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용과 통합의 정치가, 수성의 전략가를 이루다

[일요서울 | 편집팀 기자] 칭기즈칸의 손자로 태어난 쿠빌라이는 어려서부터 눈에 띄는 존재는 아니였다. 1251년이 될 때까지 톨루이가문에서 둘째아들이라는 위치때문에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었다. 그러나 훗날 유라시아를 하나로 통합한 칭기스칸의 리더십을 이어받아 중국 전역을 통치하는 최초의 이민족 중국황제로서 위상을 드높였던 인물이다.

“중국인들을 탄압하고 착취할 것이 아니라, 그들을 보살피고 다독이는 정책을 취해 우리 몽골에 충성하도록 해야 한다. 그들을 멸시하기보다 이해하고 존중해야 한다” 이러한 부모의 가르침이 훗날 그가 칸의 자리에 올랐을 때 중국을 다스리는 원동력이 됐다.

이 책에서는 ‘정복'보다는 ‘이로운 통치'로 정주사회의 실질적인 통합을 할 수 있었던 생생한 쿠빌라이 칸의 역사적인 기록들을 살펴볼 수 있다.

책에서 전해주는 쿠빌라이 칸의 첫인상은 ‘실용의 정치가’라는 이미지다. 쿠빌라이는 유목민의 기질상 중국의 광활한 토지를 모두 목초지로 바꾸고 싶었을지도 모른다. 기마병으로 중국을 장악했으니 중국 군대를 모두 기마병으로 만들고 싶었던 욕망또한 있었을 것이다. 공자와 맹자를 들먹이며 잘난척하는 중국 유학자들보다는 같은 몽골인들로 관료 집단을 채우고 기존의 종교들을 모두 억압하고 몽골 고유의 신앙을 지키도록 할 수 도 있었다. 하나의 문자를 창제하여 전 신민들에게 강요할 수 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토지를 목초지로 바꾸려는 몽골인을 처벌해 중국 농민의 마음을 샀다. 공성전을 벌여야 할 때는 기병보다 보병을 기용했고 강과 바다를 만났을 때는 해군을 증강했다. 중국인들을 ‘맞춤형’으로 통치하기 위해 중국 유학자들을 기용하고 중국의 행정 시스템을 응용했다. 중국의 유교·불교·도교를 장려했을 뿐 아니라 서방에서 온 이들을 포섭하기 위해 이슬람교와 기독교도 적극 수용했으며 최소한 배척하지는 않았다. 파스파 문자를 창제하긴 했지만 여러 민족들의 고유 언어들을 억압하지는 않았다. 이와 같은 쿠빌라이의 ‘실용주의’야말로, 몽골이 중국을 장기간 통치할 수 있게 한 원동력이였다고 이책에서 전한다.

그동안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는 않았지만 칭기즈 칸 사후, 거대한 몽골 제국을 지켜나갈 시스템을 설계한 뛰어난 전략가로서 넓은 영토를 제대로 수성해낸 역사적 인물이 쿠빌라이 칸이였던것이다.

이 책의 저자 모리스 로사비는 유라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던 자료를 종합하고 분석해 수성의 전략가 쿠빌라이 칸의 삶과 뛰어난 통치술을 생생하게 복원해냈다. 로사비의 손에서 재탄생한 쿠빌라이는 역사상 최대 영토에 통치 시스템을 만들었던 문명의 설계자였다. 정복민에게서 땅이 아닌 마음을 얻고자 했으며 국제적 거래를 장려해 경제 부흥을 이뤘다. 제국을 세운 것은 칭기즈 칸이었지만 제국의 완성은 쿠빌라이의 손에서 이루어졌다. 어쩌면 정복보다 더 어려운 과업에 직면해 지속적인 성공의 기틀을 다졌던 쿠빌라이를, 이제 우리는 비로소 제대로 만날 수 있게 된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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