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잘못된 점 일곱가지… 폐정 개혁 요구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율곡(栗谷) 이이(李珥, 1536~1584)는 어머니 신사임당과 함께 지폐 4종 중 오천 원과 오만 원 권을 장식하고 있으니, 모자(母子)가 동시에 지폐 인물로 선정된 사례는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사례다. 그 이유는 율곡이 시대가 지나도 역사적 평가가 변하지 않을 위인이기 때문이다.
조선의 선조 대는 퇴계와 율곡으로 대표되는 사림정치와 성리학이 꽃을 피운 시기였지만, 사림 간의 갈등으로 붕당이 출현하였다. 당시는 조선 건국 후 200년이 지나 각종 제도와 관행 등에 폐단이 있었다. 율곡은 이를 ‘위기의 시대’로 규정하고 국가운영체계의 혁신을 통하여 새로운 기풍을 조성하지 않으면 나라를 유지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진단하였다.


우리 역사상 가장 많은 상소를 올린 선비가 율곡이다. 율곡은 홍문관 교리 때 을사사화 때 화를 입은 사림의 신원을 위해 41번이나 상소를 올린 끝에 선조의 동의를 얻어낼 정도로 집요한 면이 있었다.

율곡이 우부승지 재직 시 39세에 올린, 선조의 도량이 넓지 못하고 공부가 부족해 문제라는 ‘만언봉사(萬言封事)’는 ‘세상의 잘못된 점 일곱 가지’를 일만 자로 쓴 상소문이다.

▲위와 아래가 서로 믿지 않는다 ▲신하들이 일을 책임지지 않는다 ▲경연에서 성취되는 실상이 없다 ▲현명한 사람을 등용하지 않는다 ▲재변을 당하여도 구제할 대책이 없다 ▲여러 가지 정책에 백성을 구제하는 실상이 없다 ▲인심이 선(善)을 지향하는 실상이 없다 등으로 요즘 우리 정치현실에도 딱 들어맞는 지적이다.

율곡은 선조에게 폐정(弊政) 개혁을 서릿발 같이 충간(忠諫)한다.

“조선은 하루가 다르게 붕괴되어가는 한 채의 집입니다. 지금 나라가 나라가 아닙니다. (중략) 지금 전하께서는 근신(近臣)보다 더 가까운 신하가 없는데도 환관으로 사사로운 신하로 삼고 계시며, 만백성보다 더 많은 백성이 없는데도 내시들로 사사로운 백성을 삼고 계십니다.”

율곡은 이에 대한 처방전을 제시한다.

“환관들이 임금을 가까이 모심을 믿고 조정의 신하들을 가벼이 여기게 하지 말 것이며, 만백성을 한결같이 보시어 내시들이 임금을 사사로이 모심을 믿고 엿보아서는 안 될 일을 엿보게 하지 마십시오.”

율곡은 상소의 머리말에 “정사란 때를 아는 것이 귀하고, 일은 실질에 힘쓰는 것이 중요하므로, 이것이 맞지 않는다면 성스러운 임금과 어진 신하가 만난다 하더라도 치적이 이루어지지 않는다”고 강조하였다.

율곡의 ‘만언봉사’는 조선왕조에 있었던 ‘상소문 중의 상소문’으로 후대 학자들의 사랑을 받았으며, 시대 상황에 맞는 제도와 법을 만들어 백성의 삶을 돌보라고 주장한 ‘시의론’과 ‘변통론’이 그 핵심이다.

율곡은 상소의 말미에 자신의 건의를 채택하여 국정을 개혁한다면 반드시 3년 이내에 새로운 나라가 될 것이라고 장담하고 있으며, 그렇게 되지 않을 경우 자신을 기망(欺罔)의 죄로 다스려 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나 당쟁이 격화됨으로써 이 상소문은 빛을 보지 못하였다.

만약 선조가 율곡의 상소를 채택하여 개혁정치(경장)를 실행하고, 병조판서가 된 율곡이 임진왜란 발발 9년 전(1583년)에 ‘시무육조계’(時務六條啓)에서 주장한 ‘십만양병설’을 받아들였다면, 임진왜란 같은 미증유의 국난을 당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일이다.

율곡은 우리나라 18대 명현(名賢) 가운데 한 분으로 문묘(文廟)에 배향되어 있다. 그는 창업과 수성을 거쳐 경장기에 들어선 조선의 구조적인 문제를 통찰하고 대안제시를 통해 시대를 개혁하고자 한 사상가였다. 그가 보여준 학문을 대하는 올바른 자세, 홍익인간의 대동사회 건설, 미래를 예견하고 준비하는 유비무한의 자세 등은 오늘의 위정자들이 배워야 할 덕목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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