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발전 전략은 ‘선 경제개발 후 민주화’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박정희(朴正熙, 1917~1979)는 일제강점기인 1917년 경북 선산에서 가난한 농부인 박성빈(朴成彬)과 백남의(白南義) 사이에서 5남 2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1937년 대구사범학교를 졸업, 문경소학교에서 3년간 교직생활을 했다.

이후, 1940년 만주의 신경군관학교(新京軍官學校)를 최우등생으로 수료한 뒤 일본육군사관학교로 전학, 1944년 졸업했다. 1946년 육군사관학교에 들어가 제2기로 졸업하고, 1961년 제2군부사령관으로 재직 중 5.16을 주도하여 집권한 후 18년 5개월 동안 ‘한강변의 기적’을 이뤘다.

이인영 서울대 교수는 5.16 직전의 시대상을 이렇게 묘사했다. “거리는 실직자로 득실대고, 농민과 노동자는 기아와 궁핍으로 고통 받고 모든 공장은 폐쇄상태라 생산이 제대로 되지 못했다. 강도와 절도가 날뛰고 상이군경·학생들의 데모로 날이 지샜지만 4·19탄생 장면정부 치안능력이 무기력했다. 국민 모두 불평과 비탄에 잠겨 있었다. 그때 박정희가 나타났다.”

이 교수의 주장대로 4·19로 집권한 민주당은 무능하고 부패했다. 법치가 무너진 무질서 속에서 국민들은 ‘굶주린 자유’의 허망함에 절망했다. 6·25를 겪은 국민들은 김일성을 추종하는 좌익선동에 “군이 나서지 않고 뭣 하느냐”며 분통을 터뜨렸다. 박정희는 인고의 세월을 떨치고 겨레를 보릿고개 가난에서 구해내기 위해 5.16이란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박정희의 근대화에 대한 정치철학은 ‘무항산 무항심(無恒産 無恒心)’으로 귀결된다. 이는 대한민국이 진정한 민주주의를 이룩하려면 먼저 경제발전으로 국민생활과 교육기반을 강화하고 의식구조를 개혁해야만 한다는 ‘선 경제개발 후 민주화’ 국가발전전략이다.

김종필 전 총리는 “민주주의와 자유도 그것을 지탱할 수 있는 경제력이 없으면 있을 수 없다. 박 전 대통령은 부존자원이 하나도 없는 가난한 나라가 살아가는 방법은 좋은 제품을 만들어 해외에 파는 것으로 생각했다. 배고픈데 무슨 민주주의가 있고 자유가 있느냐”고 이를 입증했다.

박정희의 외교전략은 실학사상(實學思想)에 기반을 둔 실리외교로 귀결된다. 한·일 국교 정상화를 논의한 청와대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 박정희는 “오늘 우리 결정에 대한 판단은 후세에 맡기자. 하지만 이 일은 지금 우리가 하지 않으면 안 된다”며 비장한 말을 했다. 이때 들여온 돈으로 경부고속도로·포항제철 등을 건설하며 경제발전의 토대가 마련됐다.

한국 간호사들과 광부들을 위문하고 차관을 얻기 위해 서독을 방문한 박정희는, 그들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 건네고는 목이 메어 말을 잇지 못했다. 강당 안은 곧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를 목격한 에르하르트 서독 수상은 “아! 저런 지도자가 있는 나라라면 우리가 차관을 줬다가 돈을 떼여도 좋다”며 차관을 약속했다.
박정희는 야당으로부터 한일국교 정상화를 추진한다고 하여 ‘매국노’라는 욕을 들었다. 월남에 국군을 파병한다고 하여 ‘젊은이의 피를 판다’는 악담을 들었다. 서독의 돈을 빌려서 경제건설을 앞당기겠다는 노력에 대하여 ‘차관 망국’이라는 비난을 들었다.

그러나 박정희는 내가 잘 했는지 못했는지는 역사가 증명할 것이다 라며 자신 있게 “내 무덤에 침을 뱉어라”고 말했다. 노산 이은상 선생은 “박정희는 세종대왕과 이순신 장군을 합해놓은 인물이다”라고 평가했다.
박정희는 5000년 역사의 숙원인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남북한 체제경쟁에서 김일성과 싸우지 않고 이긴 지도자다. 박정희의 한일협정 체결은 한국 외교사를 통틀어 이승만의 한미동맹 체결과 함께 가장 잘한 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박정희의 국가통치 능력을 온전히 이해하는 것은 우리의 생존을 위한 숙제요, 선진통일로 나아가기 위한 과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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