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못된 외교전략은 국가에 치명적인 결과 초래

[일요서울 | 우종철 자유총연맹 사무총장] 2009년 외교부가 선정한 ‘우리 외교를 빛낸 인물’의 첫 번째 자리를 차지한 인물인 고려시대의 서희(徐熙, 942 ~ 998)가 타개한 지 1016년이 지났다. 지금 우리는 120년 전 구한말과 같은 갑오년 경장의 한 해를 보내며 ‘1000년 전 서희의 외교’에서 많은 것을 배워야 할 것이다.

11-12세기 고려는 송·거란·금 사이에 세력균형을 정립, 평화관계를 유지하며 실리를 추구하는 대외정책을 펼 수 있었다. 그 원동력은 고려인의 ‘총화단결’과 유능한 외교관 서희의 탁월한 외교전략과 명장 강감찬으로 대표되는 강력한 군사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993년(성종 12), 고려 건국 75년 만에 거란은 송을 공략하기에 앞서 고려를 먼저 침공하였다. 봉산군을 함락시킨 거란 장수 소손녕은 “80만의 군사가 출병했다. 만약 항복하지 않으면 섬멸할 것이니, 국왕과 신하들은 빨리 우리 군영 앞에 와서 항복하라”고 고려를 위협했다.

그러나 성종의 신뢰를 등에 업은 서희는 당당하게 맞서 담판으로 소손녕을 굴복시켰다. 서희가 이 외교담판을 통해 평안북도 강동 280리를 차지해 고려의 영토를 압록강 경계로 확대시킨 업적을 남긴 전략은 크게 세 가지이다.

첫째, 지피지기 백전불태(知彼知己 百戰不殆) 전략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을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손자병법의 가르침을 그대로 적용한 것이다.

서희는 송과 치열하게 대립하고 있는 거란의 국제정세를 정확하게 이해하고, 거란이 송을 제압해 동아시아의 패자가 되기 위해 배후세력인 고려와 송의 관계 단절, 고려의 중립화, 고려의 북진정책 봉쇄가 침입목적이라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둘째, 선 항전 후 협상(先 抗戰 後 協商) 전략이다. 사직이 절체절명의 위기상황에 협상력을 강화하기 위해 고전적인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당시 고려 조정에서는 항복과 할지(割地, 서경 이북의 땅을 양도)로 의견이 나뉘었고, 할지로 기운 상태였다. 그러나 서희는 고려군에 대한 신뢰와 안융진전투 이후 산악지대 전투에 자신감을 잃은 거란군의 상황을 파악, 지형지세를 이용한 항전으로 거란군에 타격을 줄 수 있다는 판단에서 ‘우선 항전해보고 후에 협상해도 늦지 않다’는 대안을 제시했다.

셋째, 여 명분 득 실리(與 名分 得 實利) 전략이다. ‘얻기 위해서는 먼저 주어라’는 관중의 가르침에 따라 명분은 주고 실리를 얻는 것이다. 비록 거란의 요구대로 송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거란과 군신관계를 맺어(명분) 일시적으로 사대의 예를 갖추었지만, 싸우지 않고 거란의 대군을 돌려보내어(부전이승不戰而勝), 오히려 ‘옛 고구려 땅 강동 6주는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가 차지(실리)해야 양국의 사대우호 관계가 지속될 수 있다’는 논리로 소손녕을 설득한 것이다.

서희는 국교를 맺기 위해서는 여진을 내쫓고 그 땅을 고려가 차지해야 가능하다며 조건을 내걸었고, 이듬해부터 직접 군사를 이끌고 여진족을 몰아낸 뒤 강동 6주에 성을 쌓아 이 지역을 고려의 영토에 편입시켰다. 이로써 고구려 멸망 이후 처음으로 국경이 압록강에 이르렀다.

그러나 그로부터 600년 후 조선은 선조의 우유부단과 당쟁으로 분열된 조정 때문에 임진왜란 정유재란이라는 미증유의 7년전쟁을 미리 예방하지 못했고 민생은 도탄에 빠지게 되었다.

현군(賢君)과 적절한 실리외교가 전쟁을 막고 영토를 확장할 수도 있지만, 잘못된 외교전략은 국가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는 점, 외교는 초당적이어야 국익을 지킬 수 있음은 동서고금의 진리다.

‘협상의 시대’라고 할 만큼 국가 간 협상이 중요해진 요즘, 서희의 ‘협상 리더십’을 되새겨 본다. 1000년 전 서희 외교의 성공사례처럼 대한민국의 지정학적·전략적 가치를 당당하게 설파할 수 있는 ‘제2의 서희’ 출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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