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상납리스트’ 감춘 배후에 고위층 있다 ‘의혹 증폭’


지난달 7일 자살한 탤런트 故 장자연(29)씨 사건을 놓고 경찰의 아마추어만도 못한 수사행보가 연일 도마 위에 오르고 있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장씨 사건의 핵심을 묻어둔 채 의도적으로 축소·표적 수사를 벌이고 있는 게 아니냐는 의혹도 불거지고 있어 수사팀을 향한 비난여론은 쉽게 수그러들지 않을 전망이다.

일명 ‘장자연 리스트’로 불리는 고인의 친필 문건이 경찰 수사가 아닌 공중파 방송사의 취재과정에서 드러난 것부터 시작해 경찰은 연일 언론사 뒤꽁무니만 쫓는 ‘뒷북치기’에만 열을 올리고 있다.

더구나 지금까지 사건의 핵심으로 지목된 고인의 현 소속사 대표 김성훈(42)씨와 김씨가 대표로 재직한 T사에 대한 수사 역시 전혀 진전이 없는 상태다. 경찰은 지난달 21일 한 일간지가 ‘T사 건물 3층에서 침대와 샤워실 등 ‘성접대’에 사용된 것으로 보이는 시설물이 있다’는 보도를 한 뒤에야 수사관을 파견해 뒷수습에 나섰을 정도다.

일각에서는 “경찰이 아마추어가 될 수밖에 없는 말 못할 속사정이 있을 것”이라는 위험한 추측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한 신인 여배우의 죽음에서 ‘연예계 상납 비리’로 비화된 ‘장자연 사건’을 둘러싼 경찰수사의 허술함을 낱낱이 짚어봤다.


1.미스터리경찰, 김 대표 -안 잡나 못 잡나

사건의 핵심은 고인의 소속사 대표인 김씨가 고인을 비롯한 소속사 연예인들에게 유력인사들을 상대로 하는 ‘부적절한 접대’를 강요했는지 여부다. 그러나 경찰은 정작 사건 당사자인 김씨가 어디 있는지 조차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상태다.

일본에 머물고 있는 김씨가 국내 언론들과 수시로 인터뷰까지 하고 있음에도 경찰은 지난달 23일 그와 단 한 차례 전화통화를 하고 “빨리 귀국하라”는 한 마디만 전했을 뿐이다. 이는 사건의 양대 당사자인 고인의 전 매니저 유장호(29)씨가 이틀 뒤 피의자 신분을 소환돼 10시간이 넘는 밤샘 조사를 받은 것과는 대조적이다.

김씨가 경찰수사에 응할지 여부는 아직 명확하지 않다. 김씨는 지난달 26일 자신의 대리인으로 변호사를 선임해 유씨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으로 고소했다. 그는 “곧 귀국해 경찰에 출석하겠다”는 요지만 밝혔을 뿐 김씨의 존재는 여전히 베일에 싸인 채다.

경찰은 유씨를 상대로 한 조사에서도 사건 해결을 위한 열쇠를 손에 넣지 못했다.

유씨는 경찰에서 “(일명)‘장자연 리스트’의 초안을 고인과 함께 만들어 이 중 일부를 일간지 기자 3명과 유가족, 코디네이터 등에게 먼저 보여줬다”고 진술했다.

이미 보름 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밝힌 내용을 그대로 확인한 것에 그친 것이다.

일선 기자들 사이에선 사건 당사자와 관련자들의 진술은 경찰보다 언론사 담당 기자들이 더 많이 확보하고 있다는 말이 돌고 있을 정도다.

사건을 수사 중인 경기도 분당 경찰서 담당 한 일간지 여기자는 “경찰 브리핑이 하도 허술하다보니 경찰서를 지키고 있는 건 후배 기자들 뿐”이라며 “대부분 선배들은 직접 T사 전 직원들이나 관련자를 찾아다니며 직접 사건 정보를 캐 모으고 있다”고 말했다.

경찰은 인터폴을 통해 김씨를 수배하는 한편 그의 사무실을 압수수색했지만 이렇다할 성과를 얻지 못한 채 시간만 흘려보내고 있다.


2미스터리- ‘장자연 리스트’에 손 못 대는 경찰, 혹시…?

사건의 또 다른 핵심인 일명 ‘장자연 리스트’의 작성 경위와 유출 과정도 여전히 오리무중이다. 유씨는 고인이 숨진 직후 모습을 드러내 문건이 장씨의 ‘유서’이며 고인이 목숨을 끊기 전 스스로 작성해 자신에게 가져왔다고 주장했었다.

그러나 유씨는 최근 경찰 조사에서 이 같은 주장을 뒤집었다. 문제의 리스트는 소속사 대표인 김씨를 고소할 목적으로 작성한 ‘진술서’로 유씨가 고인과 함께 머리를 맞대고 쓴 ‘공동작품’이었다는 얘기다.

유씨와 관계자들의 이야기를 종합해보면 고인이 부적절한 접대에 불려나갔다는 문건의 내용은 상당부분 사실인 것으로 보인다. 문제는 속칭 증권가 ‘찌라시’를 통해 문건에 이름을 올린 유력 인사들의 실명이 만천하에 공개돼 엄청난 파문이 일 때까지 경찰은 문건과 관련된 의혹에서 아예 손을 놓고 있었다는 점이다.

기자들이 문건의 진위를 파악하기 위해 관계자들을 줄줄이 인터뷰하며 관련 입장을 정리하고 있을 때 경찰은 유씨의 입에만 온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언론사가 불과 이틀 만에 확인한 사건의 실체를 경찰은 무려 20일이 지난 뒤에야 미적거리며 발표한 것만 봐도 수사팀의 문제는 심각하다.

고인이 접대장소에 함께 동석했다고 언급한 인사들에 대해 간단한 사전 조사만 했다면 ‘장자연 리스트’의 실체는 훨씬 빨리 드러났을 가능성이 높다.

이는 경찰이 처음부터 ‘장자연 리스트’에 대한 수사 의지가 전혀 없었거나, 문건이 가진 파급력을 두려워한 나머지 아예 손 댈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는 뜻으로 해석할 수 있다.

경찰은 이와 관련해 “유씨가 문서 유출 경위나 명예훼손 등 신문에 난 기사와 관련된 내용에 대해서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거나 변호인과 상담한 뒤 알맹이가 있는 추가 진술은 피해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고 둘러대기 바빴다.

따라서 수사팀은 장씨 오빠에 의해 고소된 피고소인들을 표적으로 한 본격 조사보다 사건에 개입했던 관계자들을 대상으로 한 광범위한 기초조사에 매달릴 수밖에 없는 답답한 상황에 빠졌다.


3미스터리-‘뒷북 압수수색’ 따지면 끝도 없어

무엇보다 부적절한 접대행각이 벌어진 것으로 지목된 고인의 소속사 건물에 대한 경찰의 압수수색 과정은 거의 ‘태업’에 가까운 수준이다.

경찰은 T사 소속 연예인의 접대 장소로 이용된 것으로 지목된 서울 삼성동 소재의 건물 실체가 드러난 지 5일여 만인 지난달 24일에야 이에 대한 대대적인 압수수색에 나섰다.


문제는 경찰이 압수수색에 나서기 전 김씨의 지인으로 보이는 이들이 문제의 건물에서 일부 물건들을 들고 나갔다는 의혹이 제기됐다는 점이다. 이 같은 의혹이 사실로 드러날 경우 경찰은 김씨의 증거인멸 시도를 방관했다는 비난여론을 피할 길이 없다.

경찰의 어처구니없는 태도는 이뿐만이 아니다. 당시 사무실에 어떤 인물이 드나들었는지 가장 기본적인 증거자료가 될 CCTV 녹화자료를 확보하는 과정에서도 잡음이 불거졌다. 당초 경찰은 문제의 건물 주변에 설치된 CCTV가 멀리 떨어져 있는데다 업체 측이 한 달 치 화면만 보관하고 있다는 이유를 들어 관련 자료를 조사하기 어렵다고 밝힌 바 있다.

경기 분당경찰서 오지용 형사과장은 최근 브리핑에서 “CCTV 1대에 녹화된 영상을 모두 받으려면 CD 1000장이 필요하다. (수사 과정에서)필요 없다고 판단했다”고 말했다.

그러나 오 과장의 발언이 언론을 통해 알려진 뒤 경찰 고위층이 강한 불쾌감을 드러내자 곧바로 태도를 바꿨다. 일대의 모든 CCTV 화면을 조사하는 것으로 수사 방향을 튼 것. 경찰 스스로 ‘무원칙’ ‘무소신’의 전형임을 만천하에 드러낸 어이없는 상황의 연속이 아닐 수 없다.

경찰은 문제의 3층 접견실에서 세면도구와 머리카락 등 디엔에이(DNA) 시료 96점을 확보하고, 국립과학수사연구소에 유전자 감식을 의뢰했다. 또 이 건물에 드나든 사람들을 파악하기 위해 출입문과 전화기, 술잔 등의 지문 감식도 뒤늦게 이뤄졌다.

그러나 이미 상당기간 시일이 지난 뒤에야 이뤄진 수색작업에서 ‘쓸만한’ 증거물이 얼마나 나올지는 미지수다.


#톱 여배우 L, S씨 경찰 조사 응할까

일본 도피 중인 김씨의 기획사에 소속됐다 유씨의 회사로 전격 이적한 톱 여배우 L씨와 S씨가 ‘장자연 사건’과 관련해 경찰 조사에 응할지가 새로운 관심사로 떠올랐다.

고인이 자살하기 전 이미 유씨로부터 ‘장자연 리스트’의 존재와 내용을 들어 알고 있었다는 주장이 잇달아 나오고 있는 가운데 고인의 대선배인 L씨와 S씨도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관련 내용을 언급해 귀추가 주목된다.

L씨는 최근 모 일간지와의 인터뷰에서 “유씨로부터 문건 내용을 듣고 드라마 PD A씨에게 ‘김씨를 혼내주라’고 부탁했다”고 밝혔다. 같은 소속사에서 활동하고 있는 인기 여배우 S씨 역시 지난달 27일 조선일보와의 통화에서 “문건 작성(2월 28일) 직후 유씨와 식사 자리에서 ‘장씨가 소속사 대표 김씨에게 당한 억울한 일을 적은 문건이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고 밝혔다.

신문은 “S씨가 (리스트와 관련해)구체적인 내용은 잘 모르지만 유씨와 함께 ‘김씨같이 나쁜 사람은 벌 받아야 하지 않느냐’는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고 보도했다.

두 톱스타는 모두 장씨와 같은 기획사에 있다 지난해 말 유씨가 차린 기획사로 이적했다. 이 과정에서 이들 모두 소속사 대표 김씨와 법정 분쟁에 휘말리는 등 심한 갈등을 빚었다. 유씨 본인도 김씨 회사에 근무하다가 김씨와의 불화 때문에 독립한 것으로 알려졌다.

S씨는 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이적을 앞두고 언니(L씨)가 유씨에게 전화를 걸어 ‘내 일만 봐 달라. 김씨가 안 건드리게 누나가 커버해주겠다’고 말했다”고 밝히기도 했다.

대중적 인지도가 높은 이들이 직접 경찰에 출두할 경우 파괴력은 엄청날 것으로 보인다. 특히 두 사람의 말 한마디로 연예계 전체에 파장을 미칠 수 있어 이들의 행보에 관심이 집중되고 있다.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