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현세 화백 모친 피살사건은…” 묵묵한 해결사의 추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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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선 사건현장에서 ‘곰’이라는 은어는 강력계 형사들을 뜻한다. 매일 범인이 나타날 만한 길목을 지켜 묵묵히 잠복하는 ‘미련 곰탱이’ 같은 일상을 빗댄 말이다. 2007년 용산경찰서 강력반장을 끝으로 현직에서 물러난 홍삼희 전 경감은 이를 ‘나쁜 놈에게 지고 싶지 않은 오기이자 근성’이라고 표현했다. 수사 과정에서 꾀를 부리는 것은 현역 시절 ‘홍 반장’에게 수치였다. 그는 “형사에게 있어 범죄자는 반드시 이겨야할 평생의 적이다. 지고 싶지 않다는 승부근성이 없다면 그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니다”고 힘주어 말했다. 서울시경과 일선 경찰서를 넘나들며 27년 간 전문 수사통으로 명성을 날린 홍삼희 전 경감. 현재 부동산 컨설팅 업체 CEO로 변신한 그를 서울 신사동 사옥에서 만났다. ‘근성의 추격자’ 홍삼희 전 경감이 들려주는 생생한 사건 현장 속으로 들어가 보자.

지난 1980년 경찰에 투신해 지구대 근무 3년을 제외하고 홍 전 경감은 24년 간 사건형사로 이름을 날렸다. 성동경찰서 강력계에서 본격적인 형사의 길을 걷기 시작한 그는 서울시경 형사과, 경찰청 특수수사과, 서울지방경찰청 광역수사대를 거쳐 성동경찰서 강력반장, 용산경찰서 강력반장 등을 역임한 뒤 지난 2007년 은퇴했다.

홍 전 경감은 84년 서울 황학동 다방레지 피살 사건과 86년 J은행 현금탈취사건, 98년 이현세 화백 모친 피살 사건 등 굵직한 강력계 이슈를 몸소 해결한 장본인이다.


‘풍만한 가슴에 긴 생머리 여인을 아십니까’

매달 평균 20건 이상의 사건을 해결하고 1500명이 넘는 범죄꾼을 감옥에 보낸 그이지만 형사 초년병 시절 처음으로 접한 살인 사건은 결코 잊을 수 없다. 일명 ‘황학동 다방레지 살인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1984년 7월로 기억합니다. 성동경찰서 강력반 신출내기 시절이었죠. 서울 황학동 C여관에서 여자 변사체가 발견됐다는 신고가 접수됐습니다. 형사로서 처음 맞는 살인사건이었죠.”

허름한 여관 2층에 올라서자 훅 끼치는 기괴한 냄새가 시체 썩는 내라는 걸 직감적으로 깨달은 젊은 홍 형사. 감식반과 함께 방안에 들어서자마자 그는 진동하는 악취에 숨이 막혔다. 겨울 이불이 차곡차곡 포개진 커다란 벽장 안에 시커멓게 썩어가는 여인의 목과 팔이 이불 사이로 흉물스럽게 삐져나와있었다. 지독한 냄새의 원인이었다.

“범인이 시신을 이불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포개놓았더군요. 한 여름에 썩어가는 시체를 아무도 만지려하지 않아 결국 제가 안아서 방바닥에 누였지요. 시신을 수습하고 보니 글래머 체형의 늘씬한 아가씨더군요.”

여인의 목엔 피해자의 것으로 보이는 스타킹이 질끈 동여매져 있었다. 명백한 교살이었다. 시신과 함께 방안에서 서울 마장동 주소가 박힌 자영업자 명함 한 장이 발견됐다. 국과수 부검 결과 피해자는 발견된 지 일주일 전 사망한 것으로 드러났다.

한 여름 허름한 여관방 벽장 속에서 발견된 목 졸린 여인. 그녀는 어째서 이토록 기구한 운명을 맞이한 걸까. 홍 전 경감의 말을 계속 들어보자.

“살인사건이 터지면 피해자 신원을 밝히는 게 제일 첫 작업인데 여기서부터 문제가 생겼습니다. 지문조회를 했는데 무적자로 나오는 겁니다. 주민등록이 말소된 게 아니라 아예 출생신고가 안 된 상태였다는 말이죠.”

용의자는커녕 피해자 이름 석자조차 오리무중인 상태에서 수사팀이 할 수 있는 선택은 많지 않았다. 무작정 시신이 발견된 여관 인근부터 피해자의 연고지로 추정되는 곳을 샅샅이 탐문하는 수밖에 없었다.

“시신이 알몸뚱이로 발견됐지만 생전 모습을 유추하는 과정에서 몇 가지 단서를 얻을 수 있었습니다. 짙은 매니큐어를 바른 손톱이 제일 먼저 눈에 띄더군요. 그때만 해도 손톱손질을 받는 여성들이 많지 않았죠. 수사팀은 피해자가 화류계 출신일 가능성이 높다는 판단을 내렸습니다.”

‘160cm 키에 풍만한 가슴을 가진 긴 생머리 여인’을 수소문하며 황학동 인근 사창가와 티켓다방을 속속들이 들쑤셨지만 피해자를 안다는 사람은 나타나지 않았다. 수사가 답보상태에 빠질 즈음 황 전 경감은 주머니 속에 들어있던 낯선 명함 한 장을 기억해냈다.

시신과 함께 발견된 명함의 주인은 이미 수사 초기 접촉했지만 피해자와의 연관성을 찾지 못한 상태였다. 그러나 홍 전 경감은 그 명함을 차마 버리지 못했었다. 죽은 여인이 이유 없이 남의 이름표를 갖고 있을 리 없다고 생각한 그는 동료들을 설득했다.

곧 수사팀의 탐문 범위는 마장동까지 넓어졌다. 며칠 뒤 홍 전 경감은 사건해결에 있어 결정적인 실마리를 쥘 수 있었다.

“한 여름에 마장동을 이 잡듯 뒤지다 잠시 쉴 요량으로 근처 ‘폭포수 다방’(가칭)에 동료들과 들어갔죠. 다방 주인이 ‘홍 마담’이라는 여자였는데 이야기를 나누다가 우리가 경찰이고 사람을 찾는다는 걸 밝혔습니다.”

같은 성씨의 다방 마담과 말을 섞던 중 홍 전 경감은 죽은 여인의 인상착의를 댔다. 그러자 ‘홍 마담’은 곧장 얼굴에 화색을 띠며 형사들에게 대꾸했다. “아, 우리 미스 김 찾으시는구나!”

막 피해자가 숨졌다는 말을 하려던 홍 전 경감과 동료 형사는 곧 이어지는 홍 마담의 한마디에 소름이 쭉 끼쳤다.

“그 계집애가 며칠 전에 갑자기 그만두면서 월급을 절반만 받아갔거든. 근데 어제 미스 김 ‘삼촌’이라는 사람이 전화해서는 ‘미스 김이 아파서 대신 나머지 돈 받으러 오겠다’고 하던데. 그 애한테 무슨 일 있어요?”


끝내 찾지 못한 살인범의 자녀

홍 전 경감은 말없이 품안에 넣고 다니던 피해자의 사진을 꺼내 홍 마담에게 보였다. 부검실에 누워있는 ‘미스 김’의 푸르죽죽한 얼굴에 마담은 비명을 질러댔다. 마침내 죽은 여인의 정체가 폭포수 다방 레지 ‘미스 김’이라는 사실이 확인된 것이다. 그리고 자신을 ‘미스 김의 삼촌’이라고 밝힌 정체모를 사내가 살인사건의 진범일 가능성이 높았다.

홍 마담에게 ‘이틀 뒤 오겠다’고 약속한 용의자는 꼬박 1주일 만에 모습을 드러냈다. 180cm가 넘는 키에 떡 벌어진 어깨 등 전형적인 ‘건달’ 풍모를 가진 30대 후반의 남성이었다.

“딱 보기에도 힘깨나 쓸 것 같은 인상이기에 제일 덩치가 좋은 형사들 3명이 동시에 달려들었죠. 그런데 경찰 신분을 밝히자마자 용의자가 먼저 빈손을 앞으로 내밀고 고개를 숙이더군요.”

검거된 용의자 김모(당시 38세)씨는 숨진 미스 김 사이에 두 아이까지 낳은 동거남이었다. 김씨가 홍 전 경감에게 털어놓은 사건의 전모는 비극적이었다.

“김씨 집은 원래 개성에서 잘 나가는 부자였다더군요. 그러다 1·4후퇴 때 가세가 기울어 노모와 누나를 데리고 부산에 정착했답니다. 그가 20대 청년이던 어느 날 부산역 근처를 지나다 10살 정도 된 여자애를 만났다는군요. 그게 바로 살해된 ‘미스 김’이었습니다.”

숨진 여인의 이름은 김숙자(가명·당시 26세). 그녀는 어릴 적 부산역에 버려진 뒤 김씨 집에서 식모살이를 시작했다. 8년 뒤 숙자가 어엿한 처녀로 성장하자 김씨는 그녀를 데리고 인천으로 상경했다. 숙자가 김씨의 아이를 임신하면서 둘은 사실혼 관계를 유지했다.

그러나 김씨는 지역 건달노릇을 하며 방탕한 삶을 보냈고 숙자와 두 아이를 방치했다. 숙자의 기구한 사연을 전하며 홍 전 경감은 안타까운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순진하던 숙자가 다방레지를 전전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가 바로 김씨 때문이었습니다. 혼자 아이 둘을 건사하려니 어쩔 수 없이 화류계에 몸을 담게 됐는데 뛰어난 외모 덕분에 주위에 남자들이 넘쳐나게 된 거죠.”

남편의 무관심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숙자는 결국 두 아이를 서울 남영역 부근에 버리고 접대부로 타락하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뒤 자신의 핏줄을 숙자가 떼어놓았다는데 격분한 김씨가 서울까지 숙자를 쫓아오면서 비극은 절정에 달했다.

“사실 처음부터 피해자를 죽일 생각은 없었답니다. ‘내 새끼만 어디 있는지 말하면 살려주겠다’고 했는데 여인이 억하심정에 끝까지 대든 거죠.”

순순히 자신의 죄를 인정한 김씨는 법원에서 징역 15년을 선고받은 뒤 몇 해 전 출소한 것으로 알려졌다. 홍 전 경감에 따르면 김씨는 감옥에 있는 동안에도 잃어버린 자식을 찾기 위해 수소문 했다고 한다. 그러나 끝내 두 아이는 생사여부조차 확인되지 않았다.


이현세 화백 모친 도륙한 10대 떼강도 ‘엽기 범행 일지’

강력계 중견 형사로 경험을 쌓은 홍 전 경감은 90년대 중반 강력반장으로 일선 형사들을 지휘하기 시작했다. 당시 부임하는 경찰서마다 ‘강력계 간판’으로 불리며 최상의 검거율을 자랑하던 홍 전 경감에게 어느 날 유명인사가 관계된 살인사건이 접수됐다.

1998년 4월 서울 송파구 2층 단독주택에서 한 노파가 회칼에 찔려 사망했다. 숨진 노인은 바로 ‘공포의 외인구단’을 탄생시킨 이현세 화백의 모친이었다. 유명 만화가의 어머니가 참혹하게 살해된 최악의 사건. 당시 대부분의 언론이 대서특필했고 현재까지 회자되고 있는 ‘송파 7인조 떼강도 사건’이 바로 그것이다.

“당시 관할 지역에서 유사한 떼강도 사건이 종종 벌어졌지만 실제 사람이 죽은 건 처음이었습니다. 현장을 확인하니 범인들이 우발적으로 노인을 살해하고 급히 도망친 정황이 보이더군요.”

이 화백 가족들에 따르면 사건이 벌어진 날 늦은 새벽 7~8명의 젊은 남자들이 집안에 침입했다. 괴한들 중 3명이 먼저 1층에 잠들어 있던 이 화백의 모친과 이모를 나일론 끈으로 묶어 제압했다. 또 나머지 일당은 2층에 머물고 있는 이 화백과 이 화백의 아내, 딸을 끌어내 거실에 내동댕이쳤다.

“이 놈들 범행 수법이 그야말로 파렴치했습니다. 침입한 집에서 실컷 물건을 훔친 다음 피해자 가운데 부녀자만 골라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집단 강간을 저지른 뒤 내빼는 식이었죠. 그런데 이 화백 집에서는 범인들조차 생각지 못한 돌발 상황이 벌어졌습니다.”

2층에 있던 강도들이 막 이 화백의 가족을 욕보이려는 순간, 엄청난 비명소리와 함께 1층에 있던 일당 중 한 명이 피투성이가 돼 2층으로 뛰어올라왔다. 그는 격렬하게 반항하던 이 화백 모친을 엉겁결에 찔러 살해하자 겁에 질려 버린 것이다.

결국 떼강도들은 훔친 물건을 모두 팽개치고 서둘러 현장에서 도망쳤다. 아들, 며느리, 손녀에게 혹시라도 해가 갈까 홀몸으로 강도의 칼날에 맞선 어머니의 희생이었다. 노모의 죽음은 헛되지 않았다.

살인사건으로 비화된 떼강도단을 소탕하기 위해 당시 수서경찰서 강력반 인원이 총출동했고 결국 고등학교를 중퇴한 청소년 10여명이 살인·강도 혐의로 쇠고랑을 찼다. 경찰 수사결과 80회가 넘는 일당의 여죄가 추가로 드러났다.

‘가장 힘들게 해결한 사건을 꼽아달라’는 기자의 질문에 홍 전 경감은 “어떤 사건도 쉽게 잡히는 범죄자는 없다”며 웃었다. ‘근성의 추격자’라는 닉네임이 아깝지 않은 대한민국 수사반장 홍삼희. 그는 “포기하지 않는 끈질김이 유능한 형사의 제1조건”이라고 덧붙였다.

더 큰 성공을 위해 일찍 현직을 떠난 것이 못내 아쉽다는 토로를 끝으로 인터뷰를 마친 그의 얼굴 표정은 아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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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삼희 전 경감

부동산 컨설팅 업체 CEO로 변신한 홍 전 경감은 사업가로 제2의 인생을 시작했다. 스스로 남부럽지 않은 성공을 이루고 싶다는 욕심을 밝히기도 한 그는 ‘범죄꾼과의 머리싸움에 시달리던 과거보다 한결 편하다’며 호탕하게 웃었다

- 동료들에 비해 은퇴시기가 빠르다. 스스로 수사경찰을 그만둔 이유가 뭔가.
▶ 일선 경찰로 투신해 27년을 전문 수사관으로 살았다. 그런데 문득 내가 속한 조직 안에서 이룰 수 있는 비전에 한계가 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나는 개인적으로 욕심이 많은 사람이다. 내 가족들을 위해서라도 더 나은 선택을 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오랜 일터를 떠나며 미련은 컸지만 오랜 형사생활 경험을 밑천으로 하면 성공 못 할 일도 없다고 믿었다.

- 인터뷰 내내 ‘근성 있는 형사’라는 표현을 많이 썼다. 후배들에게 강조하고 싶은 덕목이기도 한가.
▶ 그렇다. 근성, 오기가 없는 형사는 더 이상 형사가 아니다. 요즘 젊은 후배들은 편한 수사방식에 익숙해져 있다. 휴대폰 위치 추적 등 첨단 수사기술이 과거 발품으로 때워야 할 때보다 비약적으로 발전한 건 맞다. 그런데 문제는 형사들의 평소 생활 태도조차 안일해졌다는 것이다. 과거 나와 내 선배들은 관할 지역 내에 벌어졌던 사건과 용의자들에 대해 끊임없이 자료를 수집하고 분석했다. 그런데 후배들은 사건이 벌어지면 그때서야 수사를 한다고 나선다. 범인 검거율이 과거보다 떨어지는 것도 이런 태도 때문이다.

- 일선에서 강력계 등 수사파트는 일손을 구하지 못해 어려움이 많다.
▶ 상당수 후배들은 스스로를 형사라고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 마치 때 되면 월급 받는 공무원처럼 편한 것만 찾는다. 또 과거 선배들이 지켜왔던 수사의 기본 원칙, 방식들을 전혀 배우려하지 않는다. 유능한 수사관이 가진 노하우를 인정하지 않는 분위기가 아쉽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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