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서울|이창환 기자] 작가 조한성이 쓴 <해방 후 3년-건국을 향한 최후의 결전>은 민족지도자 일곱 명을 통해 무한한 가능성의 시대를 되짚는다. 해방과 혼란, 통일과 전쟁이라는 관념과 실체가 소용돌이친 3년 동안 우리 민족은 어떤 선택을 했고 어떤 길을 걸었는지를 구체적으로 생생하게 따라간다. 일곱 명의 인물은 차례로 여운형(조선인민당), 박헌영(조선공산당), 송진우(한국민주당), 김일성(북조선공산당), 이승만(독촉국민회), 김구(한국독립당), 김규식(좌우합작위원회)이다. 조한성을 인터뷰하면서 친일 청산, 역사 교양서가 추구해야 할 방향, 하나의 사건을 위한 다양성, 역사와 더욱 가까워졌던 터닝 포인트 등을 들어봤다. 역사학자이자 대중적인 역사서를 지향하는 작가답게 현실 비판 또한 날카로웠다. 최근 첨예한 대립을 낳고 있는 ‘교과서 국정화’에 대한 발언도 빼놓지 않았다.

 
-대학원에 다닐 때 역사학의 정수를 배웠다고 들었다. 그 정수는 구체적으로 어떤 것이었나.
▶역사학의 정수라고 하면 거창해 보이는데, 다른 게 아니라 역사를 공부하는 데 가장 중요한 두 가지를 배웠다는 뜻이다. 첫째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비판적으로 검토하는 방법이고 둘째는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 방법이다.
기존의 연구 성과를 검토하는 것은 출발점을 확인하는 작업이다. 좋은 것은 수용하고 나쁜 것은 비판하며 스스로 위치를 찾는다. 사료를 비판적으로 읽는다는 것은 세상에 존재하는 수많은 사료 중에 어떤 것을 선택하고 어떤 것을 버려야 하는지 결정하는 작업이다. 합리적이고 비판적인 논증 과정을 거쳐 일부를 취사선택한 후 역사를 서술한다.
한국현대사 박사 1호 서중석 교수, 한국근대사 임경석 교수에게 역사를 배운 적이 있다. 두 분의 가르침 덕분에 두 가지 방법을 습득할 수 있었다.
 
-대학교에서 강의할 때 느꼈던 점은 어떤 것이었나. 학생들과 함께하면서 집필에 대한 방향이 정해지기도 했나.
▶연구와 강의는 완전히 다른 차원이다. 아는 것과 그것을 남에게 전달하는 것은 전혀 다른 기술 같다. 요즘은 대학 강의는 안 하고 가끔 대중 강연만 나가는데 그때마다 새로운 것을 배운다. 가르치면서 부족한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당연히 저서 집필에 큰 영향을 미친다. 강의에서의 경험을 통해 더 쉽게 말하고 설명하는 법을 찾으려고 하는데, 잘되고 있는지는 모르겠다. 계속 노력하고 있다.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의 역사를 추적했다고 들었다.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을 하면서 느꼈던 가능성과 한계는 무엇이었나.
▶진상규명위원회 활동은 친일반민족행위자의 잘못을 정부 차원에서 공식화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친일파 청산을 위한 시민사회의 높은 관심이 위원회 발족에 영향을 미쳤다. 친일반민족 청산에 대한 시민들의 염원도 넓게 퍼졌다. 이제는 국무총리 후보자도 친일파를 옹호하는 발언을 하면 낙마할 수 있다는 환경이 만들어졌다.
가장 큰 한계는 1945년 해방 직후에 해야 했던 일을 60여 년이 지난 뒤에 시작한다는 것이었다. 많은 세월이 지났기 때문에 문서 등 실증자료 외에는 친일반민족행위를 입증할 방법이 거의 남아있지 않았다. 더구나 위원회는 한시적인 기관이어서 당시 역사 연구 수준 내에서 진상 규명을 할 수밖에 없었다. 중앙의 친일반민족행위자들은 대부분 검토했지만, 지방과 해외의 친일반민족행위자에 대한 조사는 형식적으로 이루어질 수밖에 없었다. 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빠졌다고 친일파가 아닌 것은 아니다.
 
-처음 사학과에 입학할 때, 학생들을 가르칠 때, 처음 작가로서 발을 디딜 때 등 몇 번의 터닝 포인트가 있을 것 같다. 그때마다 어떤 깨달음을 얻었나.
▶중고등학교 때 국사나 세계사를 다른 과목보다 좋아했기 때문에 사학과를 선택했다. 그런데 대학교에서 한국현대사를 처음 접하고 난 후 상당한 흥미를 느꼈다. 특히 1980년 광주민주화운동을 공부하면서 한국현대사를 본격적으로 공부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대학원 생활은 역사학의 진면목을 알게 된 순간이다. 역사가 사회과학이 아니라 인문학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요즘은 대부분 사람들이 역사를 인문학의 한 분야로 받아들이지만 대학교에 다니던 1993년만 해도 1980년대 민주화운동과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이 깊게 남아있어 역사를 사회과학 분야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대학원에서 역사를 공부해보니 이건 과학의 법칙이 작동하는 사회과학보다는 인간의 본성을 탐구하는 인문학에 더 가까웠다. 큰 충격이었고 평생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사과정을 수료하던 중에는 그 어려운 과정을 벗어날 수 있는 계기가 필요했다. 그 결과가 두 권의 저서 <한국의 레지스탕스>와 <해방 후 3년>이다. 전문적인 연구가 아니라 대중적인 역사서를 저술하는 것이어서 역사를 좋아하는 분들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수 있길 바랐다. 학계와 대중의 연결고리가 될 수 있는 작업을 계속할 예정이다.
 
-지금까지 나온 역사분야 교양서들의 아쉬운 점은 어떤 것이었나. 앞으로 어떤 역사, 현대사 책이 등장하길 바라나.
▶역사분야 교양서 시장의 가장 큰 문제는 좋은 저자가 쓴 좋은 저서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점이다. 그동안 역사학계는 대중적인 역사서를 저술하는 작업을 등한시한 경향이 있다. 그러다 보니 역사 대중서의 질이 떨어지고 얼마 안 되는 독자들마저 떨어져 나가는 악순환이 계속됐다. 역사학계가 대중적인 역사서 저술에도 적극적으로 나섰으면 좋겠다. 함께 힘을 보탤 생각이다.
앞으로 보통 사람들을 통해 역사의 격류를 다루고 싶다. 역사의 격류가 몰아친 시기에 보통사람들이 어떻게 살아왔는지 살펴보는 작업이다.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각 개인이 경험한 다양한 역사를 그리는 것이 목표다.
 
-역사의 가능성을 확인하기 위해 <해방 후 3년>을 썼다고 했다. 역사적 갈림길의 순간에 똑같은 잘못을 저지르지 않아야 한다는 메시지 등이 담겨 있는 건가.
▶1945년 해방 후 3년의 역사가 단지 외부세력에 의해 주어진 것이 아니라, 많을 가능성 안에서 우리 스스로 선택과 행동을 통해 만들어졌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었다.
해방 후 3년은 모든 가능성이 열려 있던 변화무쌍한 시기였다. 이를 인정하면 결과론적 해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대한민국은 처음부터 이렇게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렇게 되도록 수많은 선택과 행동을 해왔다.
이 시기의 가능성을 인정하고 나면 보이지 않던 역사가 보인다. 해방 후 3년에는 극우반공의 역사만이 아니라 민족통일의 역사도 있었다. 극우극좌의 대립 논리에 휘말려 역사의 소용돌이 속에 빠진 수많은 민중, 보통사람, 중간파가 있었다.
 
-몇몇 역사서를 읽으면서, 교과서나 교재에 실린 내용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다. 왜곡, 전달 방식의 엉성함, 축소 편향적 시각 말이다. 교과서의 한국사를 공부할수록 진실과 멀어질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먼저 역사교과서는 현행의 검정제보다는 저자들의 저술상의 자유를 최대한 보장하는 자유발행제로 가야한다. 역사에는 하나의 정답이 있는 것이 아니므로 다양한 해석을 보장해야 진실에 가까워질 수 있다. 시험을 위한 역사는 암기과목 중 하나일 뿐이다. 역사를 하나의 정답만 존재하는 암기과목으로 인식하는 것이야말로 역사를 가장 곡해하는 것이다. 역사를 많이 안다는 것이 남들보다 역사적 지식 하나를 더 기억하는 게 아니라고 생각한다. 역사를 많이 안다는 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이라도 합리적인 근거나 논증을 통해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느냐에 달려 있다. 하나의 역사가 아니라 다양한 역사라는 생각이 늘어났으면 좋겠다.
한 가지 우려스러운 점은 최근 박근혜 정부가 검정제를 폐지하고 국정교과서로 가려고 한다는 점이다. 여러 개의 교과서가 혼란스럽다며 하나의 역사교과서로 가자고 하는데 역사를 단단히 오해한 결과다. 박근혜 정부의 목적은 자명하다. 역사교과서를 친일세력과 독재세력을 긍정하는 정권 홍보용 교과서로 만들려는 거다. 역사교과서를 바꾸면 정권을 영원히 장악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같다.
 
-<전복과 반전의 순간>을 쓴 저자 강헌은 1949년 반민특위의 좌절을 20세기 대한민국 역사에서 가장 불행을 날로 꼽더라. 나라를 뺏기고 식민지가 됐던 것이 문제가 아니라, 나라를 되찾았을 때 지난 역사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지금처럼 큰 대가와 좌절을 치르지 않았을 것이라는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꼽는 역사의 비극적 순간은 언제인가.
▶여러 장면을 꼽을 수 있겠지만 한국전쟁이 아닐까 싶다. 책에도 썼지만 당시 한국전쟁은 대부분 사람이 예측할 수 있던 전쟁이었다. 그런데도 아무도 그 전쟁을 막지 못했다는 것이 너무 안타깝다. 왜 김일성과 박헌영은 힘으로만 남북을 통일하려 했을까. 그것이 얼마나 많은 희생과 비극을 양산하게 될지 생각하지 못했을까. 그들의 혁명이 수백만의 목숨을 희생할 정도의 가치가 있는 것이었을까. 왜 이승만은 제대로 방어할 힘도 갖추지 못했으면서 북진통일을 외쳤을까. 이승만은 북진통일을 외침으로써 전쟁을 막을 가능성을 모두 봉쇄하고 말았다. 미국은 이승만이 전쟁을 일으킬까 봐 제대로 군비를 지원하지도 않았고 상호안전보장조약도 해주지 않았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은 극우와 극좌의 경쟁이 극단으로 치달은 결과다. 다시는 극우와 극좌에게 극단으로 치달을 기회를 주어선 안 된다고 생각한다. 그들이 극단으로 치닫는 이유는 나라를 위한 것도, 국민을 위한 것도 아니다. 단지 권력의 유지, 기득권의 유지 수단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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