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량과 설치·위훈삭제…정국공신들의 반발 불러

[일요서울 | 우종철 논설주간] 1506년 중종반정으로 조선사회는 연산군 시대의 잘못된 정치를 일신, 새로운 조선을 재창조하는 분위기가 성숙되었다. 이때 사림들이 정치에 재진출하며 조정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다. 조광조(趙光祖, 1482~1519)는 훈구세력의 잘못된 정치 관행과 권력형 비리를 문제시하는 사림세력을 영도하는 위치에 있는 인물이었다.

조광조는 조선시대 ‘개혁 아이콘’으로, 정도전 이후 최고의 개혁가로 손꼽힌다. 1515년(중종10), 사간원 정언(正言)이 된 조광조는 “박상·김정 등의 상소(억울하게 폐위된 중종의 왕비 신씨 복위 요청)에 대하여 재상이 혹 죄주기를 청하더라도 대간은 구제하여 풀어주어서 언로를 넓혀야 할 터인데, 도리어 언로를 훼손하여 그 직분을 잃었으니, 사헌부와 사간원 전체를 해임해 달라”는 사직상소를 올려, 자신을 제외한 대간 전원이 교체되었다.

조광조는 유교적 이상정치, 즉 도학정치(道學政治, 요순시대의 정치)를 구현하려는 다양한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국왕에 대한 교육, 조정 내 언로의 확충, 소격서 폐지, 성리학 이념의 전파, ≪소학≫의 보급, 향촌질서의 개편, 현량과(賢良科)를 통한 사림파의 등용과 훈구정치의 개혁을 추진하였다.

1518년(중종13), 홍문관 부제학이 된 조광조는 자신이 추진하는 개혁정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다음과 같은 상소를 올려 공론을 조성하고자 하였다. “신 등이 듣건대 군자는 양이요 소인은 음이라 합니다. 군자가 나오면 천하가 태평하고, 소인을 등용하면 천하가 어지럽게 되는 것입니다. 조정에서 할 일은 군자와 소인을 가려서 등용하고 물리치는 것보다 더 급한 것이 없습니다. (중략) 장수를 잘 가려 뽑는 일이 가장 긴요합니다. 합당한 인물을 얻은 뒤에 부하 아전들을 골라 백성을 살피고, 규율을 세워 군사들을 다스리며, 나라의 경계와 요해처를 지키며, 방어를 조심하고 적의 형세를 잘 살펴야 합니다. (중략) 우리나라가 어지러운 정치(연산군 시대)를 겪은 이후로, 선비들의 습성이 더럽고 인심이 게으르며 기강이 문란하고 법도가 무너져버린 지 이제 10여 년이 지났는데 아직도 이를 고치지 못한 것은 실로 전하와 함께 천직(天職)을 다스리는 자들이 능히 보좌하는 공을 다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하략)”

조광조가 추진한 개혁정치의 핵심은 현량과의 설치와 위훈삭제(僞勳削除, 정국공신 117명 가운데 76명의 공신칭호 박탈)를 들 수 있다. 그러나 급진적인 개혁은 조광조에게 ‘기묘사화(己卯士禍)’라는 부메랑으로 돌아왔다. 추천으로 관료를 뽑는 현량과는 공정성을 담보할 수 없는 맹점이 있었고, 위훈삭제는 중종을 옹립한 정국공신(靖國功臣)들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훈구파의 남곤과 심정 등은 “민심이 점차 조광조에게로 돌아간다” 하고, 대궐 후원에 있는 나뭇가지 잎에다 ‘주초위왕(走肖爲王)’이라고 꿀로 글을 써서 그것을 벌레가 파먹게 한 다음, 자연적으로 생긴 양 꾸미어 궁인으로 하여금 중종에게 고하도록 하였다. ‘走肖’는 즉 ‘趙’자의 파획(破劃)이니 이는 조씨가 왕이 된다는 혹세무민이었다. 중종은 점차 사림들의 급진적·배타적인 태도에 염증을 느끼게 되었고, 위훈삭제 사건이 중종반정을 반역사건으로 몰아가는 것으로 의심하게 되었다. 마침내 남곤·심정·홍경주 등은 밤중에 대궐로 들어가 신무문에 이르러 중종에게 “조광조의 무리가 모반하려 한다”고 아뢰었다. 친위 쿠데타였다. 이 사건으로 조광조는 38세의 젊은 나이에 불꽃같은 삶을 마감했다.

율곡 이이는 ≪석담일기≫에서 조광조의 실패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그는 어질고 밝은 자질과 국가를 경영할 재주를 타고났음에도 불구하고, 학문이 채 이루어지기도 전에 정치에 나간 결과, 위로는 임금의 잘못을 시정하지 못하고 아래로는 구세력의 비방도 막지 못하였다. (중략) 후세 사람들에게 그의 행적이 경계가 되었다.”

이이는 조광조의 개혁이 실패한 원인으로, ▲조광조의 학문의 숙성되지 않았다는 점 ▲너무 급진적이었다는 점 ▲기본에 충실하지 않았다는 점 등을 지적하고 있다. 시대를 앞서간 개혁정책은 기묘사화로 비록 물거품 되었으나, 조광조가 꿈꾸었던 이상사회는 이후 후학들에 의해 조선 사회에 구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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