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절 심문(審問)은 ‘예술’이었다


“나를 둘러싼 논란과 주위의 비난이 두렵다.”

이근안 전 경감과의 단독 인터뷰가 보도된 직후인 지난 8일 그는 [일요서울]에 직접 전화를 걸어왔다. “저 이근안 목사입니다”라고 말문을 연 그는 덤덤한 말투로 기자의 안부를 물은 뒤 “주말 부천의 모 교회에서 신앙 간증을 마쳤다”며 자신의 근황도 전했다.

“이야기를 가감 없이 전달해줘 고맙다”는 인사 말미에서야 이 전 경감은 조심스럽게 속내를 털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앞으로 나갈 인터뷰 내용 중 몇몇 인사들과 얽힌 일화는 빼달라”고 정중히 요청했다. 김근태 전 복지부 장관을 비롯한 재직당시 공안사건 주역들 얘기다.

사건 비화가 담길 금주 보도를 염려한 듯했다. 이 전 경감은 지난호(제 824호 참고)를 통해 사건과 관련해 기존 알려졌던 주장들이 상당부분 과장됐거나 허위라고 밝힌 바 있다. 이때 그는 자신의 근황과 과거 도피, 수감생활을 털어놨다. [일요서울]은 지난호에 이어 더욱 충격적인 이 전 경감의 격정토로를 지상 중계한다. 이 전 경감이 전하는 진실은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 많은 차이가 있다. 지금부터 목회자인 그가 십자가를 가슴에 대고 고해성사하듯 털어놓는 김근태 전 장관 고문, 남민전 사건의 진실을 들어보자.

인터뷰 내용을 일부 보도하지 말아달라는 이 전 경감의 부탁에 “본인의 인터뷰 내용이 거짓이었느냐”고 반문했다. 이 전 경감은 펄쩍 뛰었다. 그는 “이제 와서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느냐”면서도 “하지만 내가 아무리 해명을 해도 사람들은 여전히 ‘이근안’을 손가락질 하고 욕한다. 그 모욕감을 견딜 자신이 없다”고 긴 한숨을 토했다.

그동안 이어진 여러 고문피해자들의 증언은 이 전 경감이 [일요서울]을 통해 밝힌 당시 상황과 정반대다. 과연 누구의 입이 진실을 말하고 있는 것일까.

군사정권 시절 ‘빨갱이’로 몰렸던 이들은 DJ정권 이후 민주투사가 됐다. 그리고 빨갱이를 잡던 ‘파수꾼’은 17년간 도피와 수감생활 끝에 ‘고문기술자’라는 주홍글씨를 단 ‘죄인’이 됐다. 역사의 아이러니 속에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뀐 것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엔 아직 풀리지 않은 숙제가 있다. 양쪽 모두 피해자라 주장하는 가운데 적어도 이들 중 한쪽은 진실을 왜곡하고 있다.

이 전 경감은 재직시절 피의자를 심문하는 과정에서 ‘강제심문’이 있었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끔찍한 고문기술은 없었다고 그는 단호히 말했다. 일반에 알려진 것처럼 잔혹한 고문이 동원된 적은 없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강제심문과 고문, 그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과거의 피해자와 현재의 피해자가 엇갈리는 증언을 내놓고 있다.

다음은 이 전 경감과의 일문일답 전문이다.

※ 주관적인 입장을 배제하고 논란을 최소화하기 위해 이 전 경감과의 대화는 일문일답으로 엮었다.


“강압심문 있었지만 ‘고문기술’ 없었다”

- 심문 과정에서 ‘무자비한’ 고문이 실제 있었나.
▲ ‘심문’은 혐의가 확실하고 물증이 있는 용의자를 조사하는 것이다. 문제는 72시간 안에 모든 심문을 마쳐야 한다는 점이다. 공안사건에 연루된 피의자 대부분은 묵비권을 행사하거나 자해를 하는 등 조사에 비협조적이다.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해도 심문이 안 되면 할 수 없이 ‘강압심문’을 하게 된다.

- ‘강압심문’이 고문 아닌가.
▲ 주먹으로 몇 대 쥐어박거나 유도(柔道)기술을 이용해 업어치기정도는 했다. 이것을 ‘고문’이라 한다면 변명하지 않겠다. 하지만 그 이상의 가혹행위는 없었다.

- ‘관절빼기’ ‘볼펜심 꽂기’ ‘통닭구이’ 등등 직접 고안한 것으로 알려진 고문기술들이 상당히 다양하다. 이런 기술들을 단 한 번도 동원하지 않았다는 말인가.
▲ 그 기술들이 어떤 것인지 나도 최근에야 알았다. 오랫동안 무도(武道)를 한 내가 그렇게 치사한 기술을 동원했다는 주장에 기가 막혔다. 내가 저지른 일은 당당히 “했다”고 인정할 수 있다. 분명히 말하지만 그런 기술들은 써본 적도 없고 어떻게 하는 건지도 모른다.

- 이상의 고문기술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란 얘긴가.
▲ 그렇다. 일부 언론이 나를 ‘관절빼기의 명수’라고 부르던데 상식적으로 관절을 뽑으면 주위 인대가 늘어난다. 늘어난 인대는 관절을 다시 끼운다 해도 금방 회복되지 않아 상당기간 깁스 등 치료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깁스하고 재판 받은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는가. 과거 심문과정에서 난동을 부리는 피의자 몇 명을 완력으로 제압하다 팔이 빠지는 경우가 있긴 했다. 아마 이런 일화들 때문에 내게 ‘기술자’라는 호칭이 붙은 것 같다. 하지만 이런 경우는 피의자를 제압하는 과정에서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사고다.

- 고문피해자 상당수가 “고문기술자 이근안의 가혹행위로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할 정도의 고통을 당했다”고 증언했다.
▲ 쫓기던 시절에는 이 사람들이 도대체 왜 조사만 받고 나오면 ‘고문당했다고’ 하는지 원망스러웠다. 결국 그들 나름의 ‘자기합리화’ 때문이라고 여겼다. 공안사건에 연루되는 인사들은 비밀결사 등 조직에 소속돼 있다. 조사를 받은 이들 상당수는 해당 조직 기밀을 당국에 제공하는 조건으로 풀려났다. 원래 조직으로 복귀한 뒤 대접이 예전 같겠는가. ‘배신자’ 소리 듣지 않으려면 비밀누설에 대한 정당한 이유를 대야 한다. 결국 ‘고문에 못 이겨서’라는 대답이 제일 타당하지 않겠나.

- 고문피해자로 나선 이들과 본인의 주장이 너무 상반된다. 둘 중 하나는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얘기 아닌가.
▲ 진실공방이 벌어진다 해도 내가 안 한 것은 안 한 거다. 화가 나면 쥐어박지 치사하게 뭘 접고, 꽂고 하겠나.


장관 김근태와 죄수 이근안의 포옹

- 85년 김근태 당시 민청련 의장 고문사건으로 세간의 주목을 받았다. ‘전기고문’ 파문도 그때 불거졌다.
▲ 처음부터 내가 그 사건을 수사한 것은 아니다. 당시 민청련 초대의장이었던 김근태씨는 수시로 정보기관에 연행된 전력이 있었다. 가족 중에도 이적 혐의가 짙은 인물이 있어 당국이 예의주시하던 인물이었다. 검거 된 그가 무려 12일 동안 묵비권을 행사하자 치안본부에서 내게 수사기록을 넘겼다. 하룻밤 꼬박 새며 수사기록을 본 뒤 “간첩이라 결론을 낼 수는 없지만 지하조직에 몸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보고를 하자 직접 심문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 ‘절대 피의자 몸에 손대지 말라’는 특별지시가 내려온 상황에서 그의 입을 열게 할 방법으로 고안한 것이 이른바 ‘전기고문’이었다.

- 피의자 입을 열게 하려고 전기고문을 했다는 건가.
▲ 먼저 분명히 해야 할 게 있다. 당시 전기고문의 실체는 내가 취미삼아 만든 모형 비행기 모터에서 뺀 ‘AA 건전지 2개’라는 점이다.

- 건전지 2개로 전기고문이 가능한가?
▲ 그래서 고문이 아니라는 거다. 그때 김근태씨를 앞에 두고 두 시간 넘게 일부러 말로 겁을 줬다. “너 같은 녀석은 전기구이를 해 버려야 바른 말을 한다”는 식으로 상대를 주눅 들게 한 것이다. 한참후에 눈을 가린 뒤 맨 발바닥에 소금물을 뿌리고 건전지 두 개를 대며 계속 겁을 줬다. 이미 잔뜩 긴장한 상태에서 찌릿찌릿한 감각이 느껴지는데 놀라지 않을 사람이 어디 있나.

- ‘잔혹한’ 전기고문에 대한 증언은 또 있다. 민병두 전 민주당 의원은 과거 언론 기고문에서 “이근안은 잡지 ‘선데이서울’ 보면서 전기고문의 볼트수를 올렸다 내렸다”라고 밝혔었다.
▲ 손가락만한 건전지 2개가 전부인데 어떻게 전압을 올렸다 내렸다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 2005년 여주교도소 수감 당시 김근태 당시 복지부장관과 독대하며 과거의 잘못을 사죄했다고 알려졌다. 이것도 사실이 아닌가?
▲ 어느 날 교도소장이 불러서 갔더니 “복지부 장관이 영감님 면회를 오신다는데 한번 만나보라”고 하더라. 현직 장관이 직접 온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지 않나. 변호사들이 수감자를 만나는 ‘특별접견실’에 먼저 도착해 기다리니 김 장관이 들어왔다.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지날 일은 죄송하게 됐다”고 하자 김근태 장관이 양팔을 벌려 포옹을 해왔다. 그리고는 “그게 어떻게 개인의 잘못이냐. 이 시대가 낳은 비극 아니냐”며 위로를 건네는 게 아닌가. 솔직히 ‘정말 그릇이 큰 양반’이라고 느꼈다.

- 당시 언론에는 ‘눈 감을 때까지 용서를 구할 것’ ‘무릎 꿇고 용서를 빌었다’ 등의 내용이 실렸다.
▲ 김근태씨에게 종교에 심취해 있다는 나의 근황을 전하며 로마서 3장10절(기록 된 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나니)을 인용했다. 그랬더니 사흘 뒤 신문에는 내가 무릎을 꿇고 빈 것으로 묘사됐다. 사실은 ‘이 세상 모든 사람이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뜻으로 한 말이었다. 무릎을 꿇거나 큰 절을 올린 일은 없다. 당시 언론보도를 보고 ‘붓쟁이’들의 말장난에 웃었다. 동료 수감자들은 ‘김근태가 영감님을 이용해 정치적 쇼를 한 거 아니냐’고도 했다. 하지만 김근태씨가 그곳까지 날 만나러 왔을 때는 정말 과거의 앙금을 털어버릴 뜻으로 오지 않았겠는가. 지금도 김근태씨가 정략적으로 날 이용하기 위해 만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얕은 수를 쓸 사람은 아니라고 느꼈다. 이후 김근태씨가 내 특별사면을 건의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사면은 불발됐지만 차라리 형기를 모두 채우고 출소한 게 다행이었다. 마음의 짐을 하나라도 덜은 셈이니까.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 재직 당시 간첩검거에 능했다. 실제 잡아들인 간첩단 규모는 어느 정도인가.
▲ 그건 국가기밀이다. 당시 남한에는 북한 지령을 받고 움직이는 간첩이 상당히 많았다. 공식적인 간첩검거 유공은 4건이지만 실제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 것 정도만 밝히겠다.

- 2000년대 이후 이른바 ‘조작간첩’ 사건이 불거지며 상당수 인사들이 무죄를 선고받거나 민주화인사로 승격됐다. 이중엔 직접 담당했던 사건도 적지 않다.
▲ 일일이 할 말은 많지만 이 자리에서는 밝히지 않겠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당시 피의자들의 혐의를 입증할 물증이 충분했다는 점이다. 시대가 바뀌면서 그때 수사기록은 모두 쓰레기가 됐다.

- 평생을 ‘고문기술자’로 불리며 숨어 지냈다. 시간을 돌려 과거로 간다면 다른 선택을 하지 않았을까.
▲ 아니다. 지금 당장 그때로 돌아간다 해도 나는 똑같이 일할 것이다. 당시 시대 상황에서는 ‘애국’이었으니까. 애국은 남에게 미룰 수 있는 일이 아니다.

- ‘고문기술자’라는 명칭에 대한 솔직한 심경은.
▲ 나는 ‘고문기술자’가 아니다. 굳이 기술자라는 호칭을 붙여야 한다면 ‘심문 기술자’가 맞을 것 같다. 논리로 자신을 방어하려는 이와 이를 깨려는 수사관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 속된 말로 ‘선수끼리’의 대결이랄까. 그런 의미에서 심문도 하나의 ‘예술’이다. 비록 나는 그 예술을 아름답게 장식하지 못했지만.

[이수영 기자] severo@dailysun.co.kr
[사진=맹철영 기자] photo@dailysu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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