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대국들의 힘겨루기에도 ‘원칙’ 지켜야

[일요서울 | 우종철 자유총연맹 사무총장] 한족(송)·거란(요)·여진(금)과 동아시아 국제정세의 균형을 이루며 강성했던 고려는 13세기 초 몽골의 침략으로 국운이 쇠약해졌다. 고려가 28년간의 대몽항쟁 끝에 강화를 성립시킨 1259년부터 반원운동에 성공한 1356년까지 97년 동안을 ‘원간섭기(元干涉期)’라 부른다.

이 시기 제25대 충렬왕부터 제31대 공민왕까지 7명의 고려왕들은 공주 7명을 포함한 15명의 몽골 여인을 왕비로 맞아야 했다. 이른바 ‘원의 부마국’ 시기에 고려는 역사의 한 전환기를 맞게 된다.

“고려가 원나라의 종속상태로 지낼 바에는 차라리 원나라의 성(省)이 되는 것이 낫다”는 매국적인 주장(입성책동立省策動)이 분출했다. ‘제1차 입성책동(충선왕1년,1309)’은 부원배 홍복원(몽골 편에 선 고려 침략 앞잡이)의 손자인 홍중희가 충선왕을 계속 모함하던 끝에 제기하였지만, 실각하는 것으로 끝났다.

그러나 ‘제2차 입성책동(충숙왕10년,1323년)’은 구한말 을사오적과 같은 유청신·오잠이 원 황제에게 상소를 올려 “고려를 삼한성(三韓省)으로 원나라 내지(內地, 본국)와 같이 만들어주소서” 했다. 이번에는 원나라에서 행성의 이름을 ‘삼한행성’으로 정할 정도로 상당히 진전되었다.

고려의 명운이 풍전등화처럼 다급해지자, 역적들의 망동에 분을 삭이지 못한 이제현(李齊賢, 1287~1367)은 고려 땅이 원나라에 넘어가면 다시는 한반도에 자주적인 정권이 들어서지 못할 것이라는 확신으로 팔을 걷어붙이고 나섰다.

이제현은 민족수난기 일곱 왕 시대를 거치며 네 번이나 재상을 지낸 경륜의 정치인이요 외교가요 대학자다. 조선의 유성룡도 “이제현은 덕(德)·공(功)·언(言) 3가지 장점을 고루 갖춘 고려 5백 년 동안의 유일한 유가적 인물”이라고 평하였다.

이제현은 원나라 황제에게 상소문을 올리면서 세 가지 전략을 구사했다.

첫째, 유교적 명분 접근법이다. 이제현은 원 조정에 올린 상소에서 유교 경전의 가르침을 들어 “지금 고려를 기어이 병합하는 것은 대국의 풍도가 아니다”고 지적했다. 또한 “원 세조 쿠빌라이가 아리크부거와 경쟁할 때 고려의 태자(후의 원종)가 찾아온 것을 기뻐하며 고려가 국체를 보전하고 고유의 풍속을 유지하기를 허용했던 일”을 상기시켰다. 원의 비위를 맞추면서도 고려의 자주성을 지키려는 심리계(心理計)를 활용했다.

둘째, 경제적 민심 중시 접근법이다. 이제현은 “우리나라가 강산이 좁고 국토의 7할이 산림과 척박한 땅이라 세금을 매겨도 거둬들이는 데 돈이 더 들 것”이라 했다. 또한 “고려가 중국에서 먼 곳이고 백성은 고지식하며 언어도 달라 원나라의 행성이 되면 민심을 가라앉히기 어려울 것”이라 했다. 은근히 원나라 조정을 압박하는 협상전술을 썼다.

셋째, 인맥 활용 접근법이다. 충선왕이 원나라에 머물며 만권당을 짓고 학문연구에 전념할 때, 이제현은 조맹부·염복·원명선 등 원나라의 명사들과 교류하며 원나라 조정에 영향력을 미칠 수 있는 역량을 키웠다. 이제현은 원나라의 승상 배주·왕관·왕약을 비롯한 유력자들에게 두루 부탁하여 이들이 고려를 도와 입성책동에 반대하도록 유도했다.

 이 같은 이제현의 입성책동 저지에 대해 정구복 교수는 “이는 중국의 속국이 되어버렸을 가능성을 막아낸 대 결단이었다.” 라고 칭송했다. 이순신이 칼로 조선을 지켰다면, 이제현은 붓으로 고려를 지킨 것이다.

2015년은 광복·분단 70주년이다. 통일을 준비하고 있는 우리는 아직도 14세기 초엽처럼 주변 4강의 이해관계에 얽매인 처지다. 국제정세에 혜안을 가졌던 이제현 선생처럼 강대국들의 힘겨루기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면서 선진통일을 이룩할 수 있는 탁월한 외교가의 출현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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