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태종-일본과의 등거리 외교 통해 기반 구축

[일요서울 | 우종철 자유총연맹 사무총장] 2014년 10월 23일 제46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의(SCM)에서 한미 양국은 전시작전통제권(전작권) 전환 시기를 2020년대 중반 이후로 재연기하기로 합의했다. 이는 국가와 국민의 안위를 최우선으로 고려해야 하는 정부가 한반도 자유와 평화를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자 외교전의 승리였다.

커티스 스캐퍼로티 주한미군사령관의 “북한은 핵탄두 소형화능력을 갖췄다”는 주장을 빌리지 않더라도 전작권은 자존심이 아니라 생존의 문제이며, 한반도 안보에 선택이 아니라 필수이기 때문에 전작권 환수 시기는 북한이 핵을 포기한 후에 논의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번의 전작권 전환 재연기 결정을 통해 ‘역사 속에서 찾는 외교전략’을 살펴보고자 한다. 역사상 유명한 외교전략으로는 김춘추의 삼국통일, 서희 장군의 강동6주 담판, 이제현의 입성책동(立省策動, 고려를 원나라의 성으로 편입시키는 책략) 저지, 광해군의 균형외교 등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역사상 두 번의 통일을 경험했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고려의 후삼국 통일이 그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세번째 통일을 준비하고 있기 때문에 김춘추의 삼국통일 과정의 외교전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당시 삼국에서 가장 국력이 약한 신라가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주역이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은 신라가 멸망할 수도 있다는 ‘위기의식’과 조국을 위한 충의의 자세로 결속한 국민의 ‘총화단결’이었다.

김춘추는 가야계인 김유신을 포용하고 당태종과 일본과의 등거리 외교를 통해 삼국통일의 기반을 구축했다. 그가 648년 당나라로 건너가 나당연합을 위해 당태종을 설득한 전략은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문화전(文化戰)이다. 70년대초 미중수교 당시 핑퐁외교처럼 “공자를 배우고, 신라에 가르치고 싶다”는 ‘중화(中華)정책’ 제안이다. 귀국한 김춘추는 관복을 당의 관제로 바꾸고, 당의 연호를 사용하였다. 기타 당의 선진 제도를 받아들여 유교에 기반을 둔 정치체제 운영의 발판을 마련하였다. 이러한 내정 개혁은 당의 신뢰를 얻는 데에도 기여하였지만, 무엇보다 신라사회의 기존체제를 발전적으로 재편하는 데 유용하였다.

둘째, 심리전(心理戰)이다. “군량미 평양 이송을 신라가 보급하겠다”는 제안이다. 이는 안시성싸움(645년)에서 고구려에 패한 당태종이 백제가 신라를 병합하는 것은 고구려 이상의 화근이 될 수 있으며, 한반도 동쪽 구석에 치우친 신라가 후환이 없다고 판단하도록 유도한 것이다. 당태종은 억강부약(抑强扶弱), 원교근공(遠交近攻)의 병법을 선택했을 것이다. 진덕여왕이 손수 비단에 당나라 황제를 찬양하는 <태평송>을 수놓아 바친 것도 심리전의 일환이었다.

셋째, 인질전(人質戰)이다. 자신의 제안에 대한 신뢰구축을 위해 아들들이 당에 볼모로 남는 제안이다. 좌무위장군(황제 측근의 경호 담당)에 제수된 문왕( 김춘추의 3남)은 당조정의 고위관리들과 관계를 강화하고 신라에 유리한 여론이 황제의 귀에 들어가게 했으며, 국학(國學)에 유학 온 신라학생들의 교우관계를 이용해 당을 둘러싼 전 세계의 정보를 수집해서 신라에 보냈다. 651년 문왕이 귀국하고 형인 김인문이 입당(入唐)해 그 자리를 맡는다.

김춘추에 대해 “외세를 빌려 동족 국가를 망하게 함으로써 민족의 무대를 축소했다”는 역사학계 일부의 평가가 있다. 그러나 신라는 통일 이후 당과 결전을 벌여 웅진·계림도독부 등 당 세력을 한반도에서 몰아냈기 때문에 이러한 비판은 설득력이 없으며, 김춘추는 신라가 오늘날 한국사회의 본류가 되도록 한 영걸이다.
북한은 자신들이 ‘고조선-고구려-발해’를 계승했다고 강변하며 민족주의 사관을 악용하고 있다. 북의 ‘신라 삼국통일’ 폄하는 ‘대한민국은 미국과 결탁한 반민족적 정권’으로 매도하기 위한 술책으로 이에 현혹되어서는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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