통치자의 수기치인(修己治人) 담아 성군의 길 제시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퇴계(退溪) 이황(李滉, 1501~1570년)은 조선시대 선비를 대표하는 학자이자 지식인이며, 동양 3국 도의철학(道義哲學)의 건설자이며 실천자이다. 퇴계의 사상은 일본 성리학에도 큰 영향을 끼쳤다. 그는 ‘귀거래사’를 지은 도연명의 시와 삶을 좋아했으며, ‘청백리’로 관직에 있을 때는 늘 고향으로 돌아가 학문을 하며 조용히 지내고자 했다.

무진년(1568년) 선조가 17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68세의 퇴계는 대제학·지경연(知經筵)의 중임을 맡고 7400여 글자 6조목으로 된 ‘무진육조소(戊辰六條疏)’를 올렸다.

선조는 “경의 도덕은 옛사람과 비교해 보아도 따를 사람이 적을 것이다. 이 6조목은 참으로 천고의 격언이며 지금의 급선무이다. 내 비록 하찮은 인품이지만 어찌 가슴에 지니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선언했고, 상소의 내용을 도표로 그려 병풍을 만들고 다스림의 표본으로 삼았다.

군왕이 갖춰야 할 덕목과 몸가짐을 정리한 ‘무진육조소’는 율곡 이이의 <만언봉사(萬言封事)>와 더불어 조선시대 성리학의 정치이념을 잘 드러내는 저술로, ‘6가지 내용’으로 요약된다.

▲지난 임금들의 뜻을 이어받아 인과 효를 온전히 할 것 ▲아첨하는 말로 이간하는 자들을 막아 양궁(兩宮)이 친하게 지낼 것 ▲성학으로 다스림의 근본을 세울 것 ▲도덕과 학술을 밝혀 인심을 바로 잡을 것 ▲충성되고 어진 신하를 찾아 눈과 귀를 통하게 할 것 ▲모든 다스림에 있어 하늘의 사랑을 이어받을 것
“조정의 신하들 가운데 바른 사람을 질시하고 남을 기피하여 틈만 나면 일을 저지르는 자는 단연코 미리 눌러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스스로 현명하고 착한 사람들을 멀리하고 서로 배척하게 되면 도리어 손해를 보게 될 것입니다. 오직 보수적이고 상리(常理)만을 지키는 신하에게만 의지하면 새로 분발하고 진작하여 잘 다스리는 데 지장이 있을 것이며, 반대로 지나치게 진취적이고 새로운 것만을 좋아하는 자에게 일을 맡기면 자칫 기존질서가 문란해질 것입니다.”

이 ‘무진육조소’에는 군주가 국가를 경영함에 있어 갖춰야 할 리더십이 빠짐없이 담겨있어 통치자의 수기치인(修己治人)을 담아 성군의 길을 제시한 ‘동양판 군주론’이라고 할 수 있다.

먼저, 퇴계는 선조에게 “세(勢)를 갈라 많은 것을 다투고 작은 것을 비교하는 통에 은원(恩怨)이 생기고, 이해(利害)가 등 뒤에서 결정됩니다. 보통사람에 있어서는 말 할 것도 없고 제왕의 가정에 있어서도 이런 폐단이 많습니다”라며 이간하는 자를 경계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아울러. 퇴계는 선조에게 “성학(聖學)으로 정치의 근본을 삼고, 도덕과 학술로 인심을 바로 잡으십시오. 충성되고 어진 신하를 찾아 중요한 자리를 맡기고, 맡긴 이후에는 두 마음을 갖지 말고 믿음을 가지십시오” 라고 당부했다.

비교적 늦은 나이인 34세에 출사한 퇴계는 평생 부와 명예보다 학문을 가까이하며 청빈과 무욕의 리더십을 몸소 실천했다. 퇴계는 70세에 타계하기 2년 전 제자에게 왜구의 창궐을 걱정하는 편지를 보냈다. “남쪽 바다에 왜구의 흉한 기운이 날뛰니 나라가 장차 무엇으로써 이 캄캄한 밤의 한탄을 막아 낼 것인가 알 수 없다. 산골의 벽촌도 견딜 수 없겠거늘 하물며 나라 강토를 어찌하면 좋으냐.” 사후의 국가적 환란을 걱정한 대학자의 예지력이 돋보인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유가의 종주로서 조광조 뒤로는 퇴계에 비할 사람이 없었다. 퇴계의 재주와 국량은 조광조를 따르지 못하나, 의리를 깊이 연구하여 지극히 정미한 점에서는 조광조가 퇴계를 따르지 못할 것”이라고 퇴계에 대한 깊은 존경심을 드러냈다. 다산 정약용은 “도가 천지간에 가득 차 있으니 퇴계 선생의 덕은 높고 크다”고 언급했다.
ilyo@ilyoseoul.co.kr 

저작권자 © 일요서울i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