끊이지 않는 지하철 범죄, 여성직장인 두 명 중 한 명이 성추행 경험

개찰구 통과시 주의가 흐트러지는 점을 노리고 가방에서 지갑을 꺼내는 모습이다(좌)한 남성이 지하철에서 성추행하는 모습을 촬영한 동영상

지난 11월 30일 인터넷에 ‘신도림행 마지막 열차’라는 제목의 동영상이 올라왔다. 동영상 속에는 한 남성이 술에 취해 잠이 든 여성을 성추행하고 있었다. 남성은 아무렇지도 않게 여성의 허벅지를 더듬었다. 이를 본 한 승객이 제지하자 그는 곧바로 자는 척하다가 다음 역에서 황급히 내렸다. 이후 해당 동영상은 인터넷을 통해 급속히 유포됐으며, 동영상의 주인공 조모(46)씨는 심리적 부담을 느껴 범행 하루 만인 지난 12월 1일 오후 지하철경찰대에 자진출석했다. 이렇듯 시민의 발인 지하철 범죄가 근절되지 않고 있다. 시민들의 지하철 이용이 증가하면서 그에 따른 범죄도 계속 증가하고 있기도 하다. 특히 사람이 많이 몰리는 출퇴근 시간에 범죄가 가장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나 대책 마련이 시급한 상황이다. 매년 국감에선 지하철을 범죄 사각지대로 지목했지만, 특별한 대안이 없어 지하철을 타고 다니는 시민들의 안전이 위협받고 있다. [일요서울]은 지난 12월 21일 지하철 경찰대와 함께 2호선과 4호선을 타고 지하철 범죄의 현장을 돌아봤다.

“지금 나가서 한 8시까지 있어야 되는데 안 힘들겠어요?” 남들은 집에 가느라 분주할 때, 지하철 경찰대는 더 바쁘게 움직여야 한다.

지난 12월 21일 저녁 6시, 지하철 경찰대 임재민 경사의 걸음이 빨라졌다. “동대문으로 가야 해요, 동대문으로. 거기가 지금 환승하는 사람 때문에 가장 붐벼요.” 임 경사가 도착했을 때 이미 지하철 역은 퇴근하려는 사람으로 가득 차 발 디딜 틈도 없었다.

순간 임 경사의 눈이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람이 많은 틈을 타 성추행범이 더 활동적으로 움직이기 때문이다. “저런 사람을 조심해야 되요, 저런 사람”이라며 임 경사가 속삭인다. 그가 가리키는 곳을 쳐다보니 왠 남자가 다른 사람들과는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고 있었다. “남들은 다 환승하거나, 출구로 나가려고 움직이고 있는데, 저 사람은 혼자 돌아다니고 있죠? 저런 사람이 거의 성추행범이에요. 한번 지켜봅시다.” 임 경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 남자는 한 여성 뒤에 밀착하기 시작했다. 긴장되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어디선가 자신을 바라보는 듯한 눈길을 느껴서인지 남자는 잠시 멈칫하며 주변을 두리번거리다 임 경사와 눈이 마주치자 발걸음을 돌려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다른 칸으로 옮겼다. 사람들이 붐비는 가운데 누가 선량한 시민이고 누가 범죄자인지 가려내기는 쉽지 않다. 임 경사는 “지하철은 이상한 곳이라 신사가 갑자기 범죄자로 둔갑할 수 있는 곳”이라고 설명했다. 다행히 이날은 별다른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다. 그러나 동행 취재 동안 임 경사가 말해 주는 지하철의 범죄 현황은 그리 간단치만은 않았다. 서민의 발이 되어 출·퇴근을 책임지던 지하철은 사회 각계각층의 사람들이 익명으로 모이기 때문에 자칫 방심하면 성추행과 소매치기, 폭행범들이 들끓는 곳으로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악몽의 출·퇴근 지하철 현장

지하철 경찰대가 전하는 최근 지하철 내의 범죄는 다양했다.

회사원 이모(32·여)씨는 요즘 지하철 타기가 두렵다. 얼마 전 생각하기도 싫은 끔찍한 일을 당했기 때문이다.

평일 출근길, 어김없이 분주하게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로 지하철은 금세 만원을 이뤘다. 동대문역을 지날 때 쯤 이씨는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누군가가 자신의 몸을 만지는 것 같았지만 “사람이 많아 그렇겠지…”라며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나 불안감과 두려움은 현실이 됐다. 40대 남성이 충무로역에 도착할 때까지 이씨의 엉덩이를 계속해서 더듬었던 것이다.

당황한 나머지 어떻게 대응할지 몰랐던 이씨는 지하철 문이 열리자마자 다급히 지하철을 빠져나왔다. 이씨는 “아직도 꿈에서도 생각이 난다”며 “그 당시 상황만 생각하면 소름이 돋고 무섭기까지 하다”고 털어놨다.

“지하철도 이제는 마음 놓고 이용하지 못하겠어요” 출·퇴근 시 지하철을 이용하는 직장인 김모(26·여)씨. 그녀도 요즘 지하철 타기가 무섭다. 그녀는 “몇 달 전 퇴근길에 술에 취한 40대 남성이 ‘엉덩이가 섹시한데, 좀 만져보자’며 달려들었던 기억이 잊히질 않는다”고 토로했다. 이후 김씨는 야근하고 돌아갈 경우 비싸지만 안전하게 택시를 이용한다고 밝혔다.

회사원 강모(30·여)씨는 최근 지하철 성추행의 피해자가 됐다. 강씨는 회사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명동역을 지날 무렵 문이 열렸고 60대 남성이 자신의 옆자리를 차지했다. 자리에 앉은 남성은 갑자기 강씨에게 몸을 밀착시켰다. 그것도 모자라 손으로 허벅지를 더듬기까지 했다. 참다못한 강씨는 “왜 이러세요”라고 소리쳤지만 이 남성은 오히려 더 대담하게 다가왔다. 그는 “왜 나한테 소리지르냐, 내가 당신한데 뭐 한 거 있냐”고 되레 더 큰 소리로 면박을 줬다. 그것도 모자라 입에 담지 못할 욕설까지 퍼부은 뒤 유유히 다음 정거장에서 사라졌다.

지난 12월 6일 오후 7시 10분께 서울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안, 이모(43)씨는 서울대입구역에서 교대역에 도착할 때까지 흉기를 들고 승객들에게 욕설을 내뱉었다. 이 과정에서 그는 윗옷을 벗어 온몸에 그려진 문신을 드러내기도 했다. 이씨의 난동은 10여분 간 지속됐지만 다행히도 다친 승객은 없었다. 그러나 퇴근길 지하철은 이미 공포로 가득차 있었다. 경찰은 교대역에서 지하철을 멈춰 세운 뒤 이씨를 붙잡았다. 지체장애 5급인 그는 난동 당시 술에 취해있었던 것으로 드러났다.

지난 10월 15일 서울경찰청 지하철경찰대는 지하철 안에서 승객을 속여 금반지 등 금품을 훔쳐 달아난 김모(64·여)씨를 절도 혐의로 구속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같은달 6일 오후 1시 30분께 지하철 2호선 전동차 안에서 승객 최모(88)씨가 금 묵주반지를 낀 것을 보고 무료로 묵주 반지를 만들어주겠다고 속여 왕십리역에 함께 내린 다음 최씨의 금반지를 들고 달아난 혐의를 받고 있다. 김씨는 지난 7월 18일에도 지하철 2호선 삼성역에서 배모(52·여)씨에게 접근, 배씨가 목에 건 순금 목걸이를 사주겠다고 속여 목걸이를 건네받고 그대로 달아나는 등 두 차례에 걸쳐 80만 원 상당의 금붙이를 훔친 것으로 밝혀졌다.


출근시간에 성범죄 48.8%

취업포털 ‘사람인’이 여성 직장인 1864명을 대상으로 조사한 결과, 대중교통을 이용하다가 성추행을 당한 경험이 있다는 대답이 46.6%에 달했다. 거의 두 명 가운데 한 명이었다. 취업포털 ‘커리어’도 비슷한 조사를 했다. 직장인 828명을 대상으로 설문했더니, 출퇴근 중 성추행을 당했다는 응답이 42.5%나 되었다. 그 가운데 79%는 여성이었다. 이처럼 여성은 성추행 탓에 지하철을 맘 놓고 탈 수 없는 형편이다.

서울경찰청의 ‘지하철 범죄현황’ 분석결과에 따르면 2007년부터 올해 6월까지 서울지하철 내 절도·성폭력·폭력 범죄는 총 7844건으로 조사됐다. 연도별로는 2007년 1878건, 2008년 1994건, 2009년 2284건으로 해마다 증가하는 모습을 보였다. 올해 1월부터 지난 6월까지 발생한 범죄는 총 1688건으로 조사됐다.

이 가운데 카메라 등으로 여성의 은밀한 부위를 촬영하거나 신체접촉을 시도하는 성폭력이 796건(47.1%)으로 가장 많이 발생했으며, 뒤를 이어 폭력은 541건(32.0%), 절도는 351건(20.8%)으로 집계됐다. 또한 서울경찰청이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소속 이명수 의원(자유선진당)에게 제출한 자료에 따르면 전체 성폭력 범죄(796건)중 약 58%가 지하철 2호선에서, 이어 20%가 지하철 1호선에서 발생했다.

작년 국감 때도 지하철 2호선은 성범죄 사각지대로 지목 됐지만 성범죄율은 개선되지 않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지난 10월 국정감사 때, 이 의원이 분석한 자료에 따르면 지하철 2호선의 성범죄 발생 건수는 2007년 281건, 2008년 272건, 2009년 384건, 2010년 6월 314건으로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특히 출근 시간대인 ‘오전 6~10시’에 발생한 사건이 275건으로 전체의 48.8%를 차지했다. 퇴근시간대인 ‘18~20’사이는 134건이 발생, 23.8%에 달했다.

이처럼 서울 지역 내 지하철에서의 성추행 범죄는 이미 심각한 수준이다. 강남역 지하철 지구대 관계자는 “유동 인구만 해도 하루 평균 20만여 명에 달해 증거 확보가 어려운 성범죄 특성상 신고되지 않은 숨은 범죄도 상당하다”고 전했다.

그러나 이들 범죄를 막기는 쉽지 않다는 것이 경찰의 설명이다. 지하철 경찰대는 “지하철이 폐쇄적이고 혼잡하며 출구가 많아 범인을 현장에서 검거하기 어렵다”며 “게다가 범인을 검거하기에 경찰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전했다. 실제로 서울시 지하철 경찰대 인력은 121명으로 증원이 절실한 상황이다.


멀쩡한 사회인 지하철서 돌변

경찰요원의 부족과 피해 여성들의 고발 저조 등으로 인해 지하철 내에서 성추행 범죄는 쉽게 근절되지 못하고 있다. 특히 지하철이라는 협소한 공간 속에서 성추행 범죄가 벌어지다 보니 적발 또한 쉽지 않다.

또한 지하철에서 발생하는 범죄 특성상 사전 예방보다는 사후 검거가 주를 이루다보니 지하철 범죄를 막기에는 답답한 상황이다. 지하철 경찰대 관계자는 “성추행범에 경우 동영상으로 증거를 확보해야 나중에 범인이 발뺌하는 걸 막을 수 있기 있기에, 추행 현장을 목격하고도 바로 검거할 수 없어 시민들께 늘 죄송하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지하철 성추행범의 경우 정신이상자 경우보다는 낮에는 멀쩡하게 생활하는 사회인이 많다보니, 범행 사실이 적발되어도 “사람이 많아서 어쩌다보니 만지게 되었다”며 발뺌하는 경우가 많다는 것.

상황이 이렇다보니 임 경사는 항상 캠코더를 가지고 다니며 현장을 직접 촬영하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는다. 임 경사는 “사람이 많아서 어쩔 수 없이 접촉하는 것과 성추행을 하는 건 엄연히 다르다”며 “피해를 당한다고 느끼는 그 순간 즉시 불쾌감을 표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이어 “출·퇴근 시간에 밀폐된 공간에서 많은 사람들이 있다 보니 피해를 당하는 여성들의 경우 수치심 등으로 인해 적극적인 대처를 하지 못하고 있다”며 “피해자가 적극적으로 도움을 요청하고 주위사람들에게 이 사람이 성추행을 하고 있다고 알려줘야 한다”고 당부했다.

신고자체를 꺼려하는 상황으로 인해 지하철 내 성추행 범죄가 줄어들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임 경사는 “성추행은 친고죄이기 때문에 해당 여성들의 회피로 성범죄자가 처벌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며 “성추행을 당하고 있는 위치 등을 112에 신고를 하거나 문자 메시지를 보내면 성추행한 사람을 검거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친고죄란 피해자가 처벌을 원할 경우에만 처벌이 가능하다. 따라서 성추행범들은 피해 여성 대다수가 부끄럼 때문에 처벌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을 노려 더 뻔뻔하게 범행을 저지르기도 한다. 지하철 경찰대 관계자는 “범인 검거 과정에서 가장 허탈한 경우가 성추행을 당하고도 속으로 끙끙 앓는 여성들을 만날 때”라며 “적극적인 신고만이 성추행범을 줄이고 안전한 지하철을 만드는 지름길”이라고 밝혔다.

이에 따라 일각에선 ‘친고죄’로 가해자가 처벌받는 성추행은 ‘비친고죄’로 바뀌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오고 있다. 한국성폭력상담소 김두나 기획조직국장은 “성추행은 ‘친고죄’이기 때문에 피해자가 직접 신고하지 않으면 가해자가 처벌을 받을 수 없다”면서 “피해자가 문제제기를 해야만 처벌 받을 수 있는 성추행법은 문제가 있다”고 지적했다.

지하철 범죄를 줄이기 위해서는 정부의 제도적인 대책마련도 중요하지만 시민 스스로의 적극적인 대처도 무엇보다 필요하다.

지난 12월 15일 지하철에서 20대 여성을 때린 혐의(폭행)로 김모(29)씨가 불구속 입건된 사건이 바로 시민들의 적극적인 대처가 빛을 발휘한 경우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지난 12월 2일 오후 10시께 지하철 1호선 창동역에서 전동차에 올라타고 나서 바로 옆에 서 있던 이모(22·여)씨의 머리와 뺨을 3차례 폭행한 혐의를 받고 있다. 피해자 이씨는 김씨가 다음 역인 방학역에서 내리자 뒤따라가면서 휴대전화로 112에 신고를 했고, 김씨는 출동한 경찰에게 현행범으로 체포됐다.

[이지영 기자] sky1377@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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