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어에 목매는 사회, 필리핀 억류

어학 연수 박람회장에서 사람들이 상담을 받고 잇다.

영어 열기가 뜨거워지면서 타 영어권 국가에 비해 저렴한 비용으로 다녀올 수 있는 필리핀 어학연수 시장이 꾸준한 오름세를 보이며 성장하고 있다. 어학연수뿐만 아니라 방학기간을 활용해 4주에서 8주 단위로 필리핀에 단기 캠프를 다녀오는 사람들의 수 역시 크게 증가하고 있다.

최근 필리핀 어학연수의 문제점을 고스란히 드러낸 사건이 발생해 이 같은 열풍에 찬물을 끼얹었다. 필리핀에 자녀를 유학 보낸 학부모들의 불안감은 물론 연수를 계획 중인 학생들의 불안감 마저 고조되고 있다. 필리핀 어학연수 프로그램을 운영하는 어학원이 학업허가증(SSP: Special Study Permit)을 발급받지 않은 채 영어연수를 진행하다 적발돼 수업을 받던 한국인 초·중·고등학생 123명의 여권이 필리핀 당국에 압수를 당한 것이다. 일부 유학업체, 어학원 등에서는 “한번쯤은 터질 일이 일어 난 것”이라는 반응을 보이고 있다.

지난 13일 외교통상부(이하 외교부)에 따르면 필리핀 이민청 단속반이 지난 7일부터 12일까지 바탕가스레메리 등 마닐라 인근 지역의 어학연수 현장을 단속했다. 한국인 학생들이 SSP 없이 어학연수를 받고 있는 것을 적발, 학원 운영자 이모씨 등 14명을 이민법 위반 혐의로 이민청 외국인수용소에 구금했다. 또 어학연수를 받고 있던 한국인 학생 123명의 여권을 압수해 사실상 억류된 것이나 다름없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다.


SSP 없이 어학연수 받아

SSP은 만 18세 이하의 정규 학교 학생 또는 단기 어학연수를 목적으로 필리핀을 방문하는 외국인이 합법적으로 공부할 수 있도록 필리핀 정부에서 허가해주는 하나의 증서를 말한다.

지난 14일 주필리핀대사관은 필리핀 당국에 여권을 압수당한 한국인 학생들도 피해자임을 강조하고 여권을 반환해주고 자유의사에 따라 출국할 수 있도록 협조해줄 것을 요청했다.

외교부는 “필리핀 당국이 우선 지난 7일 여권을 압수한 한국 학생 75명에 대해 1월 31일까지 체류기간 연장을 허용하고, 동 기간 안에 본인이 희망하면 언제든지 귀국할 수 있도록 조치하겠다는 의사를 주필리핀 대사관에 전했다”고 밝혔다.

이와 함께 75명 이외에 추가로 단속돼 여권을 압수당한 학생들도 이에 준하는 조치를 받게 되며, 필리핀 당국은 외국인 수용소에 구금된 학원 관계자 이씨 등 14명을 수사결과에 따라 처리할 방침이라고 밝혔다고 외교부는 전했다.

외교부 관계자는 “SSP이 없이 어학연수를 받아 문제가 생긴 것으로 해당 학생들은 예정대로 31일까지 어학연수를 정상적으로 받을 예정이며 75명 이외의 학생들도 향후 여권을 돌려받는 것으로 필리핀 당국과 협의가 됐다”고 말하며 ‘억류’가 아니라고 강조했다.

또 “필리핀 연수를 받기 위해서는 SSP을 의무적으로 받아야한다는 것을 사전에 고지하고 충분히 설명할 예정이며 제도적으로 제재가 가능한 범위 내에서 대책을 마련할 것이다”고 밝혔다.

한나라당은 지난 15일 한나라당 박순자 국회의원을 급파했다. 박 의원은 대통령 특사로 필리핀에 다녀온 경험이 있으며, 필리핀 대통령 및 장관 등 고위 당국자들과 친분이 있어 자청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 의원은 현지로 출국해 전 대통령인 아로요 하원의원과 앙가라 상원의원 등 정부 고위 당국자를 만났다. 박 의원은 필리핀 어학 연수생 억류 문제를 원만히 해결하고 지난 18일 귀국했다.

박 의원은 같은 날 국회 브리핑에서 “압수된 학생들의 여권을 되돌려 받았고, 이달 말까지 언제라도 원하는 때 귀국할 수 있도록 보장받았다”며 “어학원 관계자들과 우리 대학생 3명 등 이민청에 수용된 9명의 즉각 석방에도 합의했다”고 밝혔다.

이어 박 의원은 필리핀 현지에서 SSP 제도가 수시로 바뀌는 등 일관성 없이 적용되고 있다고 지적하며 “SSP 제도의 정확한 가이드라인 적용기준을 마련해 어학원이 이해 부족으로 위법을 저지르는 일이 없도록 해 줄 것을 필리핀 당국에 요청했다”고 전했다.

박 의원은 “학생들이 여권을 되돌려 받는 것을 확인했으며 구금자들은 19일 오후 석방됐다”고 말했다. 이번 사태와 관련해서 박 의원은 “학부모들은 어학연수 관련 사항들을 충분히 파악한 후 연수를 보내야 할 것”이라고 덧붙여 조언했다.


SSP 발급 받지 않는 관행 존재

통상적으로 필리핀은 어학공부를 목적으로 많은 학생들이 연수를 떠나는 곳이다. 필리핀 어학연수는 크게 두 종류로 여름방학이나 겨울방학을 이용해 4주나 8주 단위로 단기로 다녀오는 것과 미국과 캐나다, 영국 등의 영어권 국가로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떠나기 전에 연계 연수 차원으로 다녀오는 것으로 나눠진다.

필리핀의 경우 장기 연수보다는 단기 연수가 선호된다. 환경이 열악하고, 영국이나 미국식 영어 발음과 차이가 많이 나는 필리핀에서 1년 단위로 어학연수를 하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한다. 이번 사건의 어학원 역시 겨울방학 기간을 활용한 4주간의 어학연수였다.

또 필리핀은 21일 무비자로 입국이 가능하다. 때문에 신혼여행 혹은 개별여행의 경우 일반적으로 21일을 넘기지 않는 경우가 많아 출입국이 자유롭다. 하지만 21일 이후에는 비자 연장이 필요하다. 1차 비자연장을 하게 되면 38일 연장이 돼 59일 간 필리핀에서 머물 수 있게 된다.

한 유학업체 관계자는 “필리핀 어학연수의 경우 방학기간을 활용한 4주간의 연수가 굉장히 많다. 단기 연수의 경우 단지 28일만 있으면 되기 때문에 SSP 신청 없이 비자연장만 하는 편법을 쓰는 경우가 많다. 어학 연수하는 사실만 걸리지 않으면 된다는 분위기 때문이다”고 말했다.

이 관계자는 이 같은 관행이 생기게 된 배경으로 어학연수를 떠나는 학생 수는 한정적인데 업체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 경쟁이 치열해진 것을 꼽았다. 필리핀 현지에서 캠프를 운영하는 업체는 서울에서만 70군데 이상이다. 업체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경쟁이 심해지고 자연스럽게 가격경쟁으로 이어지기 마련. 필리핀의 경우 4주 단기 어학연수 비용은 110만 원 선이라고 한다.

특히 신생업체는 싼 연수비용을 전면에 내세워 학생들을 유치하려고 하기 때문에 턱없이 낮은 비용을 제시해 비용의 적정선이 무너지기도 한다고 한다.

극심한 가격 경쟁 때문에 필리핀이 21일간 무비자로 입국 가능하다는 것을 악용, SSP 발급 없이 연수를 진행해 비용을 절감한다는 것이다.


경쟁업체에서 신고한 것

이 관계자는 “SSP 발급 비용은 1인당 15만 원에서 20만 원으로 100명일 경우 1500만 원 이상으로 상당한 비용이다. 비용자체를 절감하기 위해 SSP을 발급받지 않는 관행이 그동안 상당히 많았다”고 전했다. 이어 “무리한 가격 경쟁으로 SSP 비용이 가격 부담으로 작용한 업체도 있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관계자에 따르면 그동안 정당한 비용을 내고 SSP을 받는 것 대신 이민국 고위 관계자에게 현금 등 뇌물을 주는 등의 방법으로 비용을 절감하는 관행이 존재했다고 한다. 예를 들어 200명의 학생에게 필리핀 어학연수를 시키기 위해서는 적어도 3000만 원의 SSP 비용이 들게 된다. 어학원 운영자는 3000만 원의 비용 대신 이민국 고위 관계자에게 500만 원의 현금을 주고, 이민국 고위 관계자는 해당 어학원이 SSP 없이 불법 연수한 사실을 눈감아준다는 것이다.

이 관계자는 이번 억류 사태에 관한 비하인드 스토리도 털어놨다. “A 어학원이 SSP을 정상적으로 발급받고 모든 비용을 정상적으로 지불해 50여 명의 학생들을 모은 반면, 이번 사건의 어학원이 SSP 발급받지 않은 채 A 어학원보다 2배수 이상의 학생을 끌어 모은 사실에 격분해 이민국에 신고를 한 것”이라고 전했다.

이어 “이민국이 비자연장 심사를 위해 여권을 가져간 상태에서 SSP 발급 없이 영어연수를 진행한 사실을 적발해 여권을 돌려주지 않은 것이다. 학생들이 한국으로 돌아갈 날짜가 다가오는데 여권이 묶여 있느니 문제가 되는 것이다”며 “이번 사건의 어학원도캠프 운영을 잘하는 업체였다. 이 어학원 원장은 한 번도 SSP를 발급받지 않은 적이 없으며 단지 이번에 SSP를 늦게 발급받은 것일 뿐이라고 토로했다”고 전했다.


어학연수 할인 경쟁 극심

유학원과 어학원사이의 커미션에 대해서도 설명해줬다. 쉽게 말해 어학원은 제 3국에서 학생들이 공부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놓고 학생들을 모집해 공부를 가르치는 곳이다. 유학원은 전 세계 곳곳에서 운영되고 있는 수많은 어학원들의 정보를 갖고 있는 곳으로 학생들과 상담 후 학생에게 맞는 어학원을 연결시켜준다.

유학원이 학생에게 어학원을 소개해주면 해당 어학원은 그 대가로 유학원에 커미션을 주게 된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필리핀 어학연수의 경우 보통 12주 단위로 간다. 커미션은 보통 4주에 30만 원으로 12주의 경우 90만 원의 커미션을 건네게 된다. 100명을 보내면 900만 원의 커미션을 주게 되는 것으로 커미션 액수도 무시 못 한다”고 말했다. 또 “전국에 유학원이 700여 개 정도로 유학원 역시 경쟁이 치열하다. 유학원은 어학원이 주는 커미션으로 연수비용을 할인하는 등 어학원과 유학원의 할인 경쟁이 극심하다”고 전했다.

필리핀의 경우 준비할 것이 여권 이 외에 별다른 것이 없어 절차도 간소하다고 한다. 때문에 필리핀 연수를 다녀와서 필리핀을 대상으로 하는 유학원을 차리는 경우도 많다고 한다. 이 같은 업체들이 최근 들어 급증해 전문성을 갖춘 유학원들 사이에 커뮤니티사이트 카페나 블로그 등을 통해 학생을 모집하는 업체가 난립하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필리핀 어학연수 수요는 여전

필리핀에 학생들이 사실상 억류되는 사태가 발생했음에 불구, 필리핀 어학연수를 진행하고 있는 어학원과 유학원은 사실상 큰 타격은 입지 않았다고 한다.

이 관계자는 “조기교육 열풍으로 어학연수를 다녀오지 않은 학생이 없을 정도다. 때문에 내 아이만 못 갔다는 불안함 때문에 필리핀이 치안이 불안하다는 인식이 있긴 하지만 저렴한 비용으로 1:1 수업을 받을 수 있다는 장점으로 인해 필리핀 어학연수 수요가 꾸준히 증가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이번 사태로 인한 여진은 물론 있다. 필리핀으로 자녀를 어학연수 보낸 부모들이 자녀들이 무사한지를 문의하는 전화가 빈발했고 취소하는 사례도 있었다. 하지만 이런 것은 일종의 분위기로 이번 사건으로 오히려 자신들은 안전한 업체에 보냈다고 안심하는 부모들도 많다”고 전했다.

이와 함께 “이번 사태는 업체를 보다 신중하게 선택하지 못한 부모나 학생들의 잘못도 있다. 또 모든 비용을 한국에서 지불하고 해외로 나가도록 관행이 개선될 필요가 있다. 또한 어학원과 유학원 동종업계끼리 페어플레이 하자는 분위기가 형성되는 것이 급선무”라고 지적했다.

[최은서 기자] choies@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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