각종 병폐에 물든 영화계 충격실태

시나리오 작가겸 영화감독이었던 고 최고은씨 자살 여파가 가라앉지 않고 있다. 영화를 비롯한 예술계의 시스템 문제와 소외 계층에 관한 사회 복지문제가 다시금 거론되고 있다. 정치권에서는 지난 2월 27일 일명 ‘최고은법’으로 불리는 ‘예술인 복지 지원법’안을 처리키로 합의했다. 예술인 복지 지원법은 예술인들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법이다. 그러나 예술인들은 예술인의 보호, 육성, 권익에 관한 정책이 새롭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최씨가 몸담았던 영화계. 그곳에 소속된 이들은 최고은 사건과는 또 다른 직접적인 피해를 증언했다. 스태프, 드라마 보조 작가, 시나리오 작가를 거친 A(31`·여)씨의 경험담을 통해 영화계 문제점을 들여다봤다.

A씨는 5년 전, 한 해 동안 저예산영화 스탭으로 일했다. A씨는 촬영 현장 체크와 기록을 담당하는 스크립터를 맡았다. 저예산 영화는 비용을 아끼느라 스태프 구축을 제대로 하지 않는다. 10명이 해야 할 일을 5명이 처리할 때도 있다. 그것이 과해지면 한 사람이 몇 가지 분야를 맡기도 한다. A씨의 경우가 그랬다. 때문에 불합리한 일도 왕왕 발생하지만 당시 영화계에 처음 발 딛은 A씨는 그 점을 모른 채 수행해 나갔다. 프리 프로덕션(촬영에 들어가기 전 준비하는 모든 작업)은 한 달 간 이뤄졌고 촬영은 시작됐다. 이후 A씨는 전쟁 같은 나날을 보냈다.


동료가 아닌 소모품

A씨는 매일 스태프를 깨우는 일로 하루를 시작했다. 새벽 6시, 혹은 새벽 2, 3시에 깨우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곤 분장, 장비 팀을 도와 촬영 준비를 했다. A씨의 주된 업무는 스크립터이기에 촬영이 시작되면 컷 사이사이의 연결, 한 컷의 시간 등을 체크했다. 오후와 저녁도 비슷하게 반복됐다. 스크립터 하나도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부족한 지원금은 A씨를 더 힘들게 했다. 피로와 예민함 때문에 스태프 간에 다툼 또한 빈번했고 A씨는 일주일동안 잠을 못자기도 했다.

하지만 A씨는 “저예산 영화라 어쩔 수 없나보다” 하는 생각에 고된 일을 태연히 시켰던 제작사를 원망하지 않았다.

두 달이면 끝난다는 촬영은 기간이 점차 늘어났고 140만 원을 계약했던 A씨는 제작진에게 “미안하지만 돈이 정말 없다, 원한다면 그만둬도 좋다”라는 말을 들었다. 그러나 하던 작업은 마무리 하고픈 마음에 A씨는 열 달이나 불어난 촬영 기간 동안을 묵묵히 수행했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 A씨는 그들이 돈이 없다고 말한 이유를 알게 됐다. 제작사가 사이사이 뒷돈을 챙긴 것.

그 소식에 심한 배신감을 느꼈다는 A씨는 “돈이 없다고 해서 나는 100원 까지 털어주겠다는 애착으로 임했는데 누구는 뒤에서 10만 원씩 챙긴 꼴이 됐다”며 “‘믿지 말고, 뺏기지 말라’던 주변의 말이 무엇인지 알게 됐다”고 말했다.

A씨는 “몇 년이 지난 일이지만 이 같은 불량 제작사가 여전히 많다”며 “영화에 대한 열정을 그렇게 이용하는 이들의 행동은 처벌받아야 마땅하다”고 성토했다.

또 A씨는 “현장은 고생일 수밖에 없다. 못 씻고 못 들어가는 건 기본, 어떤 이들은 고생을 하고 싶어서도 들어온다”며 “고생한 것 자체를 불만 삼진 않지만 최소한의 노동의 대가도 받지 못한다면 억울하지 않나”라고 허탈해했다.


신인 피 빨아먹는 정모씨

A씨의 피해 사례는 이뿐 아니다. A씨는 지난해 초부터 드라마 보조 작가와 시나리오 준비 작업을 병행했다. 필름메이커스를 통해 정모씨와 이어진 것. 필름메이커스는 영화 커뮤니케이션 사이트로 정보 교환, 구인구직 등이 이뤄지는 사이트다. 정씨는 필름메이커스에서 왕성한 활동을 하고 있는 작가라고 자신을 소개했다.

기존에 썼던 A씨의 창작물이 마음에 들었던 정씨는 A씨를 보조 작가로 고용했다.

드라마 대본 팀은 들어온 A씨 외에도 몇 명 더 있었고 A씨는 함께 작업을 시작했다.

정씨를 제외한 이들은 밤낮 드라마 대본을 썼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그들이 쓴 C드라마 기획안이 모 케이블 채널에 채택됐다. 1부 대본을 넘기고 배우를 비롯한 스태프 캐스팅작업 또한 진행됐다.

준비 작업이 한창일 때 정씨는 A씨에게 “시나리오도 해보지 않겠느냐”란 말을 했다. 드라마가 문제없이 추진될 것 같은데 한 가지 일을 더 해보지 않겠냐는 것이다. 정씨는 성공 가능성이 높은 기회니 다른 작가들에게 비밀로 하겠다는 조건을 받아들인다면 합류시켜 줄 수 있다고 A씨를 설득했다.

A씨는 다른 이들과의 갈등이 걱정되면서도 정씨의 제한을 수락했다.

시나리오 팀 역시 B씨가 이미 팀원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그렇게 A씨는 드라마 편성을 위한 대본 작업과 시나리오 보조 작업을 병행했다.

하지만 배우를 비롯한 스태프까지 확정된 C드라마가 3회 대본을 넘길 때 무산됐다. 이제 새로운 작품을 준비해야 하는 A씨를 비롯한 이들은 정씨의 지속적인 요구대로 드라마, 시나리오를 작업했다.

그렇게 시놉시스, 트리트먼트(시놉시스 이후 단계로 A4용지 15장~70장의 분량)를 정씨에게 넘긴 A씨에게, 어느날 B씨는 정씨의 전과를 털어놨다.

그가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의 글을 전문적으로 빼가는 사기꾼이며 공모전 상까지 몇 차례 가로챈 인물이라는 것이다. B씨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이번 줄거리에 대한 기대 때문에 합류했다고 말했다.

정씨의 지망생 착취 행각은 상상 이상이었다. 여러 개의 아이디를 사용해 구인광고를 올리는 등의 수법으로 지망생의 아이템과 작품을 여지없이 빼갔다는 것이다.

A씨는 “반년 이상 그를 믿고 글만 쓰다 나중에 속은 것을 알고 폐인이 된 이들도 있는 것으로 안다”며 “힘은 없지만 의욕이 큰 지망생들이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정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시나리오 토론 카페를 통해서도 아이템과 작품을 빼갔다. 가르쳐준다는 명목 하에 돌려 보면서 괜찮은 작품을 물색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스운 사실은 정작 정씨는 글을 쓸 줄 몰랐다는 것이었다고 A씨는 말했다. 수많은 지망생들의 창작물을 자신의 것인 양 속이면서 ‘작가’인척 했다는 것이다.

A씨는 “같이 일하면서 정씨가 글을 작성하는 적을 본 적이 없었고, 수정한 내용도 도저히 경력자로 볼 수 없는 수준이었다”고 말했다.

이런 정씨의 행태는 괘씸하지만 피해자들은 소송과 진실 공방을 통해서만이 진실을 증명할 수 있다. 시나리오 작가 지망생들은 비용과 정신적 스트레스가 부담돼 적극적인 고발을 꺼리고 있었다.


스태프, 작가들의 수난시대

A씨는 이후에도 영화감독 신모씨에게 시나리오 저작권 무단 갈취와 임금 체불을 당하고, 제작사에게 편법 계약서 피해를 입었다.

A씨는 “스태프들과 시나리오 작가들의 스트레스는 일적인 것만 있는 것이 아니다”라고 하면서 “일부 작가들이 터무니없는 조건과 가격에도 일해 주는 것이문제다”라고 말했다.

A씨는 시스템의 맹점도 지적했는데 이를테면 제작사, 투자 배급사 간의 통계약 병폐 개선을 위한 ‘부분 계약’은 또 다른 단점을 양산했다. 부분계약을 할 경우 원작자는 아이템 제공, 초고 만에 계약 해지될 수 있다는 것이다. 2고, 3고를 진행할 실력이 되도 다른 이유가 맘에 들지 않아 해지 되는 경우도 있었다.

A씨는 “많은 경쟁 속에서 써주는 것 자체가 고마운 것은 사실이지만 작가들은 자신들의 가치에 대한 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자신보다는 뒤에 이어질 후배들의 여건을 위해 일정가격 이하로는 계약하지 않는 선배를 예로 들었다.

하지만 영화산업의 인기 때문에 현실은 그렇게 하기 쉽지 않다. 할 사람이 많아 무명 신인이 구체적 계약서를 요구했다간 거절당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여전히 대부분의 스태프와 작가들은 제작사에게 혹은 투자 배급사에게 휘둘리고 있다.

[이창환 기자] hojj@dailypot.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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