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10시간, 형사의 ‘데드라인’을 말한다

94년 지존파 일망타진 직후격려 방문한 김영삼 당시 대통령이 고병천 경정(당시 경위)과 악수를 나누는 모습(위) 검거된 '지존파' 조직원들이 언론 앞에서 심경을 밝히느 모습.

“저기...저기에요.” 덜덜 떨리는 손끝으로 여인은 차창 밖을 가리켰다. 동트기 전 을씨년스런 시골길 저편에 덩그러니 놓인 시멘트 건물은 빛바랜 분홍색이었다. 지난 열흘간의 악몽이 떠오르는지 여인의 흙빛 얼굴은 고통으로 일그러져있었다. 밤새 차를 몰아 전남 영광의 한적한 마을로 내달린 서울 서초경찰서 강력계 고병천 반장은 묵묵히 여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납치와 집단강간, 연쇄살인에 식인행위까지 벌어진 ‘악마의 공장’ 앞에서 고 반장은 숨소리조차 죽인 채 날카로운 눈빛을 빛냈다. 얼마나 지났을까. 1994년 9월 19일 아침 7시 반 경 , 둔중한 철문이 열리고 낡은 트럭 한대가 빠져나왔다. ‘폭탄이 있어요… 발각되면 경찰과 함께 자폭하겠다고 했어요.’ 최대한 녀석이 은신처와 멀리 떨어졌을 때 덮쳐야 한다. 겁에 질린 여인의 귀띔과 머리 속 계획을 곱씹으며 고 반장은 직접 추격조를 이끌었다. 마을 어귀로 들어가던 트럭을 뒤쫓던 중, 급발진 굉음이 고 반장의 귓가를 찢었다. “눈치 챘다. 무조건 쫓아!” 거친 시골길을 필사적으로 달리는 트럭을 어떻게 세울까. 어금니를 꽉 깨문 고 반장의 입에서 마침내 명령이 떨어졌다. “받아버려!” 쏜살같이 앞으로 치고 나간 추격자의 차가 문제의 트럭 옆구리를 장렬히 들이받았다. 육중한 트럭은 곧장 길 한 구석에 처박혔다. 순간적인 침묵도 잠시. 고 반장 팀이 미처 방어태세를 갖추기도 전에 악에 받힌 사내가 달려들었다. 베테랑 강력계 형사 6명과 목숨을 건 육탄전을 벌인 사내의 이름은 강동은(당시 21세). 일당 중 ‘행동대장’격으로 가장 사납고 잔인한 인물이었다. 동시에 나머지 ‘지존파’를 끌어내기 위한 훌륭한 미끼였다.

한국의 연쇄살인을 논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살인집단. 바로 지존파다. 평균나이 22세, “더 못 죽인 게 한이다”고 일갈하며 TV중계 카메라를 노려보던 새파란 청년들은 1990년대 전국을 경악으로 물들였다.

이들의 광기어린 범죄행각을 막은 고병천(60) 경정에게는 ‘지존파를 일망타진한 베테랑 형사’라는 수식어가 꼬리표처럼 따라붙었다. 다이너마이트와 총기까지 동원한 살인집단을 기막힌 유인술로 전원 검거한 고 경정의 지략은 역대 ‘최고의 검거작전’으로 꼽힌다.

1976년 경기도 수원지역 파출소 순경으로 입문, 1년 만에 수원경찰서 강력계 형사로 발탁된 그는 만 33년의 화려한 활약을 뒤로하고 지난 6월 말 은퇴했다.

수원서 강력계를 시작으로 서울 서초경찰서, 강남경찰서 강력반장을 거쳐 송파경찰서 형사과장을 역임했다. 30여 년 동안 명수사관으로 유명세를 떨쳤음에도 그는 여전히 ‘사건에 목마른’ 형사다.

“아직 경찰을 떠날 때라는 생각이 안 든다”며 아쉬움을 드러내는 그를 만난 곳은 공교롭게도 병원 입원실. 허리 디스크 후유증으로 지난 5월 입원한 고 경정은 6개월째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 머물고 있다.

입원이 길어진 탓에 본인의 은퇴식도 가지 못했다. 섭섭하지 않았을까. 기자의 물음에 고 경정은 “오히려 잘됐다”며 웃는다. 덕분에 퇴임이 미뤄진 듯해 아쉬운 마음이 덜하다는 것이다.


‘지존파가 짝사랑한’ 그녀와의 인연

고 경정에게 있어 94년 ‘지존파 사건’은 인생 한 페이지를 가득 채운 클라이맥스, 그 자체다. 그 페이지엔 성취감과 자부심, 연민과 안타까움 등 복잡한 감정이 뒤범벅 돼 있다.

지존파의 이름을 조심스럽게 언급하자 고 경정은 “엊그제 특별한 손님이 찾아왔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바로 그에게 지존파의 존재를 처음 제보한 이모(당시 27세)여인이었다. 그는 서초서 강력반장 시절 고 경정의 단골 카페 종업원이었고, 지존파에게 인생을 짓밟힌 피해자다.

“지금은 마흔을 훌쩍 넘긴 중년 부인이 됐지요. 입원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문병을 왔더군요. 참 맑고 순수한 아가씨였는데 그 사건 이후로 삶이 완전히 달라졌습니다. 볼 때마다 안타깝지요.”

이 여인은 지존파 일당에게 납치돼 잔인하게 유린당했고 열흘 이상 그들의 아지트에 감금됐었다. 함께 납치한 동료 이모(당시 34세)씨를 이튿날 곧바로 살해한 지존파는 유독 이 여인만은 지루하게 물고 늘어졌다.

그들은 ‘죽기 싫으면 우리와 공범이 되라’며 이 여인 스스로 동료 이씨의 목을 조르게 했다. 또 시신을 승용차에 태워 낭떠러지 아래로 굴리는 과정에도 동행시켰다. 철저히 그의 발목을 잡기 위한 술수였던 것. 물론 여기엔 이유가 있었다.

“일당 중 김현양(당시 22세·상해전과1범)이 그녀를 짝사랑했다는 게 나중에 밝혀졌습니다. 사실 지존파는 납치한 남녀를 모두 죽일 생각이었지요. 그런데 연심을 품은 김현양이 여자를 살려두고 차라리 공범으로 만들자고 동료들을 설득했습니다. 제 딴엔 마음에 둔 여인을 살리고 싶었겠죠.”


현금 50만원, 휴대폰까지 맡겨

지존파의 네 번째 행동강령은 ‘여자는 어머니도 믿지 말자’였다. 그런 지존파가 ‘여자’로 내분에 휘말린 것은 아이러니다.

“결국 ‘살리자’는 김현양과 ‘죽이자’는 강동은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졌답니다. 싸우다 큰 부상을 입은 김은 상처가 심해 읍내 병원에서 치료를 받아야했죠. 그는 ‘신참을 감시한다’는 핑계로 이 여인을 데려갔습니다. 혹여 자기가 없을 때 해코지를 당할까 걱정스러웠던 모양입니다.”

김은 이 여인에게 ‘치료비를 계산하라’며 현금 50만원과 휴대전화까지 맡겼다. 그가 이 여인을 탈출시키려 일부러 허점을 보였는지 여부는 알 길이 없다. 다만 결과적으로 5살 연하 납치범의 ‘난감한 배려’ 덕분에 이 여인이 지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것만은 확실하다.

김이 치료실에 들어간 사이 이 여인은 택시를 4번이나 갈아타며 서울 역삼동으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평소 친분이 있던 고 경정을 찾아가 지존파의 악마 같은 만행을 폭로했다.

“개인적으로 엄청난 사건을 제보해준 그녀가 고마우면서도 여태껏 그때 악몽을 못 잊는 모습을 보면 마음이 아픕니다. 모 언론매체가 그녀의 행적을 추적 보도하는 바람에 남편이 그때 일을 알아버렸어요. 모두 잊고 결혼해 잘 살고 있었는데, 하루아침에 가정이 풍비박산 직전에 몰렸답니다.”

씁쓸한 표정의 고 경정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지존파 조직원들에 대해서도 진한 연민을 드러냈다.

독실한 가톨릭 신자인 고 경정을 따라 김현양과 문상록(당시 23세)은 정식으로 천주교 영세를 받았다. 고 경정은 기꺼이 이들의 대부(代父)가 돼줬다. 무서운 범행에 비해 ‘무식하리만치 순수했던’ 이들은 검거된 지 1년 만에 사형대로 향했다.

고 경정의 아내는 가족에게조차 버림받은 이들 시신을 수습해 천주교인 묘지에 안장시켰다. 남편이 지존파에게 보내는 ‘마지막 연민’을 대신한 것이다.

사회가 버린 지존파를 마지막까지 감싸 안은 고 경정은 이렇게 말했다.

“범인과 형사가 처음에는 적으로 만나도 마지막까지 악연이 되는 경우는 없습니다. 30년 넘게 강력 사건을 다루면서 피치 못 할 사연을 가진 용의자들을 수도 없이 만났죠. 수사는 냉정해야하지만 도저히 미워할 수 없는 범인들도 상당히 많습니다.”

그는 불쑥 15년 전 벌어진 살인사건 이야기를 꺼냈다. 지존파가 검거된 지 몇 달 지나지 않았을 때였다. 5살 난 아들과 산책 중이던 젊은 가장이 날카로운 흉기에 십여 번 이상 찔려 살해당했다. 어린 아들은 아버지가 난자당하는 모습을 꼼짝없이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절세미녀 용의자, 알고 보니 성전환자”

현장에는 피해자의 선혈만 낭자할 뿐 목격자는 물론 범인의 흔적도 전혀 남아있지 않았다.

“보통 사건이 터진 지 열흘 안에 범인이 안 잡히면 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는 말 자주하죠? 형사들에게는 딱 10시간 주어집니다. 이 안에 감 못 잡으면 그 사건은 서랍(미제사건파일)에 처박히게 되죠.”

한창 절정의 수사 감각을 뽐냈던 고 경정은 현장을 둘러본 순간 ‘감’이 왔다. 가까운 지인, 혹은 인척에 의한 원한범죄일 것이다. 그길로 피해자 주변을 탐문한 고 경정은 숨진 피해자의 남동생을 용의자로 지목했다. 경찰서로 그를 불러들인 고 경정, 그런데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호적상으로는 남동생인데 눈앞에 절세미녀가 서있는 겁니다. 알고보니 그는 트랜스젠더(성전환자)였어요.”

새하얀 피부에 호수 같은 검은 눈. 호리호리한 몸매는 영락없는 여성이었다. ‘그녀’는 서울 모처에서 제법 유명한 무당이었다. 그를 취조실에 마주 앉힌 고 경정은 다짜고짜 물었다. ‘도대체 왜 죽였어?’

“죽였냐, 안 죽였냐 묻지 않고 덮어놓고 ‘왜 죽였냐’고 물었습니다. 처음에는 아니라고, 모른다고 손사래를 치죠. 용의자와 벌이는 일종의 심리전인 셈인데 대부분의 진범들이 비슷한 유도질문에 넘어옵니다.”

지루한 줄다리기는 정확히 8시간 만에 끝났다. 죄책감과 불안에 떨던 미녀는 굵은 눈물을 떨어트리며 고 경정의 팔에 매달렸다. “오라버니, 저 좀 살려주세요…!”

“일단 자백을 받고 추가조사를 해보니 미처 몰랐던 사실들이 튀어나오더군요. 오히려 숨진 피해자가 천하의 패륜아였던 겁니다. 지나친 표현이지만 ‘죽을 놈이 죽었구나’ 싶을 정도였지요. 홀어머니 밑에서 형제가 어렵게 자랐는데 학창시절부터 어머니와 동생을 심하게 학대했답니다.”

전직 권투선수였던 피해자는 수시로 노모와 동생을 폭행하고 생활비를 뜯어가기 일쑤였다. 동생은 절연을 선언했지만 형은 그를 놓아주지 않았다. 매일같이 법당에 찾아와 물건을 때려 부수고 하루 수입을 싹쓸이해갔다. 무엇보다 늙은 어머니까지 박대하는 것에 더이상 참을 수 없었다.

“참다못해 신어머니(무당에게 신 내림을 해주는 선배무속인)를 찾아가 사정을 하소연했답니다. 문제는 신어머니가 평소 알던 건달들에게 ‘손 좀 봐주라’고 사주했다는 거지요.”

건달들의 습격을 받은 피해자도 만만치 않았다. 권투선수 출신이기에 상당히 주먹이 매웠던 그는 괴한들에 맞섰고 난투극이 벌어졌다. 결국 분을 못이긴 건달이 칼을 빼들었고 청부폭력은 청부살인으로 막을 내렸다.

“사정이 너무 딱해 사건을 담당한 검사를 직접 찾아가 읍소했습니다. 노모를 부양한 것도 5살 난 피해자의 아들을 돌본 사람도 그였기 때문이죠. 검사에게 사건 기록과 진술서, 용의자 지인들이 낸 탄원서까지 싹 모아 제출하고 기다렸습니다.”

그 결과 미모의 용의자는 집행유예를 선고받고 다시 가족을 돌볼 수 있게 됐다. 혈육을 해친 흉악범이라는 껍데기 보다 내면의 고통을 들여다본 재판부의 선택이었다.

한편 후배들은 고 경정을 ‘뜨거운 가슴을 가진’ 선배로 기억한다. 또 발과 머리, 육감의 수사 3박자를 고루 갖춘 실력파로 평가한다.

“앞으로 만날 모든 행사를 은퇴식으로 여기겠다”며 여전한 수사 의지를 불태우고 있는 고병천 경정. 그의 빠른 쾌유를 빈다.



#식품영양학 전공, 2007년 수필집 ‘어느 난쟁이의 우측통행’ 발표

리얼스토리 talk box 고병천 경정

유도 4단, 합기도 3단, 검도 초단 등 종합무술 8단의 유단자. 일생동안 최악의 범죄와 맞선 베테랑 강력계 형사. 그럼에도 고병천 경정은 눈에 띄게 부드러운 감성의 소유자다. 식품영양학 전공자로 영양사 자격증까지 딴 그는 학창시절 소문난 ‘문학소년’이었다. 2007년 발간한 그의 수필집 ‘어느 난쟁이의 우측통행’에는 ‘폴리스 스테이션, 경찰서는 정거장이다’는 구절이 있다. 독특한 발상과 섬세한 감성은 그를 ‘명수사관’ 반열에 올린 비결이 아닐까.

- 영양사 자격증을 가진 형사라는 점이 이색적이다.
▶ 영양사와 형사는 굉장한 공통점이 있다. 영양사는 수많은 식재료 가운데 영양가 있는 것만 골라내는 선수이고, 형사는 사건에서 결정적인 증거를 뽑아내는 데 선수다. 당시 남자영양사는 극히 드물었는데 관심이 생겨 전공했다. 그런데 막상 평생직업으로 삼기엔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꼈다. 그래서 제대 후 파출소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하게 됐다.

- ‘지존파’이름을 직접 지었다고 들었다.
▶ 맞다. 원래 지존파의 이름은 ‘마스칸’이었다. 히랍어로 ‘야망’이라는 뜻이었는데 이를 그대로 발표하기엔 무리가 있었다. 남의 목숨을 빼앗아 야망을 이루겠다는 생각 자체가 모순이기 때문이다. 당시 한창 무협지가 유행하던 시절이라 ‘무림지존’이라는 말에서 딴 ‘지존파’로 이름을 정했다. 지존파의 아류로 알려진 ‘막가파’ 역시 경찰이 붙인 이름이다. 실제 ‘막가파’ 일당들은 조직명이 없었다.

- 90년대 디자이너 앙드레 김 권총협박사건 범인을 만 하루 만에 붙잡아 화제가 되기도 했다. 당시 비결은 무엇이었나.
▶ 범인이 요구한 돈 가방에 위치 추적기를 붙였다. 당시 ‘추적기’라는 개념 자체가 없을 때라 상당히 획기적인 수사기법이었다. 경찰에 장비가 없어 급히 렌터카 회사에서 차에 붙이는 사제 추적기를 빌려왔다. 덕분에 추격을 따돌리고 숨은 범인을 곧바로 붙잡을 수 있었다.

- 스스로의 전성기는 언제였다고 생각하는지.
▶ 마흔 중반이 되니 ‘이 분야에서 나를 능가할 사람은 없다’는 자부심이 들었다. 남들이 뭐라 할지 모르지만 그때 형사로서의 내 감은 최고였다. 그 시절 만난 사건이 바로 지존파였다. 이후 굵직한 사건들이 줄줄이 내 앞으로 배당됐다. 지금 생각하면 정말 운이 좋았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