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세기 후반 영국 케임브리지 대학 역사학 교수인 존 액튼은 “권력이란 부패 속성을 지녔으므로 절대권력은 절대 썩는다”고 적시하였다. 액튼의 지적대로 절대권력은 절대 썩게 마련이다. 2차세계대전 후 신생국들의 통치자들은 경제발전과 사회 안정을 위해 “절대권력“이 불가피하다면서 절대 썩어 들어가 결국 축출되거나 피살되고 말았다.

지난 23일 91세로 타계한 신생국 싱가포르의 리콴유(李光耀) 전 총리도 31년 동안 절대권력을 휘둘렀다. 그러나 그는 절대 썩지 않았고 깨끗하게 통치함으로써 싱가포르 국민의 국부로 추앙되었다. 싱가포르는 150년 영국의 식민 통치를 받았고 1959년 영국연방 자치령으로 독립했다. 리콴유는 그 해 서울 면적의 1.8배 밖에 안 되는 작은 도시국가 싱가포르의 초대 총리로 취임, 1990년 퇴임하였다. 당시 어업항구에 불과했던 싱가포르의 1인당 국민소득(GDP)은 400달러였으나 지금은 5만6000달러 세계 8위 부자 나라로 성장했다.

리콴유 총리가 취임할 당시 싱가포르 도로에는 소와 돼지들이 나다녀 지저분하기 짝이 없었다. 오랜 식민지 생활로 싱가포르인들은 법과 질서의식이 결여됐었다. 중국계, 말레이계, 인도계, 타밀계 등으로 갈리어 종족간 갈등도 끊이지 않았다. 공통적인 언어, 문화, 역사, 목표도 갖지 못했다. 리콴유의 지적대로 “국가로서 기본 요소”를 갖추지 못했다.

리콴유는 우선 언어부터 통일해야 한다며 상용어로 식민지배국 영국의 영어를 선택, 국제화의 초석을 다졌다. 자존심을 버리고 실용을 선택한 것이었다. 그는 강경 반공주의자였고 싱가포르를 세계에서 가장 안전한 도시, 가장 깨끗한 도시로 가꾸며 해외자본을 유치했다. 국제적 물류 중심지, 금융 중심지, 산업생산기지로 키웠다. 부정부패를 막기 위해 고위 관리들의 급료를 개인기업과 연동시켰고 뇌물수수가 발견되면 가차없이 처단했다.

리콴유는 손수 빗자루를 들고 거리를 청소했고 바닷가 쓰레기를 주었다. 그는 국민들에게 미소를 지으라고 권장했고 제대로 된 영어 쓰기, 화장실 변기 물 내리기, 침 뱉지 말기, 쓰레기 발코니에서 내던지지 않기 등 운동을 벌였다.

그는 정치에서는 가부장제적 독재로 일관했다. 비판세력은 감옥에 가두거나 명예훼손으로 다스려 파산시켰다. 싱가포르의 번영은 자유와 인권 희생으로 이뤄졌다고 비판되기도 한다. 그의 통치 형태를 “싱가포르 모델” 이라고 한다. 중앙집권적 통치, 일당 지배, 깨끗한 정부, 정적 탄압, 언론·출판·결사 제한, 자유개방경제, 경제발전, 등으로 집약된다. “아시아적 가치”였다는 말도 있다. 개인보다 공동체를 우선시하며 자유보다는 질서를 중시한다는 뜻이다.

리콴유가 절대권력을 휘두르면서도 1960-80년대 후진국 독재자들처럼 부패, 타락하지 않고 존경 받게 된 데는 필시 까닭이 있다. 그는 자신에게 먼저 엄격했다. 자기 가족이 매입한 주택 가격이 올라 인구에 회자되자 자진해서 철저히 조사를 받았다. 그는 골프장이 갖춰져 있는 화려한 총리 공관에서 살기를 거부했고 허름한 자기 집에서 출퇴근 했다. “내 아이들을 집사와 청소부가 있는 특별한 환경에서 키우지 않겠다.”는 이유에서였다.

리콴유는 박정희 대통령처럼 “궁정동 안가” 같은 곳에 드나들지 않았다. 전두환·노태우 대통령처럼 수천억원대의 불법 비자금을 쥐어짜지도 않았다. 김영삼·김대중 대통령처럼 아들들이 줄줄히 쇠고랑을 차지도 않았다. 노무현 대통령처럼 청와대에서 기업인으로부터 돈을 받지도 않았다. 그는 아시아 통치자들이 쉽게 빠져드는 부패와 타락의 함정을 유럽의 중세 수도승처럼 자기 절제로 극복했다. 리콴유의 성공 비결은 자신에게 엄격하고 깨끗한데 있다. “아시아적 가치”를 추구하는 아시아 지역 지도자들이 배워야 할 통치 귀감(龜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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