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애 처음 마주하는 예술가의 상상 이상 민낯

[일요서울|이창환기자] 음악평론가 강헌의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음악사 속 주목해야 할 혁명적 순간을 담고 있다. 얼핏 대중예술 분야에 어울리지 않는 책 제목처럼 느껴지지만, 강헌은 제목의 무게 감당하고 거의 완벽하게 구체화했다. 독자들이 가진 잘못된 정보를 바꾸려는 듯 냉정한 시선으로 예술의 환상과 거품을 걷어냈다. 그의 수십 년 내공이 집약된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독자들을 쉽고 새롭고 재미있는 음악사로 데려간다. 비판과 조롱에 성역을 두지 않는 태도 때문에 클래식 음악가와 대중스타에게 한걸음 가까이 다가갈 수 있게 된다. 강헌을 만나 위대한 음악을 만든 예술가들의 민낯과 한국 현대사와 음악사의 비극적이고도 기묘한 관계에 대해 들었다. 음악평론가로서의 과거와 현재를 물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음악사를 통해 역사와 현실을 알게 해준다. 책을 낼 수 있는 내공과 기초는 언제부터 가지고 있었나.
▶20년 전 음악 평론가로 활동할 때부터 대중음악의 미학적 가치와 역사 사회적 가치를 동시에 바라봐야 한다는 글을 쭉 써왔다. 목표는 대중음악, 클래식, 한국음악으로 구분된 장르를 해체하고 그 경계를 극복하는 것이었다. 대학로 ‘벙커1’에서 강의를 시작했고 강의의 결실을 묶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통해 베토벤, 모차르트, 비틀즈, 엘비스 프레슬리, 밥 딜런, 살리에르 등의 현실을 알게 됐다. 위인전으로 처음 접한 음악가들, 잡지를 통해 단편적으로 습득한 스타들의 일방적인 위대함이 전복됐다. 전복의 순간을 겪은 후 음악 접하는 관점이 바뀌게 된 것인가.     
▶교육 문제이기도 하지만 우리는 모두 천재주의 사관에 익숙하다. 익히 알고 있는 클래식 음악가들은 보통 사람과 다르고, 특별한 재능과 소명을 하늘로부터 부여받고 태어났다는 식으로 배웠지만 그렇지 않다. 그들도 우리와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모차르트와 베토벤도 정규직이 되기 위해 필사적으로 몸부림쳤으나 이루지 못했다. 베일 속에 감춰진 예술가의 신비화를 벗기고 민낯을 들여다볼 때 음악에 대한 이해도 깊어진다. 단순히 객석에서 동경의 시선을 가지고 볼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음악 역시 많은 약점을 가진 인간이 몸부림치며 피와 땀으로 만든 노동의 생산물에 불과하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이 같은 인식 속에서 음악은 더 진실 되게 들릴 것이다. 나도 그랬다. 예를 들어 ‘이 대목에서는 힘센 놈들한테 잘 보이려고 온갖 기교를 썼구나.’, ‘이 대목에서는 감췄던 욕망이나 억울함을 가감 없이 표출하려 했구나.’라는 이해다. 이 같은 관점이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지는 게 좋지 않을까 생각했다.

-예술가의 민낯을 볼 때야 비로소 들뜬 감정 따위의 감동 이외의, 다른 면을 느낄 수 있게 되는가.
▶그렇다. 우리는 현실을 살면서 많은 판단을 한다. 정치적, 사회적, 경제적 판단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런데 꼭 문화에서만 이성적인 판단을 해선 안 된다는 법이 없다. 지지하는 정치가의 좋은 점만 바라보고 무조건 지지한다면 어떻겠나. 문화 예술도 마찬가지다.

-방금 천재주의 사관을 얘기했는데, 미국과 영국을 비롯한 서양도 마찬가지일까. 상업적으로 많이 팔기 위해 환상을 심어주는 것인가.
▶천재주의 사관의 출발점은 서구다.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는 예술을 사회, 현실로부터 분리하려는 부르주아 계급의 속내에 있다. 예술에서 현실을 제거할 때 계급적 지배가 훨씬 쉽다고 봤다. 사실 베토벤은 굉장히 혁명적인 인간이며 공화주의자지만 그들은 음악사에서 그것을 강조하지 않는다. 그냥 악성, 하늘이 보낸 천재라고만 설명한다. 예술의 신비주의는 탈정치화가 목적이다. 두 번째는 상업화다. 대중문화 시대가 열리고 난 후에도 스타를 신비화시키는 작업은 계속됐다. 그렇게 해야 멍청한 대중들이 돈을 더 쓰기 때문이다. 대중을 멍청한 상태로 놓여있게 하려는 굉장히 조직화한 거짓말이다. 물론 그들이 아예 틀린 말로 현혹하는 것은 아니다. 한 부분을 계속 강조하는 거다. 그런데 인간이 어떻게 한 부분만 있을 수 있나. 다양한 면이 있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에서 알려준 베토벤의 옹졸함은 상상을 뛰어넘었다. 그 덕에 베토벤 또한 나와 같은 사람이구나, 나 역시 베토벤처럼 될 수 있다는 희망을 품게 됐다. 베토벤의 성격에 동질감 혹은 매력을 느꼈나.
▶됨됨이가 부족한 예술가에게 애정이 간다. 베토벤, 모차르트, 루이 암스트롱, 엘비스 프레슬리는 비겁한 부분을 많이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그 음악가의 가치를 깎아내린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더 인간적으로 이해할 길이다.

-재즈가 흑인 노예의 역사에서 파생됐다는 점이 극적이고 매력적이었다. 리듬 앤 블루스, 소울의 기원도 독자의 마음을 움직이게 하는 힘이 있다. 하지만 오늘날 명반으로 불리는 재즈 음반들은 건조하고 난해한 것들이 많다. 재즈의 태생적 감동을 느끼고 싶다면 어떤 순서로 접근해야 할까.
▶루이 암스트롱부터 들으면 된다. 루이 암스트롱(Louis Armstrong)-Plays W.C. Handy.  1954년 음반이다. 재즈에 대한 아무런 지식이 없는 사람도 듣는 순간, 인간의 희로애락을 원초적으로 느낄 수 있다. 재즈는 1940년대 중반을 넘어서면서 복잡하고 어려워졌다. 사실 그때는 재즈가 대중성을 잃기 시작하는 시점이다. 재즈가 로큰롤에 모든 대중성을 빼앗기게 된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은 음악이 시대를 어떻게 반영했는지 알려주고 있다. 시대 반영적으로 볼 때 근래의 음악 소비는 어떤 특징이 있나. 
▶대중음악은 글자 그대로 대중이라는 시장의 상품적 요소와 음악이라는 예술이 결합해 만들어진 것이다. 두 개념은 어찌 보면 양립하기 어려워 보인다. 대중음악에는 다양한 얼굴이 들어있다. 상품으로서 많이 팔리고 싶은 욕망과 뭔가 창조적인 가치를 가지고 싶어 하는 예술적 속성이 들어있다. 혹은 사회적 발원이기 때문에 뭔가 사회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싶어 하는 욕구도 들어있다. 상품적 요소, 예술적 요소, 사회적 요소가 모여서 대중음악이 만들어진다.  대중음악적으로 가장 훌륭하고 풍요로운 시대는 위 세 가지 요소가 서로 견제하고 균형을 맞출 때였다. 1960년대 미국이나 1980년대 한국이 그랬다. 상품적으로 굉장히 훌륭하면서 동시에 예술적인 창조성을 가진 음악가들이 있었고, 굉장히 사회적인 의식을 가진 음악도 많이 나왔다. 굉장히 다양하게 공존했다. 지금은 K-POP이 한류를 타고 세계시장으로 진출하고 있지만, 오로지 상품으로서의 음악만 독주하고 있는 측면이 있다. 소수 엔터테인먼트가 모든 걸 다 가지는, 승자 독식의 시대라는 점에서 굉장히 불행한 시대라고 볼 수도 있다.

-음악을 상품으로만 취급하고, 한두 개 회사가 수익을 독식하는 흐름을 바꾸는 것은 굉장히 힘들 것 같다. 어떤 시도를 해야 변화의 가능성이 생길까.
▶상품 판매와 인기의 유혹은 자본주의의 본질적인 욕망이다. ‘내가 유명해져서 많이 팔리는데 뭐가 문제야’라고 얘기할 수 있다. 거기에 영향을 받은 대중들도 오로지 그것만이 유일한 가치라는 인식을 공유하게 된다. 이런 분위기에서 뭔가 비판적인 인식을 가진, 자기만의 목소리를 내는 음악가에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말은 굉장히 공허하게 들릴 수 있다. 하지만 대중문화의 권력은 구매에서 나오는 것이다. 아무리 의미가 있다고 하더라도 사람들이 그 음악을 돈 주고 사지 않으면 결국 사멸된다. 국내 음악 흐름을 비판만 하지 말고 예술성과 시대성에 밀접한 음악을 발견했을 때 그것을 구매하고 적극적으로 알려야 한다. 아이돌 그룹이 왜 세계적으로 인기를 끌었겠는가. 팬들이 수없이 퍼 나르고 알렸기 때문이다. 법을 바꾼다고 하루아침에 해결되는 성격이 아니다. 사실 그것이 힘들다는 것도 안다. 20대 청년들이 여유가 없다. 스펙 위주, 대세만을 쫓아야 하는 분위기 때문이다. 문화적으로 이것저것 누릴 수 있는 정신적 여유가 없다. 사회가 이전보다 경제적으로 풍요로워졌을지 몰라도 문화적으로나 정신적으로는 굉장히 허약해졌다. 사람들 사이에서 왕따는 되기 싫으니까 대세, 주류 위주로 관심을 둔다. 딱 그 정도를 소비하고 끝낸다. TV나 라디오, 언론도 결국 대세를 추종한다. 시청률이 나와야 먹고살 수 있으니 끌려가는 것이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통해 얻은 두 가지는 예술가들의 민낯을 확인한 것, 보수층을 이해하게 된 것이다. 음악사를 통해 세대 간 갈등을 엿보다 보니 이해심이 생겼다. 새로운 흐름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윗세대를 어떤 관점으로 봐야 할까.
▶젊을 때는 지금보다 과격했고 빨리 윗세대들이 없어져야 나라가 잘될 거로 생각한 적도 있다. 그런데 같은 생각을 하는 친구들이 50대가 되고 또 보수화되는 것을 보면서 어쩔 수 없는 흐름으로 바라보기도 했다. 책에서 박정희를 비판적으로 썼지만, 박 정권이 이룬 산업화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오늘날 대한민국의 물질적 토대를 이뤘다. 산업화 세대들이 자부심을 품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산업화 세대들은 권위적인 통제, 상명하복 체제에 익숙하므로 개성의 다양성에서 출발하는 민주주의적 감수성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갈등은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서로의 차이를 냉정하게 인정해야 한다고 본다. 사실 둘은 불가분의 관계다. 그리스 민주주의를 보더라도 경제적 물적 토대가 없는 민주주의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 서로의 차이는 어쩔 수 없지만 그것이 적으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책에 주석이 굉장히 풍부하다. 누구나 알 것 같은 인물에 대한 주석까지 일일이 달았다. 주석을 방대하게 진행한 의도는 무엇인가.
▶주석을 좋아한다. 물론 귀찮은 사람은 안 읽어도 상관없다. 주석에는 또 하나의 정보가 풍부하게 담겨있다. 요즘은 주석이 많이 달리는 책이 별로 없다. 이 책이 논문집은 아니지만, 주석을 풍성하게 달아서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정보를 알고 싶은 독자들의 욕구를 채워주고 싶었다. 글 쓰는 자의 의무는 아닌가 생각했다.

-음악적 이론과 역사 흐름을 부드럽게 서술하는 것을 책의 장점으로 봤다. 140페이지 김민기 버전 아침이슬을 ‘청승의 습기’라고 표현한 것에 감탄했다. 어떤 스타일의 글을 추구하고 있는가. 
▶정말 훌륭한 글은 중학교만 마친 사람도 이해할 수 있는 글이라고 생각한다. 글을 어렵게 쓰는 사람들을 믿지 않는다. 그들은 뭔가 숨길 게 있는 것이다. 진정한 천재들이 쓰는 글은 굉장히 쉽게 읽힌다. 사실 나도 글을 어렵게 쓰는 축에 속했다. 그런데 케임브리지대학교 장하준 교수가 쓴 글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경제 분야는 일반인들이 잘 모르지 않나. 관심도 없는 복잡한 경제문제를 나 같은 문외한도 이해할 수 있게 굉장히 쉬운 단어로 하지만 구체적이고 정확하게 짚어주는 것을 보고 ‘진짜 많이 배운 사람은 다르구나.’느꼈다. 나도 글을 이렇게 쓰는 훈련을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음악 평론가적 관점은 어떻게 쌓을 수 있나. 음악을 많이 듣는 것으로부터 시작되나. 
▶음악을 좋아한다고 음악만 주구장창 듣는 것은 좋은 방법이 아니다. 인문, 사회, 자연 과학적 관심을 기반으로 들을 때 음악은 훨씬 풍요로워진다. 역사를 공부하면서 ‘베토벤이 이런 시대에 살았구나.’, ‘엘비스 프레슬리는 50년대 미국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보수적인 분위기 속에서 등장한 것이구나.’라는 이해다. 이렇게 접근할 때 음악의 다양한 표정이 드러난다.

-음악을 듣는 폭을 넓히고 싶어도 취향의 벽에 가로막힐 때가 있는 것 같다. 다양한 음악을 좋아할 수 있다는 것은 타고난 취향의 문제일까.
▶개인 취향의 문제라는 말을 그다지 신뢰하지 않는다. 초기에 학습된 음악이 그 장르였기 때문이지, 내가 어떤 음악 취향이라는 말은 나머지 음악에 무지하다는 얘기도 된다. 취향이라는 말은 조심해서 써야 하는 말이다. 마음을 열고, 많은 음악적 경험을 할 필요가 있다. 그러다 보면 이 음악은 이래서 좋고 저 음악은 저래서 아름답다는 것을 알게 된다. 취향은 반복된 학습의 산물이다. 음악을 듣는 폭을 넓히는 것이 풍요로운 음악 생활을 할 길이다.

-음악평론가의 관점을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즐겨 듣던 음악은 어떤 것이었나. 그 이후 평론가의 기운이 생기는 계기는 언제였나. 
▶1970년대 쎄시봉의 윤형주, 송창식, 김정호, 이장희, 양희은, 박인희 등 가수들을 미친 듯이 좋아했다. 지금 어린 친구들이 아이돌 스타를 좋아하는 것에 뒤지지 않았다. 그렇게 음악을 쭉 듣다 보니 한 음악가의 앨범 사이에서도 훌륭한 음반, 만들다 만 것 같은 평범한 음반으로 나뉘게 됐다. 서로 공통된 요소를 가진 두 가수 사이에도, 굉장히 창조적으로 들리는 가수가 있는가 하면, 뻔히 하는 소리만 하고 끝내는 가수가 있는 것으로 들렷다. 다양한 질적 차이가 느껴졌다. 하지만 그것이 어디서 기인하느냐를 스스로 물어봐야 한다. 그러다 보면 자신이 듣는 음악에 대해 객관적인 판단을 할 수 있다. 점점 자신의 기준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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