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방파(태촌파)·맘보파·양은이파… 조폭 계보는 내 작품”

2002년 양양 세모녀 살해사건 주범 김씨의 현상수배 전단. 김씨는 범행 8일 만인 2002년 1월 10일 자살한 시신으로 발견됐다.(좌) 사건 당시 수사보고서

‘빠른 놈 보다 질긴 놈이 이긴다.’

2002년 1월 10일 강원 속초경찰서 소속 정칠성 경감은 고민에 빠졌다. 새해벽두 세 모녀를 무참히 유린하고 살해한 범인 김경철(가명·당시 29세)이 경찰의 추적을 비웃기라도 하듯 범행 8일 만에 싸늘한 주검으로 발견된 것이다.

“범인도 자살한 마당에 더 나올게 있습니까? 이쯤해서 정리하시죠.” 고즈넉한 관광명소에서 벌어진 대량살인사건이 탐탁치 않은 듯 상부는 수사과장인 정 경감을 압박했다. 김과 함께 범행을 공모하고 현장을 지킨 유력한 공범이 있다 강변했지만 지휘부의 반응은 미적지근할 뿐이었다.

[…2002년 1월 3일 - 친구들과 밤새 술 마신 뒤 헤어짐. 1월 6일 - 지인들에게 한 턱 내겠다고 함.]

‘빠른 놈 위에 질긴 놈.’ 서울시경 형사과 출신으로 30년 간 지킨 신념이 계속 맴돌았다. 정 경감은 손에 쥔 첩보 내용을 꼼꼼히 숙지하고 마침내 결심을 굳혔다. 그의 지시에 따라 공범의 소재를 쫓던 후배형사들은 정 경감의 호출을 받고 모였다.

“인천으로 간다.”

짤막한 한마디에 10여명의 형사들은 일사분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미 용의자의 죽마고우를 정보원으로 포섭한 수사팀은 인천으로 향하는 내내 검거 의지를 불태웠다. 비명에 간 세 모녀의 마지막 원한을 풀기 위해 ‘거북이’는 달렸다.


국내 ‘조폭 계보’ 탄생기

1970~90년대 굵직한 사건현장을 누빈 형사들 사이에서 정칠성 경감(64)은 ‘브레인’ ‘작전참모’ 등으로 통한다. 민완형사들이 범인들과 육탄전을 벌이며 고된 하루를 보낸다면 정 경감은 철저한 자료 분석과 현장감식으로 수사 방향을 결정짓는 나침반 역할을 한 까닭이다.

1970년 서울남부경찰서 수사과 순경으로 입문한 뒤 74년 서울시경 형사과로 자리를 옮겨 15년 간 강력·폭력계를 섭렵한 정 경감은 91년 치안본부 조사과(일명 ‘사직동팀’)에서 5년 간 정보보고 담당으로 청와대에 출입했다.

95년 3월 친정인 서울시경으로 복귀한 그는 99년 경감 직위를 받은 뒤 강원도 속초경찰서 수사과장과 보안과장을 거쳐 지난 2002년 은퇴했다.

화려한 현역 시절을 보낸 정칠성 경감에게 있어 국내 폭력조직 ‘족보’나 다름없는 ‘조폭 계보’는 수개월에 걸친 노력과 뚝심의 결정체다. 당시 정 경감은 수개월 간 전국 일선서로부터 수집한 폭력배 관련 첩보 수만 건을 일일이 독파하며 오합지졸 산개한 깡패조직을 계파별로 묶는 대작업을 거쳤다. 이렇게 만들어진 것이 국내 조폭 계보의 효시인 것.

“지금 유명한 서방파, 맘보파, 양은이파 등의 조직이름을 제가 지었지요. 그때 관악산 인근 폭력계 사무실에 틀어박혀 작업을 했는데 수기, 타이핑 같은 단순 작업 빼고는 거의 혼자 도맡아야 했습니다. 전문 인력이 없었으니까. 일선 경찰서에서 모은 첩보만 해도 수만 건으로 서류 뭉치가 제 키만큼 쌓일 정도였습니다.”

대충 마무리 지을 거라면 시작도 하지 않는다는 그는 각 조직 계파의 주요인물(두목·회장급) 사진까지 구해 도표에 일일이 붙여 넣는 꼼꼼함을 보였다. 이 때문에 자료를 노린 경찰 동료들의 웃지 못 할 견제도 상당했다.

“일일이 녀석들의 주소지가 있는 동사무소를 돌며 주민등록기록을 열람했지요. 지금이야 다 전산으로 처리되지만 그때는 서류에 주민등록증 사진을 붙여 관리했습니다. 그래서 직접 카메라 둘러매고 돌아다니며 주민증 사진을 접사해 현상했죠.”

그런데 어느 날 아침 잠시 사무실을 비운 사이 사건이 벌어졌다. 누군가 계보에 붙여둔 조직 우두머리 사진을 뭉텅이로 떼어간 것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강력계 소속 중견 형사가 몰래 훔쳐 해당 조직원과 기자들에게 넘겼더군요. 덕분에 해당 형사는 조폭들 사이에서 ‘은인’으로 불리며 승승장구했답니다.”

억울한 사연이지만 과거사를 털어놓는 정 경감의 얼굴엔 웃음이 가시지 않았다. 처음부터 실적이나 공과를 염두에 두지 않은 탓이다.


“범인 죽으면 수사도 끝? 동의 못해”

다시 7년 전 강원도 양양으로 돌아가 보자. 정 경감은 자신의 33년 경찰 경력 가운데 기억에 남는 사건으로 기자에게 2건의 보고서를 공개했다. 지난 2000~ 2002년 강원도 양양과 속초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이었다.

30년 이상 서울시경과 주요 일선서 수사통을 경험한 그가 어째서 퇴임이 임박한 시기에 해결한 지방 사건을 건넸을까. 기자의 질문에 정 경감은 ‘내 경험이 가장 농익은 시기에 포기하지 않고 매달렸던 마지막 사건이기 때문’이라고 했다. 앞서 기자가 ‘거북이’라고 표현한 정 경감의 스타일을 오롯이 담은 일화라는 뜻이다.

그가 기자에게 건넨 첫 번째 기록은 지난 2002년 1월 2일 강원도 양양에서 벌어진 세 모녀 피살사건이다. 당시 공개수배 된 범인에게는 현상금 500만원이 걸려있었다.

“2002년 1월 2일 강원도 양양 감옥리의 한 주택에서 어머니와 두 딸이 참혹하게 살해됐습니다. 이 집에 딸이 셋 있었는데 유일하게 변을 피한 건 장녀뿐이었지요. 어머니는 흉기에 수차례 찔려 즉사했고, 대학교 2학년이었던 둘째 딸은 범인들에게 성폭행 당한 직후 역시 칼에 찔려 숨졌습니다. 고등학교 3학년 막내딸 역시 능욕을 당한 뒤 납치 돼 동해고속도로 인근에서 목이 졸려 살해됐습니다. 주범이 자살하는 바람에 상부에서는 사건을 그대로 종결하길 바랐습니다. 끝까지 우겨 공범까지 붙잡은 다음에야 사건의 진상이 드러났지요.”

2002년 신정 연휴가 채 끝나기도 전에 세 모녀가 한꺼번에 변을 당한 사건은 당시 언론 사회면을 뜨겁게 달궜었다. 기록에 따르면 모친 이모(당시 56세)여인과 과 둘째 딸 이모(당시 21세)양의 시신은 집 안방과 작은방에서 차례로 발견됐다. 막내딸 이모(당시 18세)양은 다음날 새벽 꽁꽁 얼어붙은 채 고속도로 다리 아래 처박힌 주검으로 수습됐다.

“신고가 접수된 직후 현장 감식부터 시작했습니다. 둘째딸이 숨진 작은방 벽에 피 묻은 지문이 발견된 것이 결정적이었지요.”

사건은 의외로 쉽게 풀리는 것 같았다. 숨진 모녀 주위를 탐문하다보니 딸이 셋인 이 집안에서 장녀가 유부남과 동거하다 최근 결별했다는 정보가 입수된 것이다.

경찰 탐문수사결과 피해자의 맏딸(당시 26세)은 2000년 10월 지인의 소개로 한 살 연상의 김경철을 만났다. 교제 3개월 만인 2001년 1월 동거를 시작한 두 사람은 그해 크리스마스이브에 결별했다. 김경철이 아내와 처자식까지 딸린 유부남이라는 사실이 드러난 탓이었다.


김, 변심한 연인 부모 죽이고 자매 강간

“연인이 떠난 직후 김경철은 극도의 분노를 터트렸습니다. 배신한 애인의 부모와 가족을 차례로 죽일 작정을 한 것이죠.”

애인이 결별과 함께 서울로 올라가 자취를 감추자 김경철은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 애인의 가족마저 자신을 피하자 앙심을 품은 김은 2001년 12월 30일 강릉시 한 여관에서 후배 공형민(가명·당시 19세)과 함께 살인을 공모하기 이른다. 두 사람은 공사장 막노동 현장에서 일하며 만난 사이였다.

“살인계획을 완벽하게 짠 두 사람의 행보는 거침없었습니다. 바로 다음날인 2001년 12월 31일 소나타 차량을 렌트한 일당은 강릉 터미널에 들러 낚시용 칼 2개와 야구방망이 2개 등 흉기를 사들인 뒤 피해자가 살고 있는 양양으로 향했지요.”

일당은 곧장 피해자를 습격하지 않았다. 시내에서 술을 마시고 제야의 종소리를 들은 두 사람은 충분히 휴식을 취한 2002년 1월 2일 새벽 거사를 실행에 옮겼다. 새벽 1시, 애인의 어머니가 운영하는 과일가게를 찾았다 허탕을 친 김경철 일당은 1시간 만에 피해자의 자택을 덮쳤다.

“현장에 도착하니 온통 피바다에 시신은 선혈 속에 잠겨있다시피 했습니다. 불과 1시간도 채 안 걸려 사람 셋이 죽어나간 셈이었지요.”

서울에 머물던 맏딸을 빼고 모친 이씨와 두 자매는 한 방에 누워 잠들어있었다. 뒷문을 따고 침입한 김경철은 다짜고짜 어머니 이씨의 등을 칼로 난자했다. 숨 먹힌 비명과 피가 낭자하자 잠이 달아난 두 딸이 눈을 떴다. 이어 방안에 난입한 공씨는 자매에게 이불을 뒤집어씌우고 야구방망이를 휘둘렀다.

어머니의 숨이 끊어진 것을 확인한 두 사람은 어린 두 딸에게 씻을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두 살 터울 자매를 알몸으로 만든 두 사람. 김씨는 옆방에서 둘째딸을, 공씨는 모친의 시신이 있는 안방에서 막내딸을 각각 성폭행한 것이다.

“김은 관계를 마치자마자 둘째딸을 칼로 수차례 찔러 살해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공은 막내딸에게 다른 옷을 꺼내 입힌 뒤 납치했지요.”

공씨는 막내딸 이양을 깨끗한 옷으로 갈아입힌 뒤 손발을 묶어 타고 온 차 트렁크에 감금했다. 주범 김씨는 도피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피해자의 집을 뒤졌지만 돈 될 만한 물건이 없자 포기하고 현장을 빠져나갔다. 어머니와 언니가 참혹하게 살해된 가운데 가까스로 목숨을 부지한 막내딸 이양. 그러나 이양의 행운은 오래가지 못했다.

참사가 벌어진지 2시간여 뒤인 새벽 5시 20분경 김씨는 트렁크에 감금된 이양을 꺼내 목을 졸랐고 가녀린 여고생은 고속도로 한 구석에서 싸늘하게 식어갔다.


예상 못한 범인의 자살

관광지로 명성 높은 강원도에서 하룻밤 사이 모녀 셋이 줄줄이 죽어나간 엽기적인 사건이 터지자 관할서는 발칵 뒤집혔다. 다행히 빨리 용의자를 특정한 덕에 공개수배를 지시하고 한숨을 내쉬던 찰나, 예상치 못한 변수가 정 경감의 뒤통수를 쳤다. 범행 8일 만인 2002년 1월 10일 오전 11시경 주범 김경철이 부산에서 변사체로 발견된 것. 자살이었다.

“유력한 주범이 죽어버리자 수사팀은 공황상태에 빠졌습니다. 상부에서는 범인이 죽었으니 이대로 사건을 종결하라며 암암리에 압력을 넣었고 후배들의 사기도 꺾였지요. 그런데 포기할 수 없었습니다.”

탐문결과 김경철이 어린 공범과 함께 범행을 저질렀다는 정보가 입수된 까닭이었다. 아무리 상대가 여인들이라 해도 혼자 3명을 살해하고 성폭행까지 저지르기는 어렵다는 것을, 시경출신 베테랑 형사 정 경감은 꿰뚫고 있었다.

수사결과 김경철이 범행 직전인 2001년 12월 31일 공형민을 만나 차를 렌트하고 술을 마셨다는 사실이 확인됐다. 또 두 사람이 양양에 함께 내려와 같은 PC방에 머물렀으며 사건 직후인 2002년 1월 3일 오후 일당이 서울 방배동의 또 다른 PC방에 나타났다는 목격자 진술도 확보했다. 주범 김경철이 죽은 이상 사건의 진실을 가려줄 사람은 공형민 뿐이었다.

“결국 독단적으로 후배 형사들과 함께 인천으로 내려갔습니다. 공형민이 인천 연안부두 인근에서 선원으로 일했다는 첩보가 확인됐으니까요.”

정 경감의 예상은 적중했다. 공씨는 범행 뒤 인천에 머물고 있었던 것. 더욱 놀라운 것은 공씨는 당초 그해 1월 11일 외항선에 올라 인천을 뜰 예정이었다. 그가 한국을 뜨기 불과 하루 전 정 경감이 이끄는 수사팀이 그를 붙잡은 것이다.

“저는 스스로를 ‘미련 곰탱이’라고 합니다. 서두르지 않지만 대강 마무리 짓는 걸 죄라고 여기니까 말입니다. 만약 윗선 말을 듣고 그대로 사건을 종결했다면, 혹은 공범이 출국하기 전에 붙잡지 못했다면 모녀의 죽음은 어떻게 됐을까. 그 생각을 하면 지금도 소름이 끼칩니다.”


#“너무 순수해 가슴 아픈 살인마”

자장면 한 그릇에 눈물 쏟은 김대두

정칠성 경감-정칠성 경감은 강력계 형사임에도 육탄전 경험이 많지 않다. 서울시경 내에서 철저히 자료 분석과 현장감식, 정보보고 전문가로 키워진 탓이다. 거친 사건을 최일선에서 다루는 강력·폭력계를 거쳤음에도 취미와 특기는 독서와 서예 등으로 극히 정적이다.

86년 율곡 서예대전 우수상을 시작으로 각종 서예대회 입상을 휩쓴 그는 특유의 섬세함을 발휘해 범인들의 마음을 녹이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정 경감은 1975년 17명의 무고한 생명을 죽인 혐의로 검거된 연쇄살인마 김대두와의 일화를 공개하며 과거를 회상했다.

- 김대두와 어떻게 인연을 맺게 됐나.
▶ “당시 서울시경 형사과로 자리를 옮긴 지 얼마 안 된 막내였다. 75년 연쇄살인마 김대두의 검거와 조사를 담당한 것이 우리부서였다. 검거당시 25세였던 김대두는 비슷한 또래인 나를 유독 잘 따랐다. 그는 만성적인 영양실조에 시달려 깡마른 체구였는데 내가 시켜준 자장면 한 그릇을 받아들고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윽박지르는 동료 형사들에 비해 따뜻하게 감싸주는 게 고마웠는지 이후 현장검증을 하는 동안 그는 내 말만 들었다. 저지른 범행은 참혹했지만 단순하고 순진한 친구였다.”

- 김대두는 갓난아기를 짓밟아 내장을 터트려 죽일 만큼 잔혹한 살인마였다. ‘순진하다’라는 표현은 다소 무리가 아닌가.
▶ “김대두와 직접 이야기를 나눠봤다면 무조건 그를 손가락질 하지 못할 것이다. 그는 겁이 많은 사내였다. 어린 아이와 여자, 노인들만 노려 범행을 저질렀고 목격자가 생길까 살인을 택한 경우였다. 단순히 재미로 사람을 죽이는 사이코패스와는 다르다.”
정 경감은 김대두의 현장검증 내내 곁을 지켰다. 다른 형사에게 거침없이 적개심을 보였던 그는 유독 정 경감에게만큼은 살갑게 대했다. 지은 죄가 무거워 사형을 직감한 정 경감은 현장검증을 마치고 그를 불러 세워, 동료 형사에게 부탁해 함께 사진을 찍었다고 했다.
“형님을 좀 더 일찍 만났으면 좋았을텐데…” 김대두의 그 한마디는 여전히 정 경감의 뇌리에 깊숙이 박혀있다.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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