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심이 나라의 근본임을 갈파한 애국적 경륜가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눌재(訥齋) 양성지(梁誠之,1415〜1482)는 세조가 ‘해동의 제갈량’이라고 평가했을 정도로 총애했던 인물로, 세종 때부터 성종 때까지 6명의 왕을 섬겼다. 300년 후 개혁군주인 정조의 정신적 스승이기도 했다. 정조는 양성지를 상소 문장이 가장 뛰어난 사람으로 꼽았다.

세종 때 집현전 부교리를 지낸 양성지는 1450년에 <비변십책(備邊十策)>을 제안하여, 국방력 강화를 촉구했다. 그러나 세종은 비답하지 않았다. 양성지는 <비변십책>에서 ▲국가의 계책을 세우는 일▲사졸(士卒)을 뽑는 일▲장수(將帥)를 택하는 일▲군량을 비축하는 일▲기계(器械)를 준비하는 일▲성보(城堡)를 수선하고 관방(關防)을 정하는 일▲근본을 장(壯)하게 하는 일▲스스로를 다스리는 일(자치)▲행성(行城)을 의논하는 일▲왜인을 비어(備禦)하는 일 등 열 가지에 걸쳐 상소를 올린 것이다.

“신이 다시 반복하여 생각하옵건대, 성을 쌓는 폐단을 제거하면 북방의 백성이 편안할 것이옵고, 왜인을 대우하는 도리를 다하면 남방의 백성이 편안할 것이오니, 군졸을 가려 뽑고 기계를 준비하며, 군량을 저축하고 성보(城堡)를 수리하며, 현장(賢將)을 택하여 이를 맡겨 상벌(賞罰)을 밝게 하여 통솔하게 하고, 안으로는 근본이 되는 곳을 튼튼하게 하고 밖으로는 대국(大國)을 섬기는 체도(體道)를 지키소서. 이렇게 하오면 내치(內治)가 지극히 잘 되어 우리나라 수천 리 산해(山海)의 험조(險阻, 지세가 험난함)와 수십만 사졸(士卒)의 힘으로 만세(萬世)토록 대동(大東)을 지킬 수 있을 것이오니, 어찌 적인(狄人, 여진족)의 침략을 두려워할 것이옵니까.”

양성지는 조선의 지리적 특성으로 볼 때 북방에 길게 뻗은 성곽인 행성(行城) 건설에 반대하고, 산성은 강대국의 침입에 맞서 지구전을 펼칠 수 있는 근거지이기 때문에 전국에 산성을 쌓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30만 양병설도 주장했는데, 이는 당 태종이 고구려를 칠 때 12만 명을 동원한 사실 등 여러 전쟁사를 연구해 작성한 것이다.

또한 양성지는 군대를 다스리기 위한 계책을 진술한 <군정 10책(軍政十策)>에서 군호(軍戶)의 중요성을 다음과 같이 강조했다. “신라의 풍속에는 전쟁에서 사망한 자는 벼슬을 한 등 올려주어 명예롭게 하고, 유가족들은 관록으로써 부양해 우대하였다. 그러니 위국진충(爲國盡忠, 나라를 위해 충성을 다함)의 용사들이 생겨남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최근 전사자에게는 특별한 은전이 없고 마땅히 주는 부미(賻米, 부의로서 주는 쌀)까지도 받기가 어렵다. 이러고서야 어찌 군졸들의 모험심을 고취시킬 수 있으랴.”

1776년 정조는 개혁정치를 추진하기 위해 왕실 도서관인 규장각(奎章閣)을 세웠다. 그런데 규장각 설치를 건의한 사람은 양성지였다. 양성지는 조정과 선비들이 펴낸 모든 서책들을 수집, 간행하여 규장각에 보관케 할 것을 건의하였는데, 이와 같은 건의가 300여 년이 흐른 후에 실현된 것이다.

정조는 양성지의 경제실용(經濟實用)의 학문을 좋아하여 자신의 정신적 스승으로 삼고, 양성지의 문집인 <눌재집>을 왕명으로 출간했다. 양성지는 자신의 호 ‘눌재(訥齋)’처럼 실제로 말을 잘하지는 못했지만, 자신의 어눌함을 항상 글로 드러내어 ‘아는 것이 있으면 말하지 않고는 못 배긴다(知無不言)’는 평을 들을 만큼 국방과 관련해 150여 건의 상소를 올린 집념의 소유자였다. 특히 고려 때 요동지(遼東志)를 인용하여 우리의 국경을 요동지방의 심양까지 확대해서 해석해야 된다고 했다.

양성지는 자주적이고 부강한 조선을 건설하려는 목표를 갖고 있었다. 이를 위해 우리 역사를 배울 것을 강조했고, 단군을 국조(國祖)로 받들고 제사를 지내자고 주장했다. 그는 조선의 안보는 명나라에 대한 사대(事大)로 지켜지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를 지켜낼 힘을 갖춰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는 국가의 일은 자치(自治)보다 큰 일이 없고, 자치의 도(道)는 민심을 잃지 않는 데 있고, 민심이 나라의 근본이라고 갈파한 애국적이고 주체적인 경륜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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