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체성 공방은 한나라당 전당대회 후 박근혜 대표의 태도변화에서 비롯됐다. 박 대표의 유연한 대여관계에 대해 당 내부에서 많은 비난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당 결속 차원에서 이뤄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박 대표의 전면전 선포에도 현재 당 내부에서는 찬반 의견이 분분하다. 사실 야당이 정치 공세를 펼칠 수밖에 없었다. 친일진상규명법 개정으로 박 전대통령 친일행적 조사와 정수장학회 논란은 강경하게 대응하지 않으면 내몰리는 형국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에 서해 NLL 보고 누락과 송두율 교수 석방, 비전향 장기수 민주인사 선정이 대여 공세의 기폭제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박 대표의 공세적 태도에 당 내에서는 두 가지 의견이 공존하고 있다. 즉 지금까지 절제된 모습을 보였던 박 대표가 중진들에 떼밀려 강경 태도를 천명한 것은 분명 잘못이라는 의견이다. 반면 야당 대표로서 그간 유연한 대여관계를 떠나 따져야 할 것은 따진다는 이미지를 심어준 것은 바람직하다는 주장도 거세다.

당내 소장파 모임인 ‘새정치 수요모임’은 박 대표의 강경 입장에 대해 걱정하는 눈치다. 여당의 정략적인 공격에 일일이 대응할 필요도 없고, 차라리 민생행보를 계속 진행해 여론을 업어야 한다는 논리다. 원희룡 최고위원은 민생을 우선하고 현장 정치 기조를 박 대표가 유지해야 한다는 의견을 밝혔다. 그러나 영남 출신 또는 중진들은 박 대표가 해야 할 일을 했다는 평가를 내리고 있다. 보수 성향의 의원들은 여당의 정치 공세에 박 대표가 적절하게 대응함으로써 보다 발전된 리더십을 보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이후 박 대표는 국가 정체성을 경제 살리기와 연관지어 청와대를 자극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유신청산’을 내세우며 반격했다. 청와대의 이 같은 반응이 나오자 한나라당의 분위기가 조금씩 변화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유신청산 전면전에 야당이 다소 흔들리는 표정이다. 정체성에서 유신으로 초점이 바뀌자 야당 내부에서 이는 인정해야 한다는 반응이 나오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개혁 성향의 초선 의원들은 ‘유신청산’에 대해 매우 조심스런 반응이다. 박 대표의 편에 섰다간 청와대의 치밀한 공세에 의해 자칫 유신 옹호자로 오인 받을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또 친일진상규명법 개정 여론이 비등해 유신 청산 논란이 확대될 경우 개인적 정치력에 치명타를 입을 수 있다는 계산 때문이기도 하다. 이미 원 최고위원은 박 대표가 스스로 유신에 대한 입장을 정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바 있으며, 남경필 수석부대표도 같은 입장을 밝혔다. 특히 남경필 부대표는 유신과 관련해서는 박 대표와 당의 공식적 사과가 있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것으로 전해졌다. 즉 정체성 공방은 공세적일 필요가 있지만 유신청산은 본질적으로 문제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리고 일부 초선 의원은 박 대표가 청와대와 대립각을 강하게 세우고 있는 것에 노골적으로 불만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당 분위기에 당과 박 대표도 다소 주춤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다.정체성 논란이 유신청산으로 이어지자 노무현 대통령의 정치 술수에 한나라당이 말려들고 있다고 보는 이들이 늘고 있다. 흔히 노무현 대통령이 대결구도 만들기의 고수라는 점에서 이번 사안도 박 대표의 정치력보다 노 대통령의 정치 계산이 한발 빠르다는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이 야당의 정체성 공세로 빚어진 청와대와 야당간 논쟁을 유신청산 발언으로 국면을 유리하게 이끌고 있다는 내용이다. 나아가 유신 청산은 야당내 이념논쟁을 촉발시키기에 충분하다는 계산도 설득력을 얻고 있다. 사실 대여 공세로부터 시작된 논란이 한나라당 내부에서는 초·재선 의원과 중진 사이에서 이념 논쟁으로 이어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이를 전문가들은 한나라당 내부에서조차 정체성과 유신청산에 대한 입장 정리가 되어 있지 않기 때문이라 분석하고 있다. 아울러 과거와 달리 초선 의원들이 당론에 입각한 의정활동 보다는 개인적 소신을 더 중요시하는 까닭에 이 같은 이념 논쟁이 불거지고 있다는 의견도 내놓고 있다.하지만 김덕룡 원내대표와 김형오 사무총장은 노 대통령을 강하게 비난하고 나서 박 대표를 측면 지원하고 있다. ‘노 대통령이 국가정체성 문제에 보다 진솔한 입장을 밝힐 것’과 ‘과거사 문제를 거론하며 유신으로 회귀하려는 것은 바로 노 대통령’이라는 논리를 펴고 있는 것이다. 청와대의 분명한 관점이 야당과 박 대표를 곤경에 빠트리고 있다.

그 핵심은 박근혜 대표는 유신체제와 5공 정권의 연장선상에 있고 참여정부는 헌법에 기초한 국민이 직접 선택한 정권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분명한 논조를 가지고 청와대는 보수 언론에 대한 공세로까지 확장하고 있는 분위기다. 잇따른 청와대 관계자의 발언이 직·간접적으로 박 대표와 조선·동아일보를 엮어가고 있다. 조선 동아가 최근 보수단체 광고를 게재하고 의문사진상위와 친일규명법 보도에 대한 비난으로 이어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 최근의 정체성 논쟁이 소모전 양상으로 흐르자 당 저변에서는 경제문제가 시급한 만큼 국면전환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박 대표를 외롭게 만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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