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소문의 힘으로 ‘고려판 정신대’ 공녀제도 폐지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나라가 힘이 없으면 백성들, 그 중에서도 부녀자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는다. 고려가 원나라의 부마국이었던 ‘원간섭기’(1259~1356) 시대의 비극적 산물의 하나인 ‘공녀(貢女)’는 여자 공물이라는 뜻으로, ‘동녀(童女)’라고 표현되는 주로 13세에서 16세까지의 앳된 소녀들이었다.

1274년(원종 15년)에 고려 조정에서는 ‘결혼도감’을 설치하여 140명의 공녀를 원나라로 보낸 것을 시초로, 이후 60여 년간 50여 차례에 걸쳐 공녀를 보냈다. 공녀에 뽑히지 않기 위해 조정의 금혼령이 내려지기 전에 미리 혼인시킴으로써, 13세가 되기 전에 혼인을 서두르는 조혼(早婚)의 풍습도 이 때 생겨났다.

공녀가 원나라로 떠나갈 때 딸을 잃은 백성들의 울음소리가 하늘과 땅을 뒤흔들었으며, 산천초목도 서러워서 울었다. 이를 보는 사람들도 슬퍼서 탄식하지 않은 자가 없었다. 사랑하는 임과의 이별은 언제나 두려운 법. 공녀문제로 인한 남녀의 이별을 노래한 <가시리>도 이 암울한 시대상을 대변한다.

가정(稼亭) 이곡(李穀, 1298-1351)은 이제현의 문인으로 1333년 원나라 정동성 향시에 수석으로 급제하였다. 문장에 뛰어나 <죽부인전>을 지었으며, 백이정·우탁·정몽주 등과 함께 경학(經學)의 대가로 꼽힌다.

1336년 (충숙왕 복위 5) 봄. 이곡은 원나라에 들어가 정동행중서성좌우사원외랑 벼슬을 제수 받고, 인종 황제에게 동녀구색(童女求索)을 중지하도록 상소문을 올렸다.

“고려의 풍속을 보면, 차라리 아들을 별거하게 할지언정 딸은 내보내지 않으니, 이는 옛날 진(秦)나라의 데릴사위와 비슷한 점이 있다고 할 것입니다. 그래서 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딸이 주관하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애정을 쏟아 돌보면서 얼른 자라나 자기들을 봉양해 주기를 밤낮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그런데 하루아침에 그 딸을 품 안에서 빼앗겨 사천리 밖으로 내보내고는, 그 발이 한번 문 밖으로 나간 뒤에는 종신토록 돌아오지 못하고 있으니, 그 심정이 과연 어떠하겠습니까?

공녀로 뽑히면 부모와 친척들이 서로 한 곳에 모여 곡(哭)을 하는데, 밤낮으로 우는 소리가 끊이지 않습니다. 공녀로 나라 밖으로 떠나보내는 날이 되면, 부모와 친척들이 옷자락을 부여잡고 끌어당기다가 난간이나 길바닥에 엎어져버립니다. 비통하고 원통하여 울부짖다가 우물에 몸을 던져 죽는 사람도 있고, 스스로 목을 매어 죽은 사람도 있습니다. 근심 걱정으로 기절하는 사람도 있고, 피눈물을 흘려 실명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아! 우리 고려사람 무슨 죄가 있어 이 괴로움을 언제까지 당해야 한다는 말입니까?” 이 애절한 상소를 접한 원나라 황제는 감동하여 앞으로 고려의 공녀제도를 없애겠다는 화답을 했다. 상소문의 힘으로 고려판 정신대로 불리는 공녀제도를 폐지(1337년)시킨 것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고려 여인의 수난은 계속되었다. 결국 20년이 지나 공민왕이 즉위한 후, 이제현이 1356년(공민왕 5)에 반원 개혁정책을 실시하여 고려가 주권을 회복한 다음에야 공녀제도가 완전히 폐지되고 고려 여인들은 성적 수난에서 해방될 수 있게 된다.

이곡의 상소문은 우탁의 지부상소와 이제현의 입성책동 반대 상소와 함께 우리 역사상 가장 가치 있는 상소문 중 하나로 평가된다. 이 상소문을 통해 고려시대까지 가정에서 남녀가 평등했고, 때로 여성이 우위에 있기도 했다(부모를 봉양하는 일은 전적으로 딸이 주관했기 때문에…)는 시대상황을 엿볼 수 있다.

이곡은 이제현의 제자이자 목은 이색의 아버지다. 토정 이지함이 그의 8대손이다. 이곡과 이색 부자는 모두 원나라 과거에 합격해 벼슬살이를 하면서 문명(文名)을 중원에 떨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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