 구속된 최모(29)씨 역시 거액의 유산을 노리고 처자식을 죽인 비정한 가장이었다.

특히 이씨 부부가 상당한 채무관계에 시달려왔다면 이씨가 아이들 몫의 보험금을 노리고 ‘몹쓸 짓’을 저질렀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또 이씨뿐 아니라 남편이자 남매의 아버지인 김모씨의 공모 여부도 풀어야할 숙제다.

이씨가 아이들의 목을 졸랐다고 진술한 전깃줄 등 흉기가 아직 발견되지 않았을 뿐 아니라 김씨가 살인까지 저지른 아내의 이상 징후를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 역시 앞뒤가 맞지 않기 때문이다.

김씨가 119 구급대원이 출동하기 전 직접 흉기를 은폐했거나 아내의 도피를 도왔다는 정황이 드러나면 이씨 부부는 친자식을 살해한 비정한 부모의 꼬리표를 떼기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약물관리 허술했거나 공범 있었을 것”

사건과 관계된 마지막 의문은 이씨가 향정신성의약품으로 분류된 문제의 약품을 무슨 수로 훔쳤느냐는 점이다.

경찰에 따르면 이씨가 어린 남매에게 주입한 약품은 미다졸람(상품명 도미컴)으로 범행 일주일 전 이씨가 자신이 일하던 병원에서 훔친 것이었다.

그러나 문제의 약품은 아무리 치료담당자라 하더라도 쉽게 병원 밖으로 갖고 나올 수 있을 만한 물건이 아니다.

서울 모 병원 관계자에 따르면 미다졸람이나 디아제팜(불면증 치료제) 등과 같은 마약성분의 약품은 반드시 매일 수량을 체크하고 사용처와 담당자를 기록해야 한다.

이 관계자는 “간호사도 아닌 조무사인 이씨가 문제의 약물에 손을 댔다면 간호사나 의사 등이 이씨와 공모했거나 문제의 병원이 중요 약품관리를 허술하게 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이씨가 훔친 미다졸람의 양은 5mg. 이는 주사 앰플 1개 분량으로 일반 성인이 수면내시경을 받기 전 수면유도제 겸 진정제로 투약하는 양이다. 이는 각각 11살 9살이었던 남매를 잠들게 하는데 전혀 부족함이 없다는 게 병원 관계자들의 설명이다.

이씨는 문제의 앰플 한 개를 주사기 2개에 나눠 ‘감기약’이라고 속인 뒤 자식들에게 주사했다. 아이들이 정신을 잃자 이씨는 태연히 남매의 목을 졸랐다.

경찰에 따르면 문제의 약물병과 주사기는 이씨 부부의 집 쓰레기통에서 발견됐고 남매를 부검한 결과 혈관에서도 미다졸람 성분이 나왔다.

또 다른 병원 관계자는 “가끔 간호사나 의사들이 환자에게 투약했다는 핑계로 일부 마약성 약품을 빼돌리는 경우가 있다”며 “환자의 진료 차트를 조작해 상급자의 오더(지시사항)만 따낸 뒤 약품을 손에 넣는 수법이 가장 흔하다. 그러나 법적으로 의료인이 아닌 간호조무사는 처방에 대한 권한 자체가 없어 이런 방법으로 약품을 빼내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또 “일부 수면내시경을 전문적으로 하는 내과에서 많이 쓰이는 약품이라는 이유로 미다졸람 등의 약물을 아무 보관 절차 없이 쌓아두고 허술하게 관리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지적했다.

그는 “병원윤리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한 조무사들이 쉽게 위험 약물에 손대는 경우가 많은 만큼 병원 측의 약품 관리에도 엄격한 법적 잣대가 필요한 시점이다”고 덧붙였다.



#우울증 자가진단

우울증이라 하면 쉽게 약물치료를 떠올리는 이들이 많다. 그러나 정신과를 찾는 우울증 환자 가운데 60~70%만 약물치료를 받는다. 가벼운 우울증은 항우울제 치료만으로 70% 이상 회복 효과가 있다. 다만 우울증은 좋아진 뒤에도 재발 가능성이 커 증상이 사라졌다 해도 최소 6개월간 꾸준히 복용하는 것이 좋다.

항우울제를 복용하면 '중독이 된다' '바보가 된다'는 근거 없는 말이 떠돌고 있으나, 항우울제는 의존성이나 중독성이 거의 없다.

대한신경정신의학회는 우울증 진단 기준으로 다음 9가지 항목을 제시하고 있다. 다음 증상 중 5가지 이상이 2주 이상 계속될 때 전문가와의 상담이 필요하다.

① 거의 매일 우울한 기분(우울, 슬픔, 공허감 등)이 든다.
② 일상생활에 대한 흥미·즐거움이 감소했다.
③ 최근 한 달 동안 식욕부진(증가)이나 체중감소(증가)가 있다.
④ 불면 또는 수면과다에 시달린다.
⑤ 불안, 초조하거나 의욕이 없다.
⑥ 무기력하거나 피곤하다.
⑦ 존재감·가치감 상실, 지나친 죄책감이 든다.
⑧ 사고력이나 집중력이 떨어지고, 우유부단해 진다.
⑨ 반복되는 죽음에 대한 생각, 자살사고, 자살기도를 한다.



##경찰에 “부부관계 소원해” 진술… 정신학적 근거 있어
남편에 대한 증오, 자식들에 대신 풀었다?

우울증에 생활고에 시달리다 친자식을 살해한 것으로 알려진 이씨가 남편과의 소원한 관계 또한 범행 동기 중 하나라고 진술했다. 정신과 전문의에 따르면 부부간의 불화가 둘 사이에 생긴 자녀들에 대한 적개심이나 증오로 ‘투시’되는 사례가 적지 않다.

이씨의 진술이 사실이라면 그가 남편에 대한 증오를 자식들을 해치는 것으로 풀려 했을 것이란 추측도 가능하다.

우울증이 심할 경우 현실 판단력까지 잃는 경우가 많다. 특히 자해나 살인 등 상식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을 저지르는 일도 흔하다. 이씨의 경우 분노의 대상이 스스로가 아닌 남, 하물며 친자식이 됐다는 점에서 심각한 일이다.

연세대 세브란스병원 정신과 남궁기·김어수 교수팀이 최근 발표한 연구 자료에 따르면 우울증이 심한 경우 자해나 자살시도 등을 통해 스스로를 공격함으로서 문제에서 벗어나는 ‘심리적 방어선’이 더 이상 작용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문제의 원인을 외부의 인물로 돌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때는 증오나 적개심 같은 감정이 외부의 인물로 향하게 된다. 특히 이런 상황에 빠진 환자들은 말도 안 되는 트집을 잡아 화풀이 할 대상을 찾게 된다.

이씨의 경우 두 아이들의 존재가 자신의 인생과 생명을 위협한다고 믿은 것일 수 있다.

남궁기·김어수 교수팀은 “본인의 공격성을 참을 수 있는 인내력이나 문제를 예측할 수 있는 판단력까지 흐려져 비상식적인 범죄를 저지르는 수가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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