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삼 정부시절인 1996년 9월 한국정부에 정보를 제공한 혐의로 미국에 의해 스파이죄를 적용받고 구속 수감된 로버트 김(64·한국명 김채곤). 그가 지난달 28일 발목에 차고 있던 전자감시장치를 풀며 7년여 수감생활에 종지부를 찍었다. 로버트 김은 “기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며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라고 소감을 말했다. 그는 또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 서운함은 있지만, 조국을 위해 일했을 뿐이므로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탓할 생각이 없다”며 “다만, 주권국가로서 미국의 눈치를 보는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고 밝혔다. “생활인으로 빨리 자리잡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급선무”라는 로버트 김. 그는 “많은 사람들에게 혜택이 돌아가고,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생각”이라고 향후 계획을 말했다.

- 오랜시간 수감생활을 했는데 현재 건강은 어떤가. ▲ 쉰 여섯에 교도소에 들어가 예순, 하고도 넷에 출소했으니 물리적으로도 나이를 먹었다. 하지만 교도소의 규칙적인 생활, 그리고 정신력으로 수감 전의 건강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팔굽혀펴기 50번을 하루도 빼놓지 않고 해왔고, 달리기와 역기 들기도 했다. 무엇보다 나는 건강하게 출소해서 이제 온통 백발이 된 힘없는 아내를 돌봐야 한다는 생각에 건강관리를 철저하게 해왔다.

- 수감 생활을 마친 소감은. ▲ 기쁘다는 말로도 부족하다. 오랜 여행에서 돌아온 기분이고, 8년이나 풀지 못했던 짐을 비로소 풀고, 자유로워지고 싶다. 출소와 함께 보호관찰이 시작되기 때문에 완전한 자유인은 아니다. 하지만 가족을 통해 바깥 세상과 연결되어야 하는 제약이 없어서 좋다. 지난 6월부터 가택연금으로 집에서 생활했지만, 아직 현실에 대해서는 무감각하다. 빨리 지난 세월에서 벗어나 생활인으로 독립하고 싶다.

- 옥중생활에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개인적인 아쉬움이라면 아이들이 공부하고, 결혼하고, 이렇게 한창 아버지의 도움이 필요한 나이에 옆에 있어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아내의 머리가 하나 둘 하얗게 세는 동안 함께 있으면서 늙어가지 못했다는 점이다. 쉰 여섯에 집을 나가 예순 넷에 돌아왔으니 지난 세월에 대한 아쉬움이 왜 없겠는가.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하지 않고, 앞만 보며 살려고 한다.

- 옥중생활을 오래했는데 사회적응은 잘 되는가.▲ 주말 가택연금으로 집에서 주말을 보낼 수 있게 된 지난 3월부터 인터넷을 배우고 있다. 교도소에 있던 8년 가까운 세월 동안 세상은 많이 변했는데, 특히 IT 분야는 놀라운 발전을 거듭했다. 내가 가장 신기하게 생각했던 것이 바로 핸드폰이었다. 앨런우드에서 윈체스터 교도소로 이감되던 지난 1월, 차안에서 후원회와 전화통화를 했는데, 그 때 핸드폰을 처음 손에 쥐고는 어리둥절했었다. 인터넷도 마찬가지이다. 후원회 홈페이지를 방문하고, 주변 사람들과 메일을 주고받으면서 세상은 이렇게 발전해 가는데, 나자신만 정지된 시간 속에 있었던 것 같다.

- 가택연금기간 역시 자유롭지는 못했는데. ▲ 가택연금은 무엇보다 가족들과 함께 집에서 지낼 수 있다는 점에서 죄수들에게는 축복이다. 하지만 아무리 자유복을 입고, 집에 있다고 해도 수감생활의 일부이기 때문에 분명한 제약이 있다. 특히 자유가 가까이 있는데도 자유인이 아니라는 사실은 자유에 대한 갈증을 더욱 심하게 느끼게 한다.

- 면회는 어떤 분들이 주로 다녀갔는가.▲ 국회의원으로는 김원웅 의원과 이재정 의원이 오셨다. 후원회장인 선우의 이웅진 회장은 세번이나 방문해서 나와 아내를 위로해주고 갔다.

- 정부가 로버트 김에 대해 소홀히 했다는 여론이 많았다. 정부에 대해 섭섭함은 없는가. ▲ 내가 구속된 후 문민정부, 국민의 정부, 현재 참여정부까지 정권이 세번 바뀌었고, 그 때마다 난 대통령에게 탄원서를 보내 도움을 요청했다. 사건 발생 후 8년 동안 한국 정부는 외면으로 일관했다. 사건 직후인 1996년 11월,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워싱턴 포스트지와의 기자회견에서 “이 사건은 개인의 문제다. 한국 정부는 전혀 관계도 없고, 관심도 없다”고 말했다. 1997년 5월, 김대중 당시 국민회의 총재는 워싱턴 방문길에 우리 가족을 접견하고, 후원의 뜻을 표한 바 있다.

1998년, 국민의 정부가 들어섰을 때 대통령의 적극적인 지원을 기대했지만, 이후 외교통상부 장관 앞으로 보낸 탄원서의 답신에서 우리 정부는 ‘로버트 김의 정보 제공은 무관과의 개인적인 관계에서 비롯되었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현재 후원회가 정부 관계부처와 접촉하며 해결의지를 촉구하고 있지만, 과거 정부와 비슷한 반응을 보이고 있다. 나는 한국 정부의 소극적인 태도에 대해 서운함은 있지만, 조국을 위해 일했을 뿐이므로 한국 정부에 대해서는 탓할 생각이 없다는 입장이다. 하지만 주권국가로서 미국의 눈치를 보는 현실에 대해서는 안타까움을 느끼고 있다.

- 이번 수감생활을 통해 느낀 조국에 대한 개인적인 생각은 무엇인가. ▲ 구속되기 전에는 한국은 내가 태어난 곳, 부모님이 계신 곳, 이런 막연한 그리움의 대상이었다. 하지만 교도소에 있으면서 한국인들의 격려편지, 정성어린 선물을 받고, 후원회의 활동을 지켜보면서 당당한 한국인으로 그들 사이에 속해있는 나를 발견했다. 몸도, 마음도, 생각도, 감정도, 모두 한국인이 된 것이다. 물론 잃은 것도 많지만, 이런 소중한 발견은 내 선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자부하게 한다.

- 다음달에 귀국할 것이란 보도가 국내에서 나오고 있다. 언제쯤 국내에 들어올 예정인가.▲ 후원회에서 그런 계획을 세우고는 있지만, 현실적으로 나는 보호관찰 대상자이다. 보호관찰이라는 것은 생활하는 데 많은 제약이 따른다. 사건이나 이전 직장(O.N.I)과 관련된 그 어떤 활동도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또 버지니아주 경계를 벗어나는 데도 허가가 필요하다. 귀국이 허락된다면 더할 나위 없이 기쁠 것이다.

- 아직 제약이 많다는 말인가. ▲ 보호관찰 기간 동안에는 집이 있는 버지니아주 경계를 벗어나려면 연방 정부의 허락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상황이 허락된다면 후원회 초청으로 한국을 방문할 계획을 갖고 있다. 출감 후 1년이 지나면 보호관찰 기간 단축 신청을 할 수 있기 때문에 탄원서 작성 등 그에 필요한 준비를 하고 있다.

- 귀국하면 가장 먼저 하고자 하는 일은 무엇인가. ▲ 아직 구체적인 계획은 없지만, 우선 부모님 산소를 찾아뵙고, 불효를 용서받고 싶다. 물론 그 동안 많은 은혜를 베풀어주신 국민들을 만나 감사의 마음도 전할 것이다.

- 국내에 후원회가 결성돼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 얼굴 한번 본 적도 없는 타인을 진심으로 돕는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건 단지 동포애만으로 되는 일도 아니다. 나를 도와온 후원회, 특히 이웅진 회장에 대해서는 그 감사함이 너무 깊어 몇 마디 말로는 도저히 내 마음을 표현할 수 없다. 그분들은 그동안 구체적인 성과가 없다면서 나를 많이 돕지 못한 것에 대해 미안해하지만,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런 따뜻한 마음들이 나를 살렸다.

- 옥중에서 한국에 들어와 교육사업을 하고 싶다는 뜻을 밝혔는데. ▲ 사회활동이 허락되면 한국의 발전에 기여하는 일을 하며 여생을 보내고 싶다. 특히 한국의 젊은 세대에 대해 깊은 애정을 갖고 있는데, 그 중에서도 불우 청소년을 위한 교육사업을 하고 싶다. 어려운 환경에 처한 청소년들에 대해 강한 책임감을 느끼고 있다. 해외 유학생이 급증하는 현실에서 돈이 없어 유학은 꿈도 꾸지 못하는 불우 청소년들에게 영어와 국제 감각을 익혀 유학생 못지않는 실력을 갖게 하여 사회의 인재로 키우는 교육사업에 대한 구체적인 청사진도 갖고 있다.

- 향후 계획을 말해 달라. ▲ 사람들에게도 혜택이 돌아가고, 국익에도 도움이 되는 일이 뭔지 진지하게 고민해볼 생각이다. 우선은 생활인으로 빨리 자리잡아 가정의 생계를 책임지는 일이 급선무이다. 내가 집을 떠나 있는 지난 7년 10개월 동안 세상은 너무도 많이, 그리고 빨리 변하고 있다. 내 앞의 시간만 멈춰있는 소외감을 느끼기도 한다. 빨리 이 거리를 좁혀서 세상 사람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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