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완종 경남기업 회장은 나뭇가지에 넥타이로 목을 매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숨가쁘게 살아온 64년 인생은 우리 시대의 자화상으로 살아남아 메아리친다. 지독한 빈곤에서 탈출하기 위한 땀과 눈물, 법 보다 돈·인맥·권력 의존, 도덕과 윤리 불감증, 기업인이나 정치인으로 성공한 후 두 손목에 채워지는 쇠고랑, 등의 허탈한 인생여정을 떠올린다.

성 회장은 6.25남침 전쟁 중인 1951년 출생하여 지적(知的)으로 한창 성숙기였던 유소년기를 굶주림과 멸시 속에 살았다. 그의 1950-60년대 유소년기는 전쟁을 거치면서 살아남기 위해 법과 윤리를 외면했던 혼탁의 시대였다. 배고픈 그에게 법과 윤리는 사치였다.

그가 맨주먹으로 기업을 일구던 청년기 1970-80년대는 압축 경제발전 시대였다. 경제발전을 위해 독재 권력이 정당화되었다. 돈과 권력 성취 열광 속에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하던 도덕 결핍 사회였다. 그에게는 돈과 권력이 구원의 종교였다.

그러나 우리나라도 1990년대부터 경제발전과 민주화를 토대로 준법·윤리 의식이 차츰 자리 잡아갔고 기업경영도 시장논리에 지배되어갔다. 여기에 성 회장도 구시대적 의식구조에서 벗어나 변화된 새로운 규범에 적응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날의 경영 마인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그는 모든 문제를 돈 주고 산 권력과 인간관계로 풀 수 있다고 믿었다. 1992년 국회 국정감사에 따르면, 1988년 이후 그의 대아건설 관급공사 낙찰률은 98%를 넘었다. 돈과 권력 인맥을 고리로 사업을 확장했음을 시사한다. 그런 방식으로 사업을 키운 기업인은 성완종만이 아니었고 적지 않다.

그는 국회의원 자리도 돈 주고 사려 했다. 2002년 충청도 지역에 기반을 둔 자유민주연합에 16억 원을 주고 전국구 후보 자격을 낙찰 받았으나 당선되지도 못한 채 정치자금법 위반으로 쇠고랑을 차야 했다. 징역 2년 집행유예 3년형을 받았다. 2012년 선진통일당 지역구 후보로 서산·태안에서 당선되었으나 이것도 선거법 위반으로 당선 무효형을 받아 의원직을 상실했다. 돈 주고 국회의원 직을 사려다 오랏줄에 묶여야 했던 사람도 성완종만이 아니었다.

그의 한 지인은 그가 “인맥으로 흥하고 인맥으로 망한 분이죠. 정권 바뀔 때마다 여야를 넘나들며 그렇게 인맥을 찾아다녔는데…”라고 회고했다. 그는 집권세력 뿐 아니라 야당, 검찰, 경찰, 법조계, 금융권, 세무, 등에도 돈으로 인맥을 엮어놓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성 회장은 기업인으로서 돈·인맥·권력을 디딤돌로 삼아 컸다. 명예를 위해 장학재단도 세웠다. 그러나 그는 돈과 명예를 계속 유지하기 위해선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야 했다. 아이랜드의 극작가이며 평론가인 조지 버나드 쇼는 “합리적인 인간은 세상에 적응하지만, 비합리적인 사람은 세상이 자기에게 적응토록 고집한다.”고 하였다. 성 회장은 세상이 자신에게 적응하기를 고집하다가 결국 도태되고 말았다.

그는 자살하기 전 300억 원 금융 횡령, 250억 원 회사돈 횡령, 800억 원 사기대출, 9500억 원대 분식회계 혐의로 검찰의 수사를 받고 있었다. 그는 구속을 피하기 위해 구명운동을 벌였지만 모두 냉혹히 거절당했다. 돈과 인맥이 그전처럼 통하지 않는 사회적 변화의 벽에 부닥친 것이었다. 그는 변화된 세상에 적응치 못한 자신에 대한 반성 대신 배신감으로 들끓었고 ‘8인 리스트’를 폭로했다. 죽은 자의 ‘8인 리스트’는 살아 있는 총리를 끌어내리는 등으로 앙갚음했다.

성 회장은 기업을 시장논리로 경영하지 않고 돈과 인맥으로 관리하면서 자기 묘혈을 팠다. 우리 시대 적지 않은 사람들도 돈과 권력을 구원의 종교로 믿고 법과 윤리를 사치로 여겼다. 성완종에게 손가락질만 할 게 아니라 자신이 살아온 나날을 되돌아 볼 계기로 삼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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