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거녀에 정자만 주고 결별 요구한 동거남…사실혼 깨져도 자녀

법원 “사실혼 관계였고 정자제공자도 특정되는 점에 비춰 친자관계 성립”
사실혼 배우자간 인공수정의 경우 부자관계 정하는 기준 제시한 판결


최은서 기자 = 한 여성이 사실혼 관계이던 남성으로부터 헤어질 것을 전제로 인공수정을 위한 정자를 제공받았다. 이 여성은 정자를 제공받으며 ‘임신 이후 어떤 책임도 묻지 않겠다’는 각서를 썼다. 이후 이 여성은 시험관 아기 시술 성공으로 쌍둥이를 출산했고 홀로 두 아이를 키웠다. 하지만 생활고에 지친 이 여성은 ‘친자임을 확인하고 양육비와 위자료 등을 지급하라’며 지난해 법원에 인지청구 등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법원은 각서와 관계없이 법적으로 친자관계가 성립한다고 원고일부 승소 판결했다. 이번 판결은 사실혼 관계의 배우자간 인공수정의 경우 부자관계를 정하는 기준을 제시한 최초의 판결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고 있다.

회사원 서모(39·여)씨는 10년 전 인터넷 채팅을 통해 명문대에 다니던 박모(30)씨를 알게 됐다. 서씨는 2001년 말부터 2008년 말까지 7년간 자신의 오피스텔에서 박씨와 동거했다.

서씨는 2007년부터 박씨와 결혼준비를 시작했다. 동거기간 중 박사학위를 받은 박씨는 서씨 부모에게 정식으로 인사를 하고, 서씨 아버지의 고희연에 참석해 가족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가능한 결혼을 빨리 하겠다”며 결혼 의사를 밝혔다.

하지만 2008년 박씨가 인터넷 채팅으로 여대생 안모씨를 만나면서 두 사람의 관계가 틀어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박씨가 안씨를 자신의 여동생인 것처럼 속여, 서씨는 두 사람의 관계에 대해선 전혀 알지 못했다. 박씨는 같은 해 12월 “부모가 결혼을 반대해 정신이 없다”고 연락을 끊었고 여동생으로 가장한 안씨는 “오빠가 신경쇠약진단까지 받았으니 연락하지 말고 헤어졌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2009년 1월 서씨는 박씨를 만나 “하혈로 병원 처방을 받고 있는 중이다”라며 “자궁이 안좋아지고 있으니 아이를 갖고 싶다. 아기가 생기면 결혼을 반대하는 부모님에게도 좋지 않겠느냐”며 아이를 갖자고 제의했다. 서씨는 2007년 임신중절 수술로 인한 자궁선근종 진단을 받은 상태였던데다 두 차례의 자연 유산도 겪어 인공수정밖에는 방법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또 임신을 하면 박씨 부모의 결혼 반대를 극복할 수 있으리란 판단도 있었다.

서씨와 헤어질 생각이 급했던 박씨는 정자제공에 승낙하면서도 각서를 쓰라고 조건을 달았다. 서씨는 거부했으나, 박씨가 “각서를 쓰지 않으면 정자제공을 해주기 않겠다”고 하자 마지못해 각서를 썼다. 각서는 “정자를 증여받는 대신 박씨를 비롯한 일가친척 및 지인에게 연락및 접촉을 하지 않는다. 정자 증여 이후의 사건들(임신, 출산, 육아, 양육)에 있어서 어떠한 책임을 지지 않는다”는 내용이었다.

이후 서씨는 2009년 3월경 시험관 아기 시술에 성공해, 쌍둥이를 출산하게 됐다. 이후 박씨는 서씨의 출산이 임박해오자 2009년 9월경 서씨와 서씨 큰오빠, 작은오빠, 언니를 상대로 접근금지가처분을 신청하였으나 기각됐다.

출산 이후 생활고에 시달렸던 서씨는 지난해 박씨를 상대로 친자관계를 인정하라는 인지청구 소송을 제기했다. 이에 박씨는 “정자를 제공했으나 아버지가 될 의사가 없었으므로 인지청구는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서울가정법원 가사3부(부장 박종택)는 박씨에게 아이의 미지급 양육비 1600만 원과 향후 양육비로 매달 1인당 50만 원, A씨에게 위자료 3500만원을 지급하라고 판결했다고 지난 3일 밝혔다.

재판부는 “박씨는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으로서 인지청구가 허용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나, 서씨와 사실혼 관계였고, 정자제공자도 특정된다”고 판결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면서도 재판부는 “비배우자간 인공수정의 경우는 인지청구를 할 수 없다”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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