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굴 없는 범인’에 당한 희생자 4人, 편지 한 통에 恨 풀었다
이모(43)씨 등 일당 2명은 5년 전 서울 석촌동 한 전당포에 침입했다. 이들은 물건을 훔치다 주인에게 발각되자 흉기를 휘둘러 그를 살해했다. 또 현장을 목격한 이웃 비디오방 종업원 역시 잔인하게 난도질해 숨지게 했다. 얼마 뒤 이씨 일당은 경찰에 꼬리를 잡혔고 대법원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그러나 최근 두 사람 손에 목숨을 잃은 피해자가 2명 뿐 만이 아니라는 사실이 새롭게 드러났다. 이들은 ‘석촌동 살인사건’을 저지르기 전 모두 3건의 범행을 저질러 4명의 생명을 잔인하게 빼앗았던 것이다. 이들이 앞서 저지른 살인사건들은 모두 미제로 남아 있었다.
3번 더 털고 4명 더 죽였다
서울지방경찰청 마약수사대는 2004년 12월 ‘석촌동 살인사건’을 저지른 이씨 일당이 3건의 추가 범행을 통해 4명을 추가로 살해했다는 사실을 밝혀냈다. 경찰 조사결과 이씨는 지난 2004년 10월 공범인 또다른 이씨(63)의 집에 가던 중 송파구 방이동의 한 빌라에 침입했다.
자신을 ‘가스 검침원’이라고 속여 집주인을 안심시킨 이씨는 한순간 강도로 돌변했고 집에 있던 김모(56·여)씨 등 50대 주부 2명을 품고 있던 칼로 찔렀다. 두 여인은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고 말았다. 이씨는 범행 당시 필로폰을 투약한 상태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빌라에서 훔친 현금카드로 50만원을 인출한 사실 역시 인정한 그는 “두 여성이 갑자기 나를 공격하는 것 같은 환상을 보고 나도 모르게 칼을 휘둘렀다”고 진술했다.
일당은 2004년 1월에도 강도짓을 저질렀다. 강남구 논현동 길가에 주차된 차를 부수고 물건을 훔치던 이씨 일당은 차 주인에게 들키자 칼을 휘두른 뒤 도망쳤다. 공격을 받은 차 주인은 다행히 팔에만 상처를 입었을 뿐 목숨을 건졌다.
범행 한 달 만인 같은 해 2월에는 노원구 월계동의 한 이비인후과 병원에 침입해 의사를 흉기로 위협하고 현금 20만원을 빼앗아 달아나기도 했다.
이씨의 공범이자 60대 노인인 또 다른 이씨 역시 2명의 무고한 생명을 빼앗은 연쇄살인범으로 드러났다. 그는 2001년 2월 전북 익산에 있는 서점에 들어가 점원을 죽였다. 또 1995년에는 필로폰을 투약한 상태로 차를 몰다 사람을 치어 살해하기도 했다. 이씨는 피해자의 시신을 외딴 곳에 옮겨 유기한 것으로 밝혀졌다.
재조사에 10개월 소요
43세 이씨가 저지른 방이동 빌라 살인사건은 최근까지 미제 상태였다. 용의자가 숨진 피해자의 현금카드를 이용해 돈을 뽑는 장면이 CCTV에 촬영됐지만 모자와 두꺼운 마스크로 얼굴을 가린 탓에 수사가 답보 상태에 빠질 수밖에 없었던 것.
하지만 사건은 범인 이씨가 직접 쓴 안부편지 한 통 때문에 만천하에 드러나게 됐다. 이씨가 보낸 편지가 편지를 받은 일당과 한 방을 쓰는 또 다른 재소자 눈에 띤 게 최대의 실수였던 것.
문제의 편지에는 “2004년 방이동 빌라에 들어가 주부 2명을 흉기로 찔러 죽였다. 피해자 모습이 떠올라 괴롭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이 같은 내용을 확인한 동료 재소자는 곧장 교도소 측에 이 같은 사실을 알렸고 곧 재수사가 시작됐다.
경찰은 편지를 보낸 이씨를 조사하는 한편, 부검기록과 사건기록을 꼼꼼히 다시 살피면서 이씨의 진술과 면밀히 대조했다. 그러나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데는 꼬박 10개월이라는 시간이 필요했다.
그동안 경찰은 5년 전 살인사건이 벌어진 방이동 주변을 탐문수사하고 당시 조사를 받았던 참고인들을 모조리 다시 불러 진실 찾기에 열을 올렸다. 마침내 경찰은 이씨의 진술 가운데 상당부분이 실제 범행 상황과 정확히 맞아떨어진다는 결론을 얻게 됐다.
이씨는 범인이 아니라면 결코 알 수 없는 사건현장의 세세한 부분을 지적했고 최근 현장검증에서도 범행 과정을 덤덤하게 재연해냈다. 공범인 63세 이씨의 또 다른 살인 혐의도 비슷한 과정을 통해 진실로 드러났다.
경찰 관계자는 “두 사람은 20여년 이상 마약거래를 하며 친해진 사이로 범행을 실행하면서도 약물에 취해있었다”며 “환각 상태라 죄의식 없이 잔인한 범행이 가능했던 것 같다”고 전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이수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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