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공 청문회 여야 국회의원 첩보전 ‘방불’


여당 의원들 사이에서는 야당 의원들이 자료만 흔들면 “저건 또 뭐야? 또 무슨 자료지?”하고 수근거렸다. 도대체 저 자료들은 땅에서 쏟은 거냐 하늘에서 떨어진 거냐 알 수 없었다. 그러다 보니 청문회에 임하는 여야의원들은 자료수집에 치열한 첩보전을 방불케 했다. 무슨 정보가 하나 들어 왔다하면 자료가 샐까봐 보좌관들에게 조차도 맡기지 못한 채 직접 의원들이 모든 자료를 쌓아 안고 다녔고 밤새 자료 검토를 하고 토론하곤 했다. 그러나 막상 청문회에 나가보면 또 생각지도 않았던 새로운 정보가 야당의원들에 의해 터져 나오고…. 하여튼 필자를 포함해 모든 5공 특위 여당 의원들은 그때만큼 밥먹듯이 밤새워가며 열심히 공부해본 적도 없을 것이다. 학창시절 시험공부할 때 보다 더 열심이었던 것 같다.

일부 국민들의 관심은 ‘광주특위’에 더 관심이 쏠렸을 지 몰라도 정작 더 심각하고 더 파문을 일으킨 것은 ‘5공비리조사특위’활동이었다. ‘광주특위’경우에는 누가 시민들에게 총을 발사 했느냐 또 누가 지시 했느냐가 초점으로 피해자 가족들의 울부짖음과 억울한 죽음에 대한 책임자 처벌과 보상 문제가 중점이었다.

그러나 ‘5공비리특위는’ 사건의 숫자도 헤아리기가 힘들 정도 였다. 예컨대 명성사건, 청남대에 보관된 각종 자산 내용과 처분 문제, 장영자 사건, 일해재단 문제, 대통령 부인 이순자씨가 경영하던 삼성 재단 문제, 한화 에너지 문제, 선경(SK)이 유공을 인수한 배경 조사, 국제상사 해체 경위 등등 무수히 많은 사건과 관련자들의 증인채택과 연루된 사람들을 청문회에 출석시키는 문제들이 보통 어려운게 아니었다.

또 일부 증인과 참고인들이 출석치 않아 사법당국에 연행을 의뢰하기도 했다. 과연 증인과 참고인들의 폭이 어디까지인지 사건에 개입했다면 그 개입의 정도는 어디까지 영향을 미쳤는지 참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동안 각종 언론이나 잡지등에서 ‘소문’으로 떠돌던 모든 사건이 다 ‘조사대상’으로 상정 되었다.


사건 100여 건에 증인 300명 달해

처음에는 각 당이 요구하는 사건을 모두 합쳐보니 무려 100여건 이었다. 이것을 조정하고 또 조정하여 34건으로 압축을 했고 나중에는 다시 20여건으로 축소된 것으로 기억된다. 결국 청문회 기간 동안 최종 마무리 된 사건은 10여 건에 불과 했다.

불러야할 증인도 모두 올려놓고 보니 300여 명에 달했다. 참고인 까지 합치면 그 배가 되는 숫자였다. 이일을 제대로 하자면 국회의원임기가 끝날 때 까지도 다루기가 어려울 정도의 숫자였다. 증인 역시 줄이고 줄여 결국은 100여 명으로 압축을 했고, 참고인 등도 그 안에 포함 시켰다. 증인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대한민국에서 ‘좀 난다 긴다’하는 알만한 사람들은 거의 다 올라와 있는 형편이었다. 결국 조사 범위가 넓다보니 다시 그 안에서 4개 분과로 나뉘었다. 삼청교육대 분과, 금융조사분과 등등 이었다. 필자는 과거 금융계에서 종사한 경험과 국회재무위원회 등에서 의정 활동을 했던 것이 인연이 되어 금융조사분과 위원회 위원장을 맡았다. 청문회 하면 떠오르는것은 이른바 “청문회 스타”라는 말이 있는데, 이 스타 중에는 재미있는 사람도 많았다. 당시 일해재단 사건은 그 기금조성에 얽힌 강제성 여부문제로 (고,정주영)회장을 증인으로 채택했다. 증인 심문을 하는데 모 야당 중진의원(본인의 명예로 독자들게 성명을 밝히지 못함을 이해를 구합니다.)이 “증인님!”이라 불러 청문회장을 일대 소란으로 몰고 오기도 했다. 결국 그 의원은 교체되고 말았지만 무엇이 오고 갔다는 소문이 끊이질 않았다.

당시 고 정주영 회장의 답변 중 큰 파문을 일으킨 내용도 있었다. 뭐라 딱 꼬집어 말하는 것도 아닌데 일해재단 건립비용을 낸 것에 대한 의원들의 질문이 빗발쳤다. 결국 강제성 있는 모금이었느냐가 초점이었다. 당시 정 회장은 목적이 좋아 자진해서 돈을 냈다고 했다. 그러나 야당 의원들이 그냥 듣기만 할 분들인가. 계속 강제적 요구가 있어 내라고 해서 낸 것 아니냐(?)를 집요하게 따지고 물었다. 당시 정 회장은 마지 못해 “나는 장사하는 사람인데 이유 없는 곳에 돈을 냈겠는냐?”고 발언했다.


정주영 “이유없는 곳에도 돈 냈을까”

이것이 빌미가 되어 야당은 강제성 있는 모금이라 했고 여당은 증거가 없는데 어떻게 강제라고 할 수 있느냐며 본인이 자진해서 낸 것이다고 주장, 여야간 청문회 보고서 작성을 놓고 장시간 다투었던 것이 기억난다. ‘심증은 가나, 물증은 없다’는 말이 유행 되기도 했다. 반면에 증인이 의원들에게 큰소리 친 경우도 가끔 있었다. 대부분의 증인들은 의원들의 추상(?)같은 호통에 쩔쩔매는 분들이 많았는데, 허화평씨나 장세동씨 등은 조리있게 따지면서 반론을 전개하는 바람에 심문하는 의원들이 오히려 더 당황스러운 모습을 한 경우도 있었다. 어쨌거나 그런 결과로 그들 역시 증인으로 이른바 ‘청문회스타’ 반열에 올랐으니, 참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아무튼 세상에 떠돌던 소문이라는 소문은 다 조사대상으로 올라와 있다 보니 웃지 못할 일도 참 많았다. 소문은 역시 소문으로 끝나는 경우도 많았고 또 청문회 과정에서 의외의 사실이 밝혀지기도 했다.

[다음호에 계속]

[장경우 전 국회의원] kwa815@naver.com


#프로필

●1942년 4월 12일생
●경기중·고/고려대 경영 졸
●대한축구협회부회장
●대한수영연맹 명예회장
●제 11·13·14 국회의원
●한국캠핑캐라바닝연맹 총재(현)
●세계캠핑캐라바닝연맹 아·태 지역위원회 의장(현)



[고침]장경우 전의원 외고 기사中
본지 876호 12면 ‘장경우 전 의원이 본 정치 30년’ 외고에서 5공스타 3인방중 김동주, 김봉호 전 의원의 이름이 잘못 나가 바로잡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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