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수리서 끄집어낸 납 조각, 서러운 가족사 실체 벗겼다”

영화 의 한 장면.

일주일 넘게 차가운 강물 속에 처박혔던 시신은 형체도 알아보기 어려울 만큼 뭉개져 있었다. 직접적인 사인이 될 만한 외상은 정수리에 말라붙은 핏자국 뿐. 두부처럼 부서지는 썩은 살점을 헤치고 피해자의 두개골이 모습을 드러냈다. 단단한 뼈를 열자 시커멓게 괴사한 두뇌에서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보통 사람이라면 코를 쥐고 고개를 돌릴 만큼 참혹한 광경이었지만 부검실 안 누구도 피해자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든 과정을 지켜본 민완형사는 이제야 의문이 풀렸다는 표정으로 거침없이 손을 뻗었다. 살에 착 감기는 비닐장갑을 낀 그의 손바닥엔 손톱보다 작은, 심하게 뭉그러진 ‘납 탄’이 들려 있었다.

“손 계장님 말씀이 맞았네.”

외상 하나 없이 발견된 피해자의 사인은 두부(頭部) 총상, 그것도 단 한발을 정수리에 정확히 대고 쐈다. 피해자를 지독하게 미워한 누군가가 그를 ‘처형’하고 차가운 강물 속에 처박았다는 얘기다. 지독한 만행을 저지른 범인은 과연 누굴까. 그리고 왜 이런 짓을 벌였을까. 15년 전 사건파일 속에 답이 있다.

피해자의 머릿속에서 발견된 작은 납 탄이 결정적 실마리가 된 사건, 바로 92년 ‘양재동 공기총 살해사건’이다. 당시 서울 용산 경찰서 형사계장으로 재직 중이던 손원태 경감은 이 사건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분명히 살해당했는데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가 있어야지. 유일한 흔적은 정수리에 핏자국 뿐이었습니다. 근데 그 상처가 단순히 둔기나 흉기에 당한 것 같지는 않았단 말입니다. 그래서 시신을 부검실로 보내며 부하 형사에게 단단히 일렀지요. 머리에서 뭐가 나와도 나오니 한시도 눈 떼지 말라고.”

서울 마포·강서·노원·노량진·용산 경찰서 등 5개 서 형사계장을 역임하며 300구 이상의 시신을 직접 검안한 손 경감은 후배 형사들에게 한 가지 철칙을 가르쳤다. 절대, 사건 현장과 부검실에서 고개 돌리지 말 것.

비위가 약한 젊은 형사들이 시신 앞에서 코를 쥐고 눈을 피하면 손 경감은 그 자리에서 불호령을 내렸다. 현장도 제대로 못 보는 형사라면 증거를 보는 눈도 없다는 생각에서다.

1992년 10월 21일, 경찰의 날(매년 10월 21일) 행사를 마치고 복귀한 손 경감은 형사과 경위로부터 긴급보고를 받았다. ‘한강에 이상한 시체가 떴다’는 것. 옷 갈아입을 틈도 없이 현장으로 달려간 손 경감의 눈에도 문제의 주검은 수상했다.

“퉁퉁 불은 쌀자루 안에 손발이 묶인 시신이 들어있었습니다. 옷차림으로 봐서는 남자인데 죽은 지 오래됐을 뿐 아니라 물에 잠겨있던 탓에 형체를 알아보기도 힘들 정도였지요.”

잠시 후 도착한 서울시경 감식반원이 시신을 자루 안에서 꺼내자 묵직한 시멘트 벽돌 4장이 자루 밑바닥에 깔려있는 게 보였다. 누군가 피해자를 살해된 뒤 유기한 게 틀림없었다. 일단 죽은 이가 어디 사는 누구인지 아는 게 급선무였다.


경찰의 날, 한강에 뜬 변사체

“지문감식 결과 피해자는 양재동에 사는 김모(당시 49세)씨였지요. 부인과 두 아들, 딸을 뒀고 20년 넘게 그 동네에서만 살아온 토박이였습니다.”

피해자 신원이 밝혀지자마자 유족들을 중심으로 탐문수사가 시작됐다. 숨진 김씨는 80~90년대 재개발 붐이 일었던 양재동에 4층짜리 건물을 소유한 알부자였다. 누군가 그의 재산을 노리고 치밀한 계획아래 살해했을 가능성이 컸다.

손 경감은 또 시신을 유기한 수법이 도박조직의 처형 수법과 유사하다는 것에 주목했다. 경찰은 김씨가 전문 도박단에 연루됐는지 여부에도 촉각을 곤두세웠다. 그러나 수사결과 경찰의 예상은 빗나가고 말았다.

“이상하지요. 피해자 주변이 지나칠 정도로 깨끗했습니다. 김씨가 평소 술을 좋아하긴 했지만 주변 사람과 다투는 일도 거의 없었고 도박을 즐기지도 않았다는 겁니다. 유족은 물론 지인과 이웃들의 말도 한결 같았습니다.”

다만 김씨가 숨지기 한달 쯤 전인 9월 중순, 집에 2인조 강도가 들어 온 가족을 폭행하고 현금과 수표 40여 만 원을 빼앗아 달아난 적이 있었다. 사건은 관할서인 서초경찰서에 신고가 접수됐지만 범인들은 잡히지 않은 상태였다.

이상한 점은 다른 가족들은 단순 타박상 정도에 그쳤지만 유독 김씨만 강도들이 휘두른 흉기에 배를 두 번이나 찔렸다는 것이었다.


“범인은 이 방 안에 있다”

탐문수사에서 별다른 소득을 건지지 못한 수사팀은 부검 결과에 주목할 수밖에 없었다. 김씨의 몸에서 발견된 유일한 외상인 정수리의 상흔, 그것이 유일한 증거였다. 피해자의 머리에서 납 탄이 나온 직후 손 경감은 어렴풋이 범인의 정체를 그릴 수 있었다.

“범인이 면식범이라는 확신아래 피해자의 마지막 행적을 종합해보니 용의자는 아주 가까운 주변 인물들로 좁아지더군요. 형사들에게 유족은 물론 누구에게도 총알과 관련된 이야기는 입을 다물라고 이르고 다음 작업을 했습니다.”

수사팀은 은밀히 김씨의 주변 인물들 가운데 공기총 소지 허가를 받은 자를 추리기 시작했다. 마침내 용의자는 한명으로 압축됐다. 다름 아닌 김씨의 큰 아들(당시 26세)이었다. 시신 발견 이틀 만에 장남을 유력한 용의자로 점찍은 손 경감은 확실한 물증을 잡기 위해 또 한번 지략을 발휘했다.

“일단 피해자 자택에 대해 압수수색영장을 받고 유족들이 모두 집을 비울 때를 기다렸습니다. 최대한 조용히, 용의자 자신도 모르게 확증을 쥘 생각이었지요.”

그의 예감은 적중했다. 출동한 형사들이 피해자의 집 안방 장롱 안에서 총 6발을 장전할 수 있는 공기총과 탄환 십여 발을 찾아낸 것. 숨진 김씨의 머리에 박힌 것과 같은 종류였음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증거를 잡은 손 경감은 태연한 얼굴로 후배 형사들과 김씨의 문상을 갔다. 김씨가 공기총에 맞아 숨졌다는 것을 알리 없는 유족들은 침통한 표정으로 형사들을 맞았다. 조문을 마친 손 경감은 조용히 김씨의 두 아들을 장례식장 한 쪽에 불러 세웠다. 그리고 딱 한 마디를 던졌다.

“상주들, 내 얘기 잘 들어요. 범인은 바로 이 방 안에 있는 듯 합니다.”


세 번 만에 성공한 살인

손 경감은 유심히 두 아들의 반응을 살폈다. 흙빛으로 변한 장남의 얼굴이 기묘하게 일그러지는 순간, 그는 직감이 틀리지 않았음을 확신했다. 그러나 손 경감은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냉철한 감성, 용서받지 못할 죄를 지은 큰 아들에게 마지막 기회는 줘야 했다.

“당장이라도 잡아들이겠다는 후배들을 제가 물리쳤습니다. 적어도 부친의 3일장은 치르고 불러들이자는 생각이었지요. 대신 사복 경관 3명을 장례식장에 심어 용의자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습니다.”

마침내 장례가 끝나고 손 경감은 장남을 경찰서로 불러들였다. 담당 형사계장의 배려를 알았는지 그는 도망치지 않고 순순히 조사에 응했다. 눈앞에 범행에 사용된 공기총을 내 보이자 큰 아들은 얼마가지 않아 고개를 푹 숙이고 굵은 눈물을 뚝뚝 흘렸다.

그는 아버지를 죽이기 전 이미 두 번이나 범행을 시도했었다는 사실도 털어놓았다. 세 번 만에 성공한 살인. 도대체 어떤 사연이 그를 패륜아로 만든 것일까. 손 경감은 비극에 얽힌 속사정을 담담히 전했다.

“숨진 김씨가 술을 즐기긴 했지만 말썽을 피운 적 없다는 유족들의 진술. 그게 모두 거짓말이었습니다. 지인들 사이에서는 평판이 좋았지만 유독 가족들에게는 ‘망나니’ 짓을 서슴지 않았던 겁니다.”

김씨의 세 자녀는 아버지의 상습적인 가정폭력에 시달린 피해자였다. 특히 남매의 어머니는 남편의 주먹질에 상처를 달고 살았다는 것. 특히 큰 아들은 아버지에 대한 증오가 남달랐다. 반항기를 주체하지 못하고 비행청소년이 된 장남은 중학교 때부터 크고 작은 사고를 쳐 소년원과 구치소를 들락거렸다.

3남매가 모두 성인이 된 뒤에도 아버지의 폭력은 잦아들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술에 취한 김씨가 부인의 관자놀이를 흉기로 내리쳐 기절시키기까지 하자 참다못한 큰 아들은 친아버지를 죽여 없애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손 경감의 말을 들어보자.

“처음엔 자기 손에 피를 묻힐 생각은 없었던 모양입니다. 중·고교 선후배와 동네 친구 등 3명을 사주했더군요. 나중에 그 친구들도 모두 잡아들였는데 알고 보니 집에 강도가 든 것도 큰 아들이 시킨 자작극이었습니다.”

장남은 부친을 살해하는 대가로 승용차 1대와 현금 1000만원을 제시했고 친구들은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는 대낮에 친구들을 집으로 데려와 아버지의 인상착의를 기억시키고 동선을 미리 알려주는 등 치밀하게 범행을 계획했다.

“처음 계획은 밤에 귀가하는 김씨를 이들이 돌로 내리쳐 살해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범행 예정일 김씨가 외박을 하는 바람에 첫 시도는 물거품이 됐지요. 강도로 위장한 두 번째 시도도 김씨가 살아남으면서 실패로 돌아갔습니다.”

두 번의 기회를 날려버린 큰 아들은 마침내 직접 나서기로 결심했다. 1992년 10월 13일 오후, 가족들이 모두 집을 비운 틈을 타 큰 아들은 공기총을 쥐고 조용히 2층으로 향했다. 김씨는 술에 취해 소파 위에서 코를 곯고 있었다.

원 샷 원 킬. 그토록 미워했던 아버지의 목숨을 단 한 발의 총알로 거둔 범인은 시신을 자루에 담아 1층 욕실에 숨겼다. 그리고 그날 밤 미리 빌려둔 랜트카에 실어 한강 잠수교에서 던져버렸다.


“범죄자에 측은지심, 수사관에겐 금물”

“아들이 친아버지를 죽였다는 게 믿기지 않아 녀석에게 왜 그랬냐고 물었습니다. ‘남은 식구들이 편해지려면 어쩔 수 없었다’고 하더군요.”

범인은 이듬해 대법원에서 존속살해 및 사체유기, 살인교사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 가정폭력이 만들어낸 끔찍한 범죄, 그 사연이 안타깝지 않았을까. ‘물론 아니라면 거짓말’이라면서도 손 경감은 고개를 저었다.

“인간적인 동정심은 어쩔 수 없지만 수사관이 범죄자의 처벌을 안타까워해선 안 됩니다. 지은 죄 만큼 벌을 받는 것이 그들의 남은 짐을 덜어주는 가장 빠른 길이니 말입니다.”

자칫 미제로 빠질 뻔한 존속살인 사건을 작은 납 탄 한 조각을 토대로 해결한 그는 반드시 이 한 마디를 강조해 달라고 말했다.

“억울한 죽임을 당한 피해자는 반드시 결정적인 흔적을 남기는 법입니다. 망자의 마지막 메시지인 셈이지요. 그 흔적이 크든, 작든 형사라면 절대 놓치지 않아야 합니다.”

한편 사형수로 서울구치소에 복역 중이던 범인은 지난 2002년 무기징역으로 감형됐다. 부친의 잔인한 폭력을 막으려 한 아들을 구하기 위해 모친이 법무부와 청와대에 줄기차게 탄원서를 보낸 덕분이었다.

종교에 귀의한 그는 감옥 안 재소자들 사이에서 ‘작은 목사’로 불릴 만큼 성실하게 생활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리얼스토리 talk box 손원태 경감

고려대 법대 출신 엘리트 형사 “돈 욕심냈으면 경찰 안 했을 것”

고려대 법학과를 졸업한 손원태 경감은 일선 경찰 사이에서도 손꼽히는 엘리트다. 지난 1965년 3월 서울 명동파출소 순경으로 경찰에 입문한 그는 경찰 사정기관을 거쳐 형사계장으로 임용된 케이스다. 1남 3녀의 다복한 가정을 꾸린 손 경감은 여유로운 퇴직 경찰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 대한민국 최고 수준의 학벌인데 어째서 경찰, 그것도 말단 순경에 투신했는지.
▶ “처음부터 돈 욕심이 있었다면 경찰이 안 됐을 것이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평생 돈 걱정이라는 걸 모르고 산 게 복이라면 복이다. 천성이 평범한 월급쟁이는 안 맞는 성미였다. 그런데 경찰은 달랐다. 내 몫으로 맡겨진 사건을 퍼즐 풀 듯 해결하는 과정이 굉장히 신났다. 현직에 있을 때도 입버릇처럼 후배들에게 했던 말이 있다. ‘돈 벌고 싶으면 옷 벗고 장사꾼이나 돼라’다. 더 높은 직급까지 못 올라간 게 흠이긴 하지만 지금은 건강히 정년을 맞은 것만으로도 기쁘다.”

- 경찰직에 대한 긍지가 대단한 것 같다.
▶ “당연하다. 수사관 시절 철칙으로 지킨 게 있다. ‘바르게 보고, 바르게 판단하고, 바르게 생각하고, 바르게 행동하는 것’이다. 경찰은 명예가 생명이다. 자식들에게도 이런 점은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강조했다.” <수>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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