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채 빚더미 비관… 딸 살해 후 노모에게 둔기 휘둘러

생활고를 비관해 딸을 살해하고 노모를 중태에 빠뜨린 비정한 40대 가장이 경찰에 검거됐다. 서울 수서경찰서는 딸(17)을 목졸라 살해하고 어머니 최모(82)씨에게 수차례 둔기를 휘두른 김모(44)씨를 살인 및 존속살인미수 등의 혐의로 지난 3일 구속했다. 김씨는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 빚으로 경제적 곤궁에 시달리던 중 다니던 직장에서 해고를 당하자 극단적인 선택을 하고 말았다. 자신이 짊어진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딸을 살해하고 노모의 목숨도 끊으려 한 패륜가장의 굴곡진 인생 속으로 들어가 봤다.

치매에 걸린 노모는 김씨가 아무리 말리고 타일러도 동네 음식물 쓰레기통을 뒤져 음식찌꺼기를 비닐봉지에 담아오곤 했다. 4년 전 치매에 걸린 노모는 대, 소변도 가리지 못하는 등 병세는 날이 갈수록 악화되어 갔다.


음식물쓰레기 아침밥상에 격분

지난해 12월 1일 오전 7시께에도 노모가 아파트 앞 음식물 쓰레기통에서 가져온 잔반으로 아무렇지도 않게 아침 밥상을 차려 김씨에게 주었다. 김씨는 아침 밥상에 오른 음식물찌꺼기를 본 순간 엄청난 절망감에 빠졌다.

이 같은 아침 풍경에 낙담한 김씨는 아침부터 소주 반 병을 혼자 들이켰다. 갈수록 심각해지는 치매 증상을 보이는 노모와 탈선하는 딸을 떠올리며 자신의 가정 환경을 비관하기 시작했다.

어머니는 그렇다 쳐도 14년 전 아내와 이혼한 후 각별히 애정을 쏟으며 키운 딸도 김씨의 속을 썩일대로 썩였다. 김씨의 딸은 아버지의 바람과는 달리 자주 학교를 결석 하는 등 탈선의 길로 빠져 들고 있었던 것이다. 얼마 전 말다툼을 하던 중 딸이 털어놓은 한 남성과의 불건전한 이성교제는 김씨를 더 막막하게 만들었다.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던 김씨는 결국 가족 동반 자살을 결심했다. 경찰에 따르면 김씨는 같은 날 오전 8시께 방에서 잠들어 있던 딸의 목을 졸라 살해했다. 딸을 살해한 후 김씨의 눈에 둔기가 눈에 띄었다. 부엌에 있던 노모에게 다가 선 김씨는 손에 쥔 둔기로 노모의 머리를 4차례 내리쳤지만 죽지 않자 목까지 조른 것으로 밝혀졌다.

김씨는 노모가 의식을 잃자 숨진 것으로 착각하고 자신도 방에서 컴퓨터 전선과 운동화 끈 등으로 두 차례 자살을 시도했다. 하지만 실패한 김씨는 인근 야산에서 다시 두차례 자살을 기도했지만 여의치 않자 포기하고 달아났다.

노모는 이날 오후 3시께 같은 아파트 아래층에 살고 있던 김씨의 누나에게 발견돼 병원으로 옮겨졌다. 평소 중증 치매에 걸린 노모를 돌봐주기 위해 자주 집을 들렀던 김씨의 누나는 이날도 병간호를 위해 김씨의 집을 갔다 노모의 목숨을 구하게 됐다.


배상금 마련 위해 사채 손대

김씨는 이혼 이후 줄곧 생활고에 시달렸던 것으로 경찰조사결과 드러났다.

사업을 하다 실패한 김씨는 친구의 유학원에서 직원으로 일하다 부족한 생활비 때문에 알선수수료 등을 횡령했다. 고객들에게 알선수수수료 명목으로 5000만 원을 받아 챙긴 것. 이 같은 횡령사실이 발각돼 김씨는 징역형을 살다 2년 전 출소했다.

하지만 죗값을 치루는 것은 감옥에 다녀오는 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피해자들이 잇따라 민사소송을 제기한 것이다. 배상금을 마련하기 위해 동분서주 했던 김씨는 갚을 능력이 없음에도 사채에 손을 대고 말았다.

눈덩이처럼 불어난 사채 빚으로 곤경에 처하자 이른바 ‘돌려막기’로 사채 빚을 갚는 지경에 이르렀다. 청소년오락실에서 점장으로 일하던 김씨의 월급 대부분도 사채 빚으로 빠져나갔다. 김씨 가정에서 유일한 수입원은 김씨였지만 사채 빚으로 월 수입은 없는 셈이나 마찬가지였다.

김씨는 딸과의 다툼도 잦아지는 등 가정까지 순탄하지 않은 상태에서 해고까지 당하자 자신의 처지를 비관, 범행을 저지른 것으로 드러났다.

김씨의 집은 서울 강남구의 재개발이 임박한 방 한 칸짜리 33m²(10평) 아파트였다. 이 한 칸짜리 방에서 세 식구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졌다. 워낙 오래되고 낡은 이 아파트는 인근에 폐쇄회로(CC) TV가 전혀 없어 경찰은 수사에 어려움을 겪었다. 하지만 경찰은 자택에 휴대폰과 지갑 등을 놓고 사라진 김씨를 유력한 용의자로 보고 추적해왔다. 김씨가 범행 후 친인척 등 주변사람과 일체 연락을 끊고 잠적했기 때문이다.

수사를 벌이던 경찰은 지난해 12월 29일 오후 12시께 목격자의 제보로 서초동 고속터미널 부근 상가에서 걸어 나오던 김씨를 검거했다.


노숙자로 위장 도피생활

경찰조사결과 김씨는 지하철역 등에서 노숙자로 생활하며 도피생활을 해 왔고 식당가가 밀집한 상가를 돌아다니면서 손님들이 먹다 남긴 음식을 먹으면서 끼니를 해결해 온 것으로 드러났다.

경찰 검거 직후 자신이 휘두른 둔기에 숨진 줄 알았던 어머니가 무사하다는 말에 김씨는 뒤늦게 참회의 눈물을 쏟았다. 김씨는 “후회한다”고 말하며 고개를 떨궜지만 시간을 돌이킬 수는 없었다.

경찰관계자는 “자신의 생활고를 비관해 극단적인 방법으로 천륜을 져버린 범행을 선택한 것이 안타깝다”며 “주변에서 조금만이라도 김씨의 어려운 처지를 알고 도움의 손길을 건네줬다면 이런 끔직한 범죄는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라 생각된다”고 밝혔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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